매우 특별한 나라, 스위스
피에가 스피커는 작다. 폭도 좁고, 높이도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엄청난 스케일과 다이내믹스를 자랑한다. 흡사 뭐에 홀린 듯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음색. 눈을 감으면 어느 귀족의 살롱에서 한껏 사치를 부리며 듣는 기분이다. 꼼꼼하게 제품을 살펴보면, 스위스에서 자랑하는 시계나 정밀 공학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작지만 강하다. 마치 스위스 같다.
흔히 강소국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라의 사이즈와 인구는 작아도, 국력은 상대적으로 큰 나라를 뜻한다. 유럽에는 스위스,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꼽힌다. 우리는 그보다 좀 사이즈가 크면서, 아무래도 중국과 미국과 같은 대국은 아니므로, 강중국 정도로 표현하면 어떨까 싶기는 하다.
각종 첨단 산업과 시계, 정밀 공학, 오디오 등에서 스위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고작 900만도 되지 않은 인구에, 우리나라 남한 땅만 비교해도 고작 40% 밖에 되지 않은 국토를 가진 이 나라가 왜 이렇게 특별한가? 아마도 이에 대한 보고서를 쓰자면 책 한 권도 모자랄 것 같으므로, 아주 간략하게 우리의 관심사만 다뤄보겠다.
일단 스위스 하면, 빅토리녹스로 대표되는 아미 나이프부터 롤렉스, 오메가, 피아제 등 명품 시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건강식품과 의학 부분도 대단하며, 스마트 시티에 관한 연구도 톱클래스다. 게다가 오디오로 눈을 돌리면, 골드문트, FM 어쿠스틱스, 나그라, CH, 솔루션 등 강자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따라서 피에가라고 하면, 일단 메이드 인 스위스라는 점만 갖고도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정말 부러운 환경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같은 스위스 오디오 메이커면서도 좀 다른 면이 있다.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스위스에서도 유니크한 피에가
첫째는 스위스산 오디오 회사 대부분이 프랑스와 인접한 제네바를 근거로 삼는 반면, 동사는 취리히에 진을 치고 있다. 프랑스의 영향이 강한 제네바에 비해, 취리히는 독일을 베이스로 삼고 있다. 두 나라의 기질이나 개성의 차이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즉, 같은 스위스 출신이라고 해도 피에가는 좀 다른 것이다.
둘째는 대부분 앰프와 DAC에 집중하는 데에 반해, 피에가는 스피커를 만든다. 이 점이 재미있다. 앰프와 스피커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과 제조 프로세스를 갖는다. 상대적으로 스피커의 존재가 귀한 스위스에서 정말 피에는 독자적이고, 특별한 존재인 셈이다.
왼쪽부터 피에가의 창업자 쿠르트 셰우크(Kurt Scheuch), 레오 그레이너(Leo Greiner)
이렇게 유니크한 개성을 갖고 있는 피에가인데, 또 하나 언급할 특징이 있다. 즉, 두 명의 창업자가 공동으로 설립했다는 부분이다. 한 명은 쿠르트 셰우크라는 엔지니어이고, 또 한 명은 레오 그레이너라는 디자이너다. 전자는 독일계이고, 후자는 이태리계로 추측이 된다. 즉, 독일과 이태리 연합군으로 구성된 셈이다. 기계 공학과 과학이 발달한 독일에다 각종 명품과 예술적 센스가 돋보이는 이태리의 결합. 거의 환상의 복식조인 셈이다.
참고로 피에가는 이태리어다. 영어로 번역하면, “curve, bend, fold” 등이 나온다. 가만, 피에가의 제품들은 대부분이 모서리를 각지게 만들지 않는다. 곡선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자랑한다. 즉, 구부리는 것이다. 이 작명에서 피에가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지 않은가?
알루미늄과 리본
피에가를 논할 때, 꼭 언급해야 할 기술이 두 개 있다. 바로 알루미늄과 리본이다. 전자부터 설명하자. 사실 요즘에는 알루미늄 전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메이커들이 참전 중이다. YG 어쿠스틱스, 스텐하임, 골드문트, 매지코, 크렐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제넬렉이 뛰어들었고, 바워스 앤 윌킨스도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피에가로 말하면 이미 20년 전부터 C40을 만들면서, 이 분야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대체 알루미늄은 어떤 장점이 있는가? 아마 현존하는 소재 중에 가장 인클로저에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가볍고, 단단하며, 내부 보강재를 잘 설계하면 어떤 형태로도 만들 수 있다. 직사각형이 아니라, 가운데 부분이 홀쭉하다던가, 동그란 마무리로 처리한다던가, 아무튼 성형이 쉽다.
물론 이렇게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런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벤더가 확보되어야 한다. 다행히 스위스에는 이런 금속 가공 쪽으로 톱클래스의 회사들이 많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의 피에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리본. 주로 리본 트위터로 알려졌지만, 동사는 미드레인지도 이 소재를 쓴다. 이것의 장점은 마치 아코디언처럼 유입되는 음성 신호의 성격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일반 드라이버보다 넓은 용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방사각이 넓고, 자체 진동도 거의 없다. 일반 드라이버에서 발견되는 분할 진동은 아예 없다. 예전에는 임팩트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약점도 적극적으로 극복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번에 만난 코액스 511은, 모델 명이 말해주듯, 동축형 스타일로 꾸몄다. 즉, 저역까지 아우르는 온전한 동축형은 아니지만 (만일 이런 설계를 한다면 프런트 배플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진다!), 중고역을 주축으로 매우 합리적인 디자인을 이루고 있다. 동축형이 가진 최대 장점은 위상에 흐트러짐이 없고, 점 음원의 강점이 두드러져 빼어난 3D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동안 리본을 만지면서 이제는 동축형으로 진화시킨 피에가의 저력은 본 기에서도 단단히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무엇인지 아는 메이커
개인적으로 피에가에 탄복한 것은, 이런 기술적 특징에만 있지 않다. 실은 동사를 움직이는 주요 스탭들의 다양한 개성이다. 일단 피에가에 입사하기 전에 가졌던 직업이 모두 다르고, 현재 추구하는 취미도 제각각이다. 누구는 낚시를 좋아하고, 누구는 웨이크보드를 즐기며, 누구는 와인 러버다. 심지어 싱글 몰트를 홀짝이는 술꾼도 있다.
이들은 한데 묶는 것은 바로 음악. 모두 음악에는 귀신이다. 또 스탭 중에 완전한 음악광이 있어서 자체 행사를 하거나 외부에서 누가 와서 파티를 하면 아예 DJ를 자처한다고 한다. 즉, 이런 다양한 개성과 열정, 취미 등이 어우러져서 결국 제품의 완성도를 한껏 높이고 있는 것이다. 스피커가 단순한 트랜스듀서에 그치지 않고, 음악에 담긴 혼과 열기를 함께 표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서 피에가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빼어난 디자인 센스. 설치 면적을 크게 차지하지 않고, 어디에 들여도 튀지 않으면서 조화될 뿐 아니라, 찬찬히 들여다보면 강력한 자기주장이 담겨 있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와이드 레인지. 제대로 앰프를 물려주면 어지간한 중대형기 못지않은 박력과 파워를 들려준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중국 광저우 쇼에 가서 동사의 플래그십 마스터 라인 소스를 들은 적이 있다. 무려 6개의 우퍼를 담은 별도의 박스가 있고, 중고역부에는 숱한 리본이 라인 어레이처럼 들어선 정말 무지막지한 기기다. 여기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정보량과 음악성에 대해선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아무튼 이때 어느 술자리에서 피에가의 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정말 열정이 넘치고, 포스가 대단했다. 농담도 잘하고, 남을 편하게 하는 면이 인상적이었다. 얼핏 보면 그림이나 디자인 쪽에 종사할 것 같은 분위기. 피에가를 단순한 스피커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데에는 이런 피에가 종사자들의 개성과 예술적 감수성이 크게 한몫한다고 새삼 깨달았다.
코액스 511에 관해
현재 코액스 시리즈는 동사의 라인업 중 세컨드에 속한다. 맨 위로는 마스터가 있고, 그다음에 코액스, 프리미엄, 에이스 등으로 이어진다. 즉, 실질적으로 우리 환경에 적용해서 재미를 볼 수 있는 퍼포먼스와 가격대를 생각하면, 코액스 시리즈가 현실적이다.
왼쪽부터 피에가 Coax 711, 511, 311, 111 스피커
여기서 잠시 코액스 시리즈의 라인업을 보자. 두 종의 플로어 스탠딩이 있는바, 711과 511이 그 주인공이다. 북셀프로는 311이 있고, 멀티채널을 위해 111이라는 센터 스피커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본 기는 코액스 시리즈의 둘째에 속한다. 즉, 세컨드의 세컨드. 그러나 매우 특별하다.
일단 사이즈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높이는 1미터가 조금 넘는 115Cm이고, 폭이 22Cm에 불과하다. 맨 위로 리본 타입의 동축형 유닛이 달려 있고, 그 밑으로 6인치가 조금 넘는, 정확히는 160Cm 구경의 우퍼가 네 발 달려 있다. 정확히는 두 발이 우퍼이고, 나머지 두 발은 패시브 라디에이터다. 무게는 32Kg.
이렇게 보면, 일반 톨보이 스타일의 스피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상으로 보면 좀 허한 느낌까지 받을 것이다. 그러나 외관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포르셰가 그러하듯, 작지만 강하다. 무려 32Hz~50KHz에 달하는 광대역을 커버하고 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또 무척 앰프 친화적이어서 고작 20W의 출력으로도 구동이 된다. 감도는 4옴에 90dB. 매우 준수하다. 이럴 경우 애호가들의 취향에 맞춰 여러 형태의 앰프를 물려볼 수 있다. 최신 디지털 앰프부터 빈티지 진공관까지 정말 무궁무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출력보다는 스피드에 역점을 두겠다. 이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빠른 반응이기 때문이다.
사실 알루미늄 인클로저를 동원하고, 리본 유닛을 채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종래의 스피커에서 발견되는 통 울림을 억제하면서, 와이드 레인지하고, 해상력이 출중하고, 강력한 다이내믹 레인지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특히, 인클로저가 없는 듯한, 이탈감이 좋고, 뉘앙스가 풍부한 음은 정말 매력이 있다. 현대 스피커 이론을 총동원해서 다양한 음악을 아우른다는 야심이 발휘된 제품인 것이다.
본격적인 시청
본 기의 시청을 위해 소스기는 MBL의 N31을 동원했고, 앰프는 파라사운드의 JC2 BP와 JC5 세트를 사용했다. 강력한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기어에 맞물려, 마치 시속 300Km가 넘는 질주를 하는 스포츠카와 같은 자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 브람스〈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야사 하이페츠(바이올린)
- 말러〈교향곡 5번 1악장〉아바도(지휘)
- 카산드라 윌슨〈Love Is Blindness〉
- 라디오해드〈Karma Police〉
Jascha Heifetz - I. Allegro non troppo
Brahms &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우선 브람스부터. 처음에 놀란 것은, 최신 소스기의 능력이 한껏 발휘된 부분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 무척 오래전 녹음이지만, 모든 정보량이 한껏 쏟아지면서 온화하고, 사려 깊은 음향으로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비롯한 여러 악기들이 베일을 모두 걷어내고 매우 싱싱하고, 신선한 재생음으로 탈바꿈한 부분이다. 리마스터링을 몇 번이나 공들여서 해낸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배후에 흐르는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사이즈는 감동적이고, 그 앞에서 꿈틀거리는 바이올린은 감촉이 좋고, 에너지도 대단하다. 리본 계열이 갖는, 일체 인클로저의 영향이나 부대음이 없는 진솔한 중고역의 감촉. 한번 맛보면 강하게 중독되고 만다. 중간중간 투티가 폭발할 때의 에너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악마의 저역과 천사의 고역이 멋지게 어우러지고 있다.
Claudio Abbado - 1. Trauermarsch
Mahler: Symphony No. 5
이어서 말러. 역시 말러다운 재생음이다. 초반의 잔잔하고, 느릿느릿한 전개에서도 다양한 악기들의 표정과 포지션이 감지되며 점차 편성이 거창해지고, 폭발이 이뤄질 때의 흉폭한 에너지도 너끈하게 커버한다. 눈을 감으면 본기보다 몇 배나 크고, 무거운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음이다. 흡사 뭔가에 홀리거나 또는 속은 것 같다. 중간에 강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저역의 에너지는 정말로 경천동지할 만하다. 솔직히 말하면, 동사의 플래그십 마스터 라인 소스를 우리 가정 형편에 맞게 압축해서 발매한 듯하다.
Cassandra Wilson - Love Is Blindness
New Moon Daughter
카산드라 윌슨은 재즈의 원초적인 느낌, 말하자면 아프리카의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기운을 강하게 표현하는 가수다. 여기서도 그 장점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어쿠스틱 기타의 음울한 울림에다 다분히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을 강하게 휘어잡는 보컬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배후에 흐르는 무거운 북소리. 플로어 탐이라고 해서, 오로지 저역만 두드린다. 그게 일종의 최면 효과를 준다. 특이한 음향으로 나오는 코넷의 울림은, 본 트랙에 더욱 환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바로 이런 이펙트가 낱낱이 반영된다. 녹음실에서 숨을 죽이고 만든 음향이 여기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Radiohead - Karma Police
OK COMPUTER
마지막으로 라디오헤드. 정말로 락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바닥을 두드리는 드럼과 두툼한 베이스 그리고 다양한 음향 효과들이 어우러진다. 세기말적인 보컬의 감성이 처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이펙트를 잔뜩 건 기타는 종횡무진, 신비한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너무 자극적이거나 지저분한 느낌이 없다. 오히려 전체적인 밸런스가 빼어난 가운데, 듣기 편한 음향으로 승화되어 있다. 이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결론
오디오 강소국에서 만든 특별한 스피커. 단지 외관만 보면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계나 정밀 공학을 생각하고 좀 더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어떤 앰프던 가리지 않고 쉽게 제 성능을 발휘하는 부분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다. 귀족적이고, 럭셔리하면서, 소스에 담긴 정보량을 일체 가감 없이 쏟아내는 정말 기특한 친구. 이번 기회에 피에가의 진수를 직접 체험하기 바란다.
이 종학(Johnn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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