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추억의 판타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10여 년에 걸쳐 제작된 영화 8편을 꼬박 하루 동안 돌려보며 스파게티와 삼겹살, 찜닭, 컵라면, 와플을 만들어 먹다 보니 삼류 영화의 개연성 없는 스토리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해리포터처럼 필자가 동경하던 판타지 세계가 거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흉물스러운 비곗 덩어리가 고소한 향을 품은 삼겹살이 되고, 걸쭉한 밀가루 반죽이 노릇노릇 바삭한 와플이 되는 곳! 바로 주방이다.
열로써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기레인지는 마법사다. 공기 순환 작용을 통해 쓰레기 같은 음식도 금으로 만드는 에어프라이어는 연금술사, 작은 칼날로 어떤 식자재든 강력하게 분쇄하는 블렌더는 어쎄신, 그리고 맛없는 채소 따위를 건강 음료로 만들어주는 착즙기는 프리스트다. 그런데 요즘 들어 어쎄신 블렌더와 프리스트 착즙기 사이가 심상치 않다. 블렌더가 착즙기 고유 영역인 주스 메이킹까지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날 시원한 주스 한 잔! 착즙기? 블렌더? 누구한테 부탁하지?
날이 더워지자 집에서 과일, 채소를 갈아 주스를 만들어 마시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때 사용되는 가전은 대개 블렌더인 경우가 많다. 블렌더는 작은 칼날을 회전 시켜 재료를 잘게 분쇄하는 주방기기다. 강력한 회전력을 바탕으로 휘핑, 다지기, 믹스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해 주방의 대표 보조가전으로 자리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분당 15,000rpm 이상 회전하는 초고속 블렌더도 등장해 재료를 액체에 가까운 상태로 잘게 분쇄한다. 이로 인해 블렌더로 주스 만들기까지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엄격하게 따져보면 블렌더가 만드는 것은 알갱이가 무른 죽이다. 블렌더는 칼날이 닿는 모든 재료를 갈아내기 때문에 섬유질까지 모두 섞여 목 넘김이 텁텁한 걸쭉한 액체를 만든다. 또한 블렌더는 칼날 회전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비타민C처럼 열에 약한 영양소는 다량 파괴된다. 원액을 추출해 목 넘김이 부드럽고 영양소가 그대로 살아 있는 주스와는 거리가 멀다.
착즙기는 스크루를 저속 회전 시켜 재료를 으깨 즙을 낸다. 맷돌처럼 스크루를 아주 천천히 돌려 재료를 눌러 착즙하기 때문에 열이 발생하지 않고, 그로 인한 영양소 파괴도 없으며, 고농축 액이라 영양소를 빠르게 공급한다. 무엇보다 순수 액만 추출해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깔끔하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건강즙이나 과일 주스는 대개 착즙기로 만들었다 보면 된다. 단점은 블렌더만큼 활용도가 높지 않다는 것과 즙만 짜내기 때문에 섬유질 등 버려지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자, 정리해보자. 블렌더는 분쇄식이라 활용 범위가 넓지만 맑은 주스를 만들기에는 부적합하다. 착즙기는 압즙식이라 맑은 주스 만들기에 좋지만 활용 범위가 좁고 재료의 상당수가 버려진다. 이론만 봤을 때 주스 메이커로는 착즙기가 승이다.
기대하시라, 착즙기 vs 블렌더! 주스 만들기 대결
하지만 이론만으로 결론을 짓기에는 80% 부족하다. 그래서 비슷한 가격대 착즙기와 블렌더를 사용해 주스 만들기 대결을 펼쳐보려 한다.
오른쪽 익숙한 비주얼은 테팔 퍼펙트믹스 플러스 BL813DKR 블렌더다. 2018년 출시된 제품으로 현재 판매가는 91,530원이다. 분당 28,000rpm 회전하며 소비전력은 1200W, 스테인리스 일자날로 얼음분쇄, 다지기, 스무디 제조까지 알차게 가능해 지금도 잘 팔리는 인기 제품이다.
왼쪽 낯선 비주얼은 지난해 5월 출시된 라헨느 더 퀸 QMJM-2000B다. 용기 내부 스크루가 저속 회전해 투입구로 들어오는 재료들을 눌러 착즙하는 방식이다. 현재 판매가 99,000원으로 착즙기 시장에서는 중저가에 속하는 제품이라 볼 수 있다.
▶ 구성과 조립
구성을 보자. 블렌더는 모터가 탑재된 본체와 유리 용기가 전부다. 참고로 이 모델은 다짐기를 별도 제공하나 오늘 비교할 착즙 성능에선 불필요한 구성품이라 이 기사에서는 생략한다. 조립도 본체에 유리 용기를 돌려 체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꺼내고, 꽂고, 돌리고 3초면 끝이다.
반면 착즙기는 본체와 트라이탄 용기, 스크루, 용기 덮개와 착즙봉, 착즙통, 찌꺼기 배출통… 벌써 복잡하다. 조립은 본체 위에 용기 → 스크루 → 용기 덮개 → 누름봉 순으로 수직 장착하면 되는데 한 번만 해도 익숙해진다.
조작버튼의 경우 테팔 블렌더는 단계별 출력 설정이 가능한 다이얼과 스무디, 자동 청소, 얼음 파쇄 기능을 설정할 수 있는 버튼이 있다. 버튼은 여러 개지만 필자가 직접 써본 바로는 출력만 살짝 다를 뿐 거기서 거기다.
라헨느 착즙기는 조작 버튼이 더욱 심플하다. 저속 회전하는 착즙기 특성상 블렌더처럼 세밀한 단계 조절이 필요 없어 누르면 바로 작동하는 전원 버튼과 재료가 뭉쳤을 때 풀어주는 역회전 버튼이 전부다.
▶ 주스 만들기
이제 이 기사의 하이라이트인 주스 만들기를 시작해본다. 실험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과일과 채소를 블렌더와 착즙기를 사용해 주스로 만든 뒤 입자와 식감, 목 넘김, 맛을 중심으로 평가해보려 한다.
실험 재료
-즙이 많고 물렁물렁한 오렌지
-딱딱한 사과
-더 딱딱한 당근
-건강즙의 꽃 양배추
실험 방법
같은 양의 과일과 오렌지를 동일한 시간 동안
착즙기와 블렌더를 사용해 주스로 만들어 비교
>오렌지
먼저 오렌지를 1개씩 블렌더와 착즙기에 넣고 주스로 만들어보았다. 블렌더는 유리 용기에 오렌지를 한 번에 털어 넣으면 되지만, 착즙기는 재료를 투입구 크기에 맞춰 썬 뒤 하나씩 넣어줘야 한다. 참고로 착즙기는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즙을 낼 수 있다. 문제는 껍질째 넣으면 오렌지 껍질까지 착즙돼 주스에서 쓴맛이 난다.
▲ 블렌더 주스(위)와 착즙기 주스(아래)
제조 시간은 블렌더가 한 방에 갈아주기 때문에 착즙기보다 3배 이상 짧다. 그런데 블렌더로 제조된 주스는 섬유질이 섞여서 색이 탁하다. 주스를 따를 때도 철퍼덕 묵직한 소리가 난다. 반면 착즙기 주스는 색이 맑고, 컵에 따르는 소리도 졸졸 청명하다.
두 주스를 10분 정도 방치한 뒤 살펴봤다. 착즙기 주스는 과육과 물이 분리되지 않았는데 블렌더 주스는 10분도 되기 전에 층이 나뉘었다.
마셔봤다. 당연히 맛과 식감 차이도 컸다. 착즙기 주스는 목에 걸리는 게 없이 꿀떡꿀떡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순수 오렌지 과육만 착즙했기 때문에 오렌지 본연의 달콤한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한편 블렌더 주스는 건더기가 너무 많았다. 두 모금째부터 마시기 힘들고 섬유질이 너무 씹혀서 오렌지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실험 결론
맛: 착즙기 >>>>> 블렌더
목 넘김: 착즙기 >>>>> 블렌더
포만감: 착즙기 <<< 블렌더
>사과
이번에는 사과주스를 만들어보았다. 사과는 오렌지만큼 물렁물렁하지 않아서 블렌더로 갈기 힘들었다. 사과를 잘게 썰어도 칼날이 과육에 파고들지 못해 결국 물을 100mL 섞었다.
▲ 블렌더 주스(위)와 착즙기 주스(아래)
이번에도 결과는 오렌지 주스와 비슷했다. 착즙기 주스는 색도 투명하고, 주스를 따를 때 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듯 맑은 소리를 냈다. 시음에서도 건더기가 없었고,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맛 또한 시판 중인 주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당도가 높게 느껴졌다.
반면 블렌더 주스는… 물 100mL를 섞었을 때부터 게임 끝이었다. 사과 특유의 서걱서걱 기분 좋은 식감이 물과 섞여 기분 나쁜 물컹거림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착즙기 승이다.
실험 결론
맛: 착즙기 >>>>>> 블렌더
목 넘김: 착즙기 >>>>> 블렌더
포만감: 착즙기 <<< 블렌더
>당근
이번에는 당근을 사용해봤다. 블렌더로 당근 주스 만들기는 사과 주스보다 더 어려웠다. 난 다지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결국 이번에도 물 100mL를 섞었다.
▲ 블렌더 주스(위)와 착즙기 주스(아래)
뭔가 결과가 계속 똑같아서 독자들한테 Ctrl+c, Ctrl+v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런데 정말 ‘오렌지=사과=당근’ 결과가 똑같다.
당근 역시 착즙기를 사용한 쪽이 훨씬 마시기 수월하고, 맛도 좋았지만 블렌더로 만든 주스는 정말 맛없었다. 거품, 공기, 당근, 물이 섞여 환상의 X맛을 완성했다.
실험 결론
맛: 착즙기 >>>>>> 블렌더
목 넘김: 착즙기 >>>>> 블렌더
포만감: 착즙기 <<< 블렌더
>양배추
마지막으로 양배추와 브로콜리를 사용해 건강 주스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양배추는 잘못 조리하면 입에서 변 냄새가 나기로 유명한 재료다. 그런데 블렌더로 갈아보려니 양배추도 다른 재료들처럼 그냥은 분쇄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물 100mL를 섞었다.
▲ 블렌더 주스(좌)와 착즙기 주스(우)
벌써 컬러가 녹조라테를 연상케 한다. 컵에 옮겨 담을 때도 철퍼덕, 철퍼덕 무겁고 탁한 소리가 입맛을 더욱 떨어지게 한다. 반면 착즙기로 만든 건강 주스는 이번에도 필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에메랄드빛 맑고 푸른 주스 빛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시음 시간이다. 솔직히 양배추 주스는 착즙기라도 맛없었다. 원래 양배추즙 자체가 맛이 없다. 그런데 블렌더로 만든 양배추 주스에서 지옥을 맛봐서 그런지 착즙기 양배추즙에 감사함을 느끼게 됐다.
실험 결론
맛: 착즙기 >>>>>>>>>>> 블렌더
목 넘김: 착즙기 >>>>> 블렌더
포만감: 착즙기 <<< 블렌더
▶ 기타 (소음, 소비전력, 세척)
블렌더로 주스 만들어 먹으려다 소음 때문에 항의받았다는 사례를 종종 듣는다. 필자는 밤에 갈증을 많이 느껴서 자기 전 주스 1잔을 꼭 마시는데, 우리 집 블렌더는 작동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바위 깨는 소리가 나서 쓰기 조심스러워진다.
착즙기는 스크루가 느리게 회전하기 때문에 소음이 적고 소비전력도 적다고 알려졌다. 실제로 다나와에서 착즙기와 블렌더를 검색하면 소음과 소비전력에서 차이가 큰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착즙기라고 아예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음 측정 앱으로 재본 착즙기 소음은 69~73dB, 블렌더 소음은 73~79dB로 살짝 높은 편이었다. 실제로 들었을 때 착즙기는 블렌더처럼 분쇄식이 아니라 맷돌을 가는 것처럼 사각사각 부드러운 마찰음이 나고, 블렌더는 날카로운 파쇄음이 나서 소음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소비전력도 살펴봤다. 제품 정보상 표기된 테팔 블렌더 소비전력은 1200W, 라헨느 제품은 150W인데, 실제 측정 결과 테팔 제품은 최저 단계로 작동했을 때 99W, 최대 출력으로 작동했을 때 200W였다. 라헨느 제품은 90W 정도 측정됐다. 착즙기 소비전력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블렌더와 그리 큰 차이는 없다는 점에서 소비전력은 구매요인에 큰 기준이 되진 않을 것 같다.
실험 결론
소음: 착즙기 > 블렌더
소비전력: 착즙기 > 블렌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분쇄는 블렌더에게, 주스는 착즙기에~
네 번의 실험 결과, 주스 퀄리티는 착즙기 압승이다. 식감, 목 넘김, 맛 모두 시판 주스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물론 사용 편의성은 블렌더보다 좋지 않다. 부품도 많고, 흐르는 물로도 충분히 세척 가능한 블렌더와 달리 미세망이 있는 착즙기는 전용 세척 솔로 바늘귀에 실 꿰듯 섬세하게 세척 작업을 해도 찌꺼기가 쉬이 제거되지 않는다. 버려지는 찌꺼기도 많다. 부드러운 주스를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단점이다.
그래서 필자의 결론은 무엇일까? 애초에 장르가 다른 대결이었다. 서두에서 표현한 것처럼 블렌더는 어쎄신, 착즙기는 프리스트다. 어쎄신에게 치유 대결을 펼치자 한 격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처럼 주스는 착즙기에, 그 외 각종 분쇄 작업은 블렌더에게 맡기는 게 옳다.
한편 착즙기 주스를 마실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착즙기 주스는 재료의 핵심만 추출하기 때문에 영양소가 고농축돼 있다. 그래서 당뇨 환자처럼 혈당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당이 높은 착즙기 과일주스보다 섬유질까지 갈아진 블렌더 과일주스가 낫다.
기획, 편집 / 다나와 오미정 sagajimomo@danawa.com
글, 사진 / 강은미 news@danawa.com
(c)가격비교를 넘어 가치쇼핑으로, 다나와(www.dana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