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오디오의 별
한창 여러 파워앰프들이 들락거리던 시절이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하이엔드 오디오의 역사 속에서 잘 익은 과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한참이나 지난 이후에 이 맛을 보고 있었으니 어서 그 양분을 흡수하고 싶었다. 어쩌면 마치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하나의 스피커를 가지고 여러 레전드 파워들을 매칭해보는 게 일상의 낙이었던 적도 있었다. 크렐, 제프 롤랜드, 패스랩스, 스페트랄, 에어 어쿠스틱스 등등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마크 레빈슨 No.23
그중 마크 레빈슨도 빠질 수 없었다. 특히 마크 레빈슨은 그 디자인이나 사운드 모두에서 뭐랄까, ‘모범’ 혹은 ‘규범’ 같은 단어를 생각나게 할 만큼 스마트하면서도 충직한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처음 접한 것은 No.23 같은 모델이었고 나중에 No.20.5나 No.20.6 등을 귀동냥하면서 꿈을 키웠다. 그러는 사이 옆길로 새서 패스랩스나 그 방계 족속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테도 즐겼다. 스펙트랄오디오가 들려주는 사운드의 얼음 동굴에 들렀다 나와서 뜨거운 크렐의 A클래스 불구덩이로 들어가기도 했다.
왼쪽부터 마크 레빈슨 No.33, No.53
하이엔드 오디오의 별들은 그렇게 각각의 개성을 뽐내면서 군웅할거했다. 물론 전성기를 오롯이 함께 하지 못한 늦깎이 입문자로서 나는 틈만 나면 그 많은 소리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즐겼다. 하지만 마크 레빈슨의 그런 탐구열의 열기 속에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우아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유지했다. 이후 접했던 No.33은 당시 최고 수준의 만듦새와 설계를 보여주었고 No.53은 왜 마크 레빈슨인 1970년대부터 계속해서 하이엔드 앰프의 규범이 되어왔는지 나의 세대에서 증명했다. 남들이 한참 나중에 만들어낸 클래스 D 앰프의 거의 모든 이상을 가장 먼저 구현하고 있었다.
이 분야의 별, 스타들은 이합집산하면서 끊이지 않는 샘물 같은 재능을 여러 제품에 쏟아냈다. 마크 레빈슨이라는 브랜드의 장본인인 마크는 회사를 나가 첼로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스트라디바리 마스터 같은 명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만난 스피커 설계의 천재가 윌리엄 이글스턴이였고 그와 함께 WEGG3라는 브랜드로 발표한 것이 채널당 여덟 발의 에소타로 반짝이는 루나 원 같은 스피커였다. 그리고 이후 윌리엄 이글스턴 3세는 본격적으로 이클스턴 웍스라는 브랜드로 안드라 같은 명기를 만들었다.
현 시점의 마크 레빈슨
마크 레빈슨의 창립자 마크 레빈슨(Mark Levinson)
지금 와서 이들의 불꽃같은 한 시절을 살펴보면 마크 레빈슨은 인복이 가장 많았던 사람 같다. 그의 곁엔 최고의 엔지니어이자 설계자 탐 콜란젤로가 있었고 잠시지만 윌리엄 이클스턴이라는 천재와 함께 했다. 비올라를 만든 폴 제이슨조차도 알고 보면 마크 레빈슨과 함께 했던 인물이다. 중국에서 레드로즈 뮤직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는데 브랜드 이름보다 마크 레빈슨 이름이 더 눈에 띄었다. 한때는 LG 전자의 컨설턴트로 활약하기도 하면서 국내에서도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실 마크 레빈슨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는 인간 마크 레빈슨이라는 의미를 넘어 이젠 하이엔드 오디오의 상징과 같은 보통 명사가 되었다. 그만큼 초기 약 10여 년 밖에 몸 담지 않고 떠난 마크 레빈슨은 21세기까지 역사가 끊이지 않고 독야청청하고 있는 와중이다. 게다가 이후 마드리갈랩스를 지나 하만 인터내셔널로 둥지를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JBL, 레벨 등과 한 지붕 아래 식구가 되었다. 아메리칸 하이엔드 오디오의 거장들이 한 집에 모인 것도 어쩌면 마크 레빈슨이라는 브랜드의 행운 아닐까 한다.
No.5206 그리고 No.5302
그리고 이제 먼 길을 걸어온 마크 레빈슨이 새롭게 발표한 플래그십 프리앰프 그리고 모노블럭 파워앰프를 내놓았다. 우선 프리앰프인 No.5206을 보자. 마크 레빈슨은 1971년 설립된 이후 줄곧 넘버링을 통해 자사 라인업의 진화 및 상/하위 모델 격차를 두었다. LNP 시절은 물론 ML 시리즈를 거쳐 No.38 시리즈 등을 떠올려도 마찬가지다. 이후 레퍼런스라고 할 만한 모델은 No.32와 No.320 그리고 No.52 시리즈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번에 출시된 모델은 전작에 이어 No.5206이라는 네 자릿수 넘버를 붙이고 나섰다. 또한 과거 플래그십 프리앰프들이 그랬듯 분리형을 고집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월이 흐르고 소유주가 바뀌어도 여전히 그 전통을 잇는 모습이 정겨울 지경이다. 일단 이 프리앰프는 블랙과 실버 조합으로 한눈에 봐도 마크 레빈슨의 전통적인 흑백의 미를 살렸다. 직접 만져보면 역시 고급기의 아름다운 곡선과 촉감이 전해져 사용자를 기분 좋게 만든다.
내부는 풀 밸런스 설계로 좌/우 신호를 모두 개별적으로 증폭하는 듀얼 모노 타입이다. 볼륨 조정 및 각 입력단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증폭, 출력하는 프리앰프가 뭐 이리 크고 복잡하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그만큼 어떤 신호도 왜곡, 훼손되지 않도록 편집증적으로 매달린 마크 레빈슨의 전통과 마주하게 된다. 볼륨은 디지털로 제어되는 저항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고 입력단은 XLR 및 RCA 등 풍부하게 마련해놓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입력단을 설계해놓고 있다. 예를 들어 포노단을 기본 장착해놓아 MM, MC 카트리지들 장자제로 선택, 운용할 수 있다. 디지털 입력단도 빼놓지 않고 있다. ESS Sabre의 32비트 DAC 칩셋을 사용해 자체 설계한 프리시전 링크 II DAC를 탑재한 모습이다. 이를 통해 AES, USB, 동축, 광 입력 등을 통해 PCM은 물론 DSD 음원까지 재생 가능하다. MQA는 물론이며 aptX-HD 블루투스까지 대응하는 등 최신 트렌드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다음으로 No.5302 파워앰프로 눈을 돌리면 역시 검은 본체에 새하얀 손잡이 디자인이 눈에 들어온다. 증폭은 AB 클래스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소출력 구간에선 A클래스 증폭을 보인다고 한다. 전원부를 살펴보면 1,100VA 수준의 대용량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투입하고 있으면 출력은 8옴 기준 채널당 135와트, 4옴 기준 270와트 출력을 달성하고 있다. 더불어 두 대를 브리지 모드로 셋업하면 채널당 무려 550와트 대출력 앰프로 변신한다.
청음평
이번 시청에선 No.5302 파워앰프 두 대를 모노 브리지 세팅해서 테스트했다. 소스기기 및 프리앰프부터 파워앰프 모두 XLR 전송을 기본으로 세팅했고 소스기기의 경우 같은 마크 레빈슨의 No.5101 SACDP를 활용했음을 밝힌다. 더불어 스피커의 경우 B&W의 최신 다이아몬드 800 시리즈 D4 중 802D4를 사용했다. 최근 코드, 클라세, 매킨토시 등 여러 파워앰프를 매칭해본 경험이 있어 음질 파악은 쉬운 편이었고 앰프의 특성도 비교적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Jacintha - Boulevard Of Broken Dreams
Lush Life
이번 마크 레빈슨 분리형은 개인적으로도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마크 레빈슨 제품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봐도 마크 레빈슨이 추구하는 사운드의 결은 그대로다.
야신타의 ‘Boulevard Of Broken Dreams’(SACD)를 들어보면 802D4의 미드레인지 디테일이 매우 정직하게 표현된다. 특정 대역으로 치우치는 현상이 별로 없으며 정숙하고 모범적인 토널 밸런스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건조한 음색도 아니어서 예상보다 리퀴드 사운드가 리스닝 룸 안을 부드럽게 채웠다.
Arne Domnérus, Gustaf Sjökvist
Antiphone Blues
SN비 자체가 매우 뛰어나 소리의 여백이 충분히 느껴지고 그로 인해 소리와 소리들의 간격과 마이크로 다이내믹스 표현도 뛰어나게 펼쳐졌다. ‘소노리티’라고 해야 할까?
아르네 돔네러스의 [Antiphone Blues](CD)를 들어보면 트위터에 아주 가까이 귀를 대야 약간의 노이즈만 들렸을 정도로 조용한 편이다. 이런 조용한 배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악 세션은 매우 복잡한 배음 특성에도 불구하고 녹음 기저의 정보까지 살뜰히 건져 올려 섬세하게 표현해 준다. 대신 거친 잔향은 철저히 배제되어 곱고 단정한 사운드로 보답한다. 매우 고급스러운 사운드다.
Ray Brown, Monty Alexander, Russell Malone - Django
Ray Brown, Monty Alexander, Russell Malone
XLR 연결 시 볼륨은 하이파이클럽 제 1 시청실에서 청취 시 30레벨에서 충분한 음량을 즐길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시간축 특성에서 앞으로 돌진하는 공격적인 성격이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뒤로 물러나 너무 왜소하지도 않다.
레이 브라운과 몬티 알렉산더, 러셀 말론의 ‘Django’(SACD)를 들어보면 전체적으로 정돈된 무대를 깊게 조망하면서도 전/후 공간감을 우아하게 표현해 준다. 모든 소리를 곱씹어나가는 듯 명료하고 우아하게 표현해 준다.
Berlioz, Kojian, Utah Symphony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다이내믹스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낮은 게인으로 녹음한 바루잔 코지안과 유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HDCD)을 재생했다. 5206 프리앰프의 볼륨을 약 30에서 약 40까지 올려야 충분한 음량을 얻을 수 있었다.
볼륨은 단계별 음량 폭이 너무 세밀하지도 너무 넓지도 않아 조정 환경이 쾌적했다. 다소 얌전하면서 고운 소릿결에 세밀한 폭의 다이내믹스는 씹을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듯하다. 하지만 1:20 이후 천둥처럼 몰아치는 하이라이트 부근에선 놀라운 펀치력도 선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륨을 높이고 싶어지는 사운드다.
총평
마크 레빈슨의 필자가 과거에 구입해 사용했던 당시의 마크 레빈슨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마크 레빈슨을 만들었던 본인도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았던 마크 글레이저도 아닌 전혀 새로운 마크 레빈슨으로 리부트 되어 현실에 당도했다. 마치 영화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이 DC 코믹스의 빈 설리번의 의뢰로 밥 케인이 창조했던 배트맨이 더 이상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네 자릿수 모델명의 5206과 5302는 수차례의 인수, 합병 속에서도 전통을 이어받았고 맥락을 유지하는 한편 트렌드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드러난 현존 마크 레빈슨은 그 나름의 새로운 매력의 혈통으로 재창조된 모습이다. 마치 리부트 된 하이엔드 오디오의 신화를 보는 듯하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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