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스피커에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게 있다. 인클로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울리지 않아야 유닛이 낸 소리를 깨끗한 상태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윌슨오디오, 매지코, YG 어쿠스틱스, 윌슨베네시 등이 이런 류다. BBC 라이센스 LS3/5a 스피커 등은 ‘얇은 벽’ 이론을 고수하지만, 현대 스피커 문법은 아니다.
통념은 또 있다. 트위터에서 나온 후면파는 어떻게든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 후면파가 정면파를 교란시키는데다 인클로저를 울리기 때문이다. 스피커 안을 메운 솜이나 스펀지, 울, 폼 같은 흡음재가 다 이를 위한 용도다. KEF의 MAT, B&W의 테이퍼드 튜브, 핑크팀의 공명기도 이 역할을 한다. 따지고 보면 저음 확장을 위한 트랜스미션 라인에도 중고음 후면파 제거를 위한 흡음재가 들어가 있다.
낮고 깊게 내려가는 저음을 위해서는 스피커 내부 용적과 우퍼 직경이 커야 한다는 것도 상식적이다. 그래야 공진주파수가 내려가고, 더 많은 공기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인치 우퍼와 4인치 우퍼는 저음의 양감과 질감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보란 듯이 배반한 스피커가 있다. 일본 키소 어쿠스틱(Kiso Acoustic)의 소형 스탠드마운트 스피커 HB-X1이다. 인클로저를 두들겨 보면 통통 소리가 날 만큼 쉽게 울리고, 스피커 안에는 흡음재가 일절 없으며, 미드우퍼 직경은 4인치에 그친다. 무엇보다 덩치가 그냥 PC 스피커 정도로 작다. 사실 모델명의 ‘HB’도 일본어로 ‘울림’을 뜻하는 ‘히비키’(Hibiki)에서 따왔다.
하지만 이런 외모만 보고 HB-X1을 깔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스피커 사이를 충분히 띄워놓고 충분히 드라이빙을 해주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소리가 나온다. 저음은 사정없이 밑으로 내려가고, 오케스트라는 거의 풀 사이즈로 등장한다. 악기들의 이미지는 깨끗하고 무대 앞은 투명함 그 자체. 특히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 소리는 실물 연주를 듣는 것 같다. 오디오 애호가들일수록 HB-X1에 놀라는 이유다.
HB-X1 팩트 체크
키소 어쿠스틱은 2009년 일본 기후현 나카츠가와시에 설립됐고, HB-X1의 전신이라 할 HB-1은 2009년에 나왔다. 2013년에 나온 HB-X1은 이를 업그레이드한 모델. 진작부터 독일 문도르프 제품을 네트워크 회로에 썼지만, HB-X1이 되면서 부품 등급을 실버골드 포일 커패시터 같은 최상위 부품들로 끌어올렸다. 2018년에는 코스트 다운 모델 HB-N1이 나왔다. 설립자 및 CEO는 토루 하라(Toru Hara) 씨.

HB-X1은 2웨이, 2유닛, 베이스 리플렉스 타입의 스탠드마운트 스피커다. 첫인상은 ‘이 가격에 이렇게 작아도 되나?’라는 것. 폭이 148mm, 높이가 320mm, 안길이가 224mm에 불과하다. 무게는 5.2kg. 피어리스제 우퍼는 4인치(100mm) 짜리이고, 포스텍스제 트위터는 상대적으로 커 보이지만 그래도 0.66인치(17mm)에 그친다. 다만 흑단(에보니) 블록을 깎아 만든 두툼한 혼이 붙어 있어 약간의 시각적 포만감은 준다.
유닛을 좀 더 살펴보면, 우퍼는 피어리스(Peerless) HDS-P830870 유닛으로, 진동판 재질은 폴리프로필렌, 섀시 재질은 알루미늄이다. 서라운드(엣지)는 고무. 트위터는 포스텍스(Fostex) FT17H 혼 트위터이지만, 순정 혼은 버리고 키소어쿠스틱에서 새로 흑단 혼을 붙였다. 참고로 HB-N1에서는 피어리스 XT25SC9004 링 돔 트위터를 쓴다.

스피커는 유닛을 수납한 인클로저와 네트워크 회로를 담은 하단 박스, 2개로 구성됐다. HB-X1이 되면서 하단 네트워크 박스가 1cm 정도 키가 커졌다. 그 연결 부위 앞에는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가 슬롯 형태로 나있다. 스피커케이블 연결을 위한 싱글 와이어링 전용 로듐 도금 텔루륨 동 바인딩 포스트는 네트워크 박스 후면에 마련됐다. 더 이상 심플할 수 없는 디자인이다.
눈여겨볼 것은 인클로저. 마호가니 단판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인클로저 윗면과 뒷면을 이루는데, 그 두께가 2.5mm에 불과하다. ‘얇은 벽' 이론의 BBC 라이센스 스피커도 인클로저 두께가 1cm가 넘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박막 인클로저다. 마호가니 단판으로 이뤄진 측면 인클로저 역시 3.5mm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피아노 블랙 마감의 전면 배플과 네트워크 박스는 상대적으로 두툼한 단풍나무 집성재를 썼다.

인클로저 안에 흡음재가 일절 쓰이지 않은 점도 눈길을 끈다. 대신 양 측면 인클로저 안쪽에 보강재 역할을 하는 목재 리브(rib)가 몇 개 붙어있을 뿐이다. 흡음재는 네트워크 박스 안에만 들어가 있는데, 이는 후면파가 빠져나가는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 통로가 이 네트워크 박스 위를 지나가기 때문이다.
공칭 임피던스는 8옴, 감도는 85dB, 주파수응답특성은 몇 dB 감쇄인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40Hz~30kHz에 달한다. 우퍼 사이즈와 스피커 크기, 그리고 혼 트위터 설계를 감안하면 믿기지 않는 40Hz이고 30kHz다.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일반 2웨이 스피커보다 훨씬 높은 5kHz. 달리 생각하면 HB-X1의 유닛 구성은 풀레인지 유닛과 슈퍼 트위터 조합이다.
HB-X1와 다카미네 악기 제작소

보면 볼수록 HB-X1은 일본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예술품이자 스스로 소리를 내는 악기에 가깝다. 일단 구석구석 만듦새가 뛰어나다. 인클로저 형상이 어쿠스틱 기타의 볼록하고 잘록한 허리 선과 엉덩이 선을 닮은 것도 특징. 그도 그럴 것이 HB-X1이 일본 다카미네 악기 제작소(Takamine Gakki)의 그 유명한 기타 제작 라인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959년에 설립된 다카미네 악기 제작소는 올해로 64년 업력을 자랑하는데, 이들이 만든 어쿠스틱 기타는 존 본 조비, 블레이크 쉘톤, 브루스 스프링스틴, 닐스 로프그렌, 브루노 마스, 존 스코필드 등이 쓰고 있다. 1994년 이글스의 ‘Hell Freezes Over’ 앨범에 수록된 ‘Hotel California’ 인트로가 바로 글렌 프레이가 연주한 다카미네 12현 EF381SC 기타 소리다.
맞다. 이처럼 스피커 인클로저를 어쿠스틱 기타 제작소에서 만든다는 사실에 HB-X1의 모든 비밀이 숨어있다. 인클로저가 얇은 이유, 인클로저 재질이 마호가니인 이유, 인클로저 윗면과 후면이 곡선을 그리는 이유, 인클로저가 밀폐형이 아니라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형을 취한 이유, 측면 인클로저 안쪽에 리브를 덧댄 이유 등등. 인클로저가 철저히 어쿠스틱 기타를 닮은 것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어쿠스틱 기타는 잘 아시는 대로 기타 현의 진동을 최대한 증폭시켜 소리를 내는 악기다. 1) 현의 진동이 브릿지를 통해 기타 앞판(사운드보드)에 전달되면, 2) 이 진동이 기타 내부를 돌며 증폭된 후, 3) 기타 앞판에 뚫린 큰 구멍(사운드홀)을 통해 빠져나오는 원리다. 아래쪽 엉덩이 부분은 저음, 위쪽 몸통 부분은 중고음 증폭 담당. 앞판과 뒤판 안쪽에 서로 다른 디자인과 길이의 리브가 붙어있는 것은 공진 컨트롤을 위한 것이다.
HB-X1은 이 어쿠스틱 기타와 닮은 꼴이다. 1) 유닛이 낸 소리가 인클로저에 전달되고, 2) 이 진동이 인클로저 내부를 돌아 증폭된 후, 3) 앞쪽 포트를 통해 빠져나간다. 한마디로 인클로저를 기타의 공명 통으로 쓴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인클로저 자체를 단단하고 무겁게 만드는 일이나, 인클로저 안에 흡음재를 쓰는 일 따위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 밖에 공진 컨트롤을 위해 측면 인클로저 안쪽에 여러 개의 목재 리브가 붙은 것, 전면 배플을 제외한 인클로저 재질로 대표 음향목인 마호가니를 쓴 것, 인클로저 윗면과 뒷면을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만든 것, 네트워크 박스를 굳이 별도로 만들어 분리시킨 것도 스피커를 최대한 어쿠스틱 기타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한편 다카미네 악기 제작소에 따르면 대표 음향목 마호가니(Mahogany)는 1) 장미목이나 단풍나무에 비해 가볍고, 2) 빠른 응답특성을 가져 매우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며, 3) 무척 따뜻하고 중역대를 강조하는 소리를 낸다.
시청
일반적인 스피커 제작 통념에 반한 HB-X1은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 수입사인 탑오디오 시청실에서 이뤄진 HB-X1 시청에는 소울노트의 S-3 디스크플레이어, 몰라몰라의 Makua 프리앰프, Kaluga 모노블록 파워앰프를 동원했다. 스피커케이블은 아날리스 플러스 제품. 음원은 CD로 들었다.
아티스트 Kari Bremnes
곡 A Lover In Berlin
앨범 Master Female Audiophile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스피커가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서 음악이 나오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완벽히 사라진다. 이는 그만큼 음상이 3D로 단단히 맺힌다는 것, 노이즈가 없다는 것, 무대 앞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음이 풍성하고 저음이 스피커 크기에 비해 아주 잘 나온다는 사실. 40Hz~30kHz라는 수치가 괜한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대역에서 디테일이 상당한 점도 눈에 띈다. 한마디로 해상력의 끝판왕 수준. 음끝은 거칠거나 투박하지 않고, 보컬과 악기의 분리도나 앞뒤 레이어감도 장난이 아니다. 이 스피커는 2018년부터 수차례 들어왔지만 무대의 입체감과 악기의 홀로그래픽한 이미지에는 매번 감탄하게 된다.
아티스트 Diana Krall
곡 No Moon At All
앨범 Explorations In Sound Vol. 1 & 2
첼로의 음이 얇지가 않다. 스피커 덩치나 우퍼 사이즈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저음이 밑으로, 밑으로 계속 내려간다. 확실히 당당하고 넓으며 두터운 음을 낼 줄 아는 스피커다. 인클로저의 진동과 내부 공명을 최대한 이용한 스피커라면 음끝이 지저분하거나 촉감이 탁할 만도 한데 이 스피커는 그런 구석도 없다. 첼로 뒤편의 피아노 소리가 산뜻하게 들린 이유다.
피아노 오른손 건반이 내는 고음은 귀가 짜릿할 만큼 명징하다. HB-X1이 5kHz 이상을 담당하는 유닛으로 왜 컴프레션 혼 트위터를 썼는지, 그리고 순정 혼을 버리고 왜 굳이 다카미네산 에보니 혼을 붙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곡에서는 또한 다이애나 크롤의 치찰음 처리가 관건인데 이도 훌륭히 해냈다.
아티스트 Led Zeppelin
곡 Whole Lotta Love
앨범 Led Zeppelin II
일렉 기타가 무대 위에서 질주하고 시청실이 작은 콘서트장이 된다. 마치 증기기관차가 튀어나와 달리는 것 같다. 이 뜨거운 에너지가 진정 저 조그만 스피커가 만들어낸 것인가 싶다. 무대 스케일만 흉내를 낸 게 아니다. 음 하나하나의 질감이 마치 엠보싱 휴지처럼 오톨도톨 싱싱하게 살아있다.
더 놀란 것은 계속해서 위로 확장되는 무대의 스케일. 트위터 위치가 소파에 앉은 필자의 귀 높이인데 사운드스테이지가 갈수록 위로 늘어난다. 이는 멀티웨이 대형 스피커에서만 가능한 영역인데 이를 이 스피커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HB-X1은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들려준다. 록 음악도 자신 있게 볼륨업해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스피커다.
지휘 Manfred Honeck
오케스트라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곡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 IV. Finale: Presto - Allegro Assai
앨범 Beethoven Symphony No. 9
4악장을 들어보면, 자신에게 들어온 신호에 아주 기민하게 반응한다. 굼뜨거나 허둥대는 기색이 전혀 없다. 와중에 이 스피커가 들려주는 묵직한 저음은 ‘이거 레알?'인가 싶고, 음이 잠시 끊긴 순간에는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인클로저 진동을 최대한 활용한 스피커에서 맛보는 이 같은 놀라운 SN비는 상호 모순적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목관은 또 어떤가. 촉감은 부드럽고 음에서는 향긋한 봄 내음까지 나는 것 같다. 이게 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저음이 튼실하게 받쳐준 덕이다. 이러니 오케스트라 대편성과 합창곡도 믿고 맡길 수밖에. HB-X1처럼 여리고 작은 볼륨에서도 분별력 있는 소리를 내주는 스피커는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감탄하는 사이, 소프라노의 고음이 필자의 머리를 그냥 관통해버린다. 어이쿠!
아티스트 Maria Joao Pires, Augustin Dumay, Jian Wang
곡 Brahms Piano Trio No.1
앨범 Brahms Piano Trios Nos. 1 & 2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일타 강사가 필자를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이 있는 현장으로 데려간 것 같다. 스피커는 사인만 보낼 뿐 소리는 정작 허공에서 유령처럼 나타난다. 한마디로 녹음 현장으로 타임슬립해 들어간 느낌.
피아노 소리는 강단이 있고, 두 현악기의 윤곽선은 저마다 또렷하다. 첼로가 잠시 연주를 멈춘 순간에 찾아든 놀라운 적막감은 이제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오디오 기기 테스트용으로 100번은 넘게 들었을 이 곡이 이날처럼 표정 풍부하게 들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총평
지난 2018년 5월,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침 만프레드 호넥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들려준 날이다.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활을 움직였는데 그 소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필자의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바이올린이 아니라 무지크페라인이 내는 소리 같았다.

HB-X1이 그러했다. 뭐에 단단히 홀린 것처럼 다른 곳에서 음악이 들렸다. 작은 유닛과 왜소한 덩치에서 실물 첼로 소리가 들렸고 드럼은 더할 나위 없이 파워풀했다. 무엇보다 인클로저 진동을 적극 활용했는데도 SN비와 해상력이 극강 수준이었다. 사운드스테이지의 넢고 높은 스케일과 가을 하늘 같은 투명함은 차라리 비현실적.
물론 어쿠스틱 악기를 닮은 스피커의 위험성은 언제나 있다. 특히 스피커에게서 모니터 덕목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애호가들이라면 딱 질색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청감상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맞다. HB-X1은 통념에 반하고, 소리에 반하는 스피커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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