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디안과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
1977년에 설립된 영국 메리디안(Meridian)은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의 톱 티어 제작사다. 이미 1991년에 세계 최초로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 DSP6000을 선보였다. 채널당 DAC 3개, 75W 앰프 4개, 드라이버 6개를 갖춰 25Hz~20kHz 대역을 최대 114dB 음압으로 커버하는 완벽한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를 33년 전에 내놓은 것이다.
메리디안은 이후 2000년에 플래그십 DSP8000, 2004년에 엔트리 DSP5200, 2009년에 중견 DSP7200, 2011년에 북쉘프 DSP3200과 센터 DSP3300을 선보이며 라인업을 확장했다. 2013년에는 저역 확장 DSP인 EBA(Enhancement Bass Alignment)를 투입한 SE 시리즈를 선보였다(DSP8000SE, DSP7200SE, DSP5200SE).
2024년 9월 현재 메리디안의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 라인업은 플래그십과 레퍼런스, 퍼포먼스 시리즈로 나뉜다. 플래그십은 2021년에 출시된 DSP8000 XE(eXtreme Engineering), 레퍼런스 시리즈는 DSP7200SE와 DSP5200SE, 그리고 2023년에 출시된 최신작이자 이번 시청기인 DSP9, 퍼포먼스 시리즈는 DSP3300, DSP3200, 그리고 서브우퍼 DSW.2로 구성됐다.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 하나. 메리디안은 왜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를 고집할까. 메리디안의 주장은 이렇다. 우선 디지털 입력 신호는 아날로그 입력 신호에 비해 오염될 확률이 적고 변형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메리디안이 2009년에 개발한 디지털 신호 전송 인터페이스 스피커 링크(Speaker-Link), 2014년에 개발한 고해상도 디지털 음원 전송 기술 MQA 등은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또한 디지털 입력부터 스피커 출력까지 신호 경로를 아주 짧게 가져감으로써 에너지 손실과 노이즈 오염을 줄일 수 있다. 메리디안이 DAC을 앰프 바로 앞에 두는 것도 컨버팅한 아날로그 신호의 노이즈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이 밖에 DSP 작업을 통해서는 왜곡 저감, 대역폭 확장, 실내 음향 보정 등의 효과, 멀티 앰핑을 통해서는 역기전력 제거와 이로 인해 중고음이 선명하고 정확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DSP9 살펴보기
DSP9은 DSP와 DAC, 앰프, 스피커를 한 섀시에 담은 스테레오 액티브 스피커로, 메리디안 스피커 특유의 유려한 곡선 디자인이 돋보인다. 보는 눈맛도 좋지만 스피커 공학상 외부 회절과 내부 정재파를 동시에 줄이기 위한 의도도 담겼다. 인클로저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것도 트위터와 미드레인지의 음이 배플을 맞고 회절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유닛은 전면 배플 상단에 1인치(25mm) 베릴륨 돔 트위터, 그 밑에 6.5인치(160mm) 콘 타입 미드레인지가 장착됐다. 트위터는 보이스 코일로 은선을 사용한 점이, 미드레인지는 공진 방지용 클램프 링을 두른 점이 눈길을 끈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는 전용 밀폐형 인클로저에 수납돼 우퍼 후면파로 인한 피해를 막고 있다.
양 사이드에는 8인치(200mm) 폴리프로필렌 콘 우퍼가 2개씩 장착됐다. 최대 작동 폭이 24mm에 달하는 롱스로우 우퍼다. 또한 같은 높이에 있는 2개 우퍼는 서로 등을 대고 푸시-푸시로 움직여 우퍼 움직임으로 인한 인클로저 진동과 공진을 막는다. 이는 KEF 서브우퍼 등에도 채택된 것으로, 메리디안에서는 포스 밸런스 구성(Force Balanced Configura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DSP와 DAC, 앰프 보드는 후면 아래쪽 두툼하게 튀어나온 공간에 수납됐다. DSP에서는 메리디안의 대표 기술인 비스포크 시그널 매핑(Bespoke Signal Mapping)을 비롯한 여러 디지털 시그널 처리 작업이 이뤄지는데, 이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DAC은 2채널 DAC 보드가 한 스피커당 2개씩 투입돼(총 4채널), 하나는 트위터 앰프와 미드레인지 앰프에, 다른 하나는 우퍼 앰프 4개(저역 2개, 초저역 2개)에 아날로그 신호를 공급한다. USB-C 입력 시에는 최대 24비트/384kHz, 동축 입력 시에는 최대 24비트/192kHz, 광 입력 시에는 최대 24비트/96kHz까지 PCM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한다.
앰프는 채널당 2개 보드에 총 6개가 장착됐다. 한 보드에는 트위터 앰프와 미드레인지 앰프, 다른 보드에는 우퍼 앰프 4개(저역 2개, 초저역 2개)가 수납됐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앰프는 각각 클래스 AB 증폭으로 4옴에서 150W 출력을 낸다. 우퍼 앰프는 클래스 D 앰프 2개를 브릿지로 연결한 앰프가 4개 투입돼 각각 4옴에서 240W를 낸다. 따라서 앰프 총 출력은 1260W가 된다.
후면 밑면에는 메인 디지털 입력단자 보드, 바닥면에는 아날로그 입력단자 모듈이 마련됐다. 디지털 입력단자 보드에는 동축, 광, USB-C 단자와 스피커링크 케이블 연결용 RJ45 단자(입력용 1개, 출력용 1개), 좌/우/센터 채널 선택 스위치, 전원 인렛, 전원 스위치가 마련됐다. 스피커링크 케이블은 메리디안 기기와 연결할 때 사용하는 디지털 신호 전송 및 컨트롤 케이블이다.
아날로그 입력단자 모듈은 XLR 1개, RCA 1개, 그리고 스피커링크 케이블 연결용 RJ45 단자 1개가 마련됐다. 또한 입력 감도를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어서 소스기기나 프리앰프 출력 전압에 따라 0.5V, 1.5V, 2.5V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아날로그 입력단자 모듈을 사용할 경우 스피커링크 케이블로 디지털 입력단자 보드의 RJ45 단자와 연결하면 자동으로 인식된다. 이 밖에 기본 제공되는 메리디안 B-Link 모듈을 통해 블루투스 연결도 가능하다.
스펙을 보면 최대 음압은 119dB, 주파수 응답 특성은 3dB 기준 20Hz~40kHz를 보인다. 역시 베릴륨 트위터와 8인치 우퍼 4발, 포스 밸런스 우퍼 구성, 960W의 우퍼 전용 앰프, 넉넉한 인클로저 용적, E3(Expand, Extend, Enhance) BASS를 비롯한 여러 DSP의 힘이다.
플래그십 DSP8000 XE와 비교하면 DSP9이 확실히 컴팩트한 것을 알 수 있다. 원 섀시 구성의 DSP9은 최대 가로폭 392mm, 최대 안길이 511mm, 높이 1101mm, 무게 68kg이고, 투 섀시 구성의 DSP8000 XE는 최대 가로폭 400mm, 최대 안길이 528mm, 높이 1350mm, 무게 110.5kg을 보인다. 양 사이드 우퍼는 DSP9이 총 4개, DSP8000 XE가 총 6개다. 앰프 출력은 DSP9이 총 1260W, DSP8000 XE가 총 1750W다.
화려한 메리디안 DSP의 세계
DSP9에는 메리디안이 지금까지 30년 넘게 축적해온 다양한 DSP 기술이 총망라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래그십 DSP8000 XE를 탄생시킨 익스트림 엔지니어링 프로그램(Extreme Engineering Programme)이 두 번째로 이식된 스피커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DSP는 디지털 입력 오디오 신호를 4개 채널(고역, 중역, 저역, 초저역)로 분리한 후 채널별로 DA 컨버팅을 하게 하는 비스포크 시그널 매핑(Bespoke Signal Mapping).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디지털 도메인에서 이뤄지는 크로스오버 필터로, 각 스피커 유닛의 응답 특성을 미리 파악해 크로스오버 주파수를 산출한다.
메리디안은 이 비스포크 시그널 매핑에다 저역 확장을 위한 E3 Bass, 스피커 위치 보정을 위한 Free-Q 프로세싱을 추가해 FFA(Full Frequency Alignment) DSP를 완성했다. 말 그대로 스피커 유닛이 내는 모든 주파수 대역이 그룹 딜레이 없이 사람 귀에 동시에 도달하게 하는 DSP가 바로 FFA다.
이 밖에 지터를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선입선출 버퍼링 시스템인 Q-Sync, 우퍼의 과도한 움직임을 막는 Pro-Active Bass, 트위터와 미드레인지의 과도한 방열을 막는 Pro-Active Thermal, 프리 링잉을 없애기 위한 아포다이징(Apodizing) 로우 패스 필터 등도 메리디안이 자랑하는 DSP다. DSP는 아니지만 입력된 디지털 신호를 쉴딩 처리한 RJ45 케이블을 통해 2개 DAC 보드로 전송하는 Sync-Link 기술도 눈길을 끈다.
들어보기
메리디안 수입사인 케이원에이브이 시청실에서 진행한 DSP9 시청에는 소스기기로 메리디안의 818 V3을 동원했다. 818 V3는 룬 네트워크와 스피커링크 출력을 지원하는 오디오 코어로, DSP9과는 랜 케이블로 연결했다. 좌우 DSP9에 있는 스피커링크 연결용 RJ45 입력 단자에 연결한 것이다. 음원은 룬으로 타이달 코부즈 스트리밍 음원을 들었다.
아티스트 아이유(IU)
곡 아이야 나랑 걷자
앨범 Modern Times
요즘 오디오 기기 테스트용으로 자주 듣는 곡인데, 기기 레벨이 떨어지면 피처링한 최백호 목소리 톤이 젊게 들리고 아이유가 무척 성의 없게 노래하는 티가 역력히 난다. 초반 전주 파트에서 818 V3와 DSP9 조합의 첫인상은 음수가 많고 저역이 튼실하며 무대가 견고하다는 것. 기타와 퍼커션의 이미지가 무대 중앙에 아주 또렷하게 맺힌다.
이어 보컬 파트가 나오면, 기대했던 대로 최백호는 딱 그 나이에 맞는 톤으로 노래를 부르고 아이유는 정말 성심성의껏 한 소절 한 소절을 또박또박 들려준다. 두 사람 모두 목소리 톤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DSP9이 저역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고역을 확 열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DSP9의 시그널 매핑이라든가 FFA, E3 Bass 같은 DSP가 열 일을 했음은 물론이다.
아티스트 Sonny Rollins
곡 I’m An Old Cowhand
앨범 Way Out West
지난해 플래그십 DSP8000 XE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메리디안 DSP 디지털 액티브 스피커의 시그니처는 ‘편안함’이다. 쨍 소리가 날 정도로 고음역대를 까발리거나 바닥이 패일만큼 강력한 저음 펀치를 날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대신 오래 들어도 피곤하지 않을 그런 음색으로 청자를 대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라이프 스타일 스피커다.
이는 이번 DSP9도 마찬가지. 디테일을 드러내는 해상력을 밑에 깔았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고운 입자감과 저역이 과도하지 않은 대역 밸런스가 돋보인다. 색소폰 블로잉은 뜨거운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파워풀하지만 여전히 깨끗한 감촉이다. 드럼 솔로 대목에서는 드럼이 아예 오른쪽 무대에 뿌리를 내린 채 싱싱한 연주를 들려준다. 무대 앞이 무척 투명한 점도 눈에 띈다.
지휘 Thierry Fischer
오케스트라 Utah Symphony
곡 Symphony No.1 In D Major 'Titan'
앨범 Mahler: Symphony No. 1 In D Major "Titan" (Live)
4악장을 들었는데, 전체적으로 거칠거나 야생마처럼 날뛰는 스타일이 아니라 충분히 컨트롤된 상태에서 다소 크리미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작고 고운 입자들이 무대를 꽉 채웠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면 시청실 공기를 충분히 밀어낸다.
818 V3 볼륨을 65에서 70으로 더 올려 다시 들어보면 철근처럼 보다 강인한 음으로 바뀐다. 역시 말러 1번 4악장은 볼륨을 업시킬 필요가 있다. 불꽃놀이처럼 쾅쾅 터지는 곡의 기세와 광활한 무대 스케일이 잘 표현된다. 앰프가 최단 거리에서 스피커를 드라이빙해서 그런지 그립력이 상당하다. 그야말로 노면을 움켜잡고 간다.
지휘 André De Ridder
바이올린 Daniel Hope
오케스트라 Konzerthaus Kammerorchester Berlin
곡 Richter: Summer 3
앨범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 The Four Seasons
여름 3악장의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처음부터 잘 묘파한다.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 악기들 바로 앞에서 연주하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맺힌다. 혼자 혈혈단신으로 오케스트라와 대적하고 압도한다는 느낌. 그만큼 바이올린의 고음이 치밀하고 선연하며 섹시했다. 계속해서 음의 고운 입자감과 무대 가운데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밀도감, 그리고 극도로 투명한 무대 앞이 눈에 띈다.
어떻게 이런 음의 감촉과 무대 펼침이 가능했나 분석해 보면, 그 일등공신은 역시 액티브 스피커, 그것도 멀티 앰핑 스피커 설계다. 앰프가 스피커 각 유닛을 완전히 장악했다. 다음은 디지털 크로스오버(시그널 매핑)를 통해 디지털 단계에서부터 대역을 나눠 컨버팅하고 증폭한 결과다. 메리디안이 힘줘 강조한 대로 전 대역이 어디 치우치거나 딜레이되는 느낌 없이 정확하게 필자의 귀와 가슴에 와닿은 배경이다.
아티스트 Dream Theater
곡 Pull Me Under
앨범 Images And Words
멀티 앰핑 액티브 스피커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음 하나하나가 정확하다. 확실히 멀티 앰핑이 이뤄지니 우퍼 움직임에 의한 역기전력이 다른 유닛들을 괴롭히지 않는 티가 난다. 그렇지 않고는 일렉 기타가 이처럼 생생하게 울부짖을 수가 없다.
그러는 와중에 락 보컬은 이 모든 것을 뚫고 나와 그 가사가 귀에 쏙쏙 박힌다. 타이밍이라든 리듬앤페이스, 이런 것도 좋아서 그동안 막혔던 속이 뻥 뚫리고 말았다. 헤비메탈과도 잘 어울리는 DSP9이 아닐 수 없다.
총평
현재 필자가 개인 시청실에서 쓰고 있는 스테레오 파워앰프는 한 채널 출력이 4옴에서 380W를 낸다. 어떻게 보면 그리 많지 않은 출력이지만 B&W 801 D4를 울리는 데 큰 아쉬움은 없다. 다만 비슷한 출력의 앰프를 2대 동원해 바이앰핑을 하면 더 나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고, 그 확실한 증거가 이번 DSP9이다. 채널당 1260W 앰프가, 그것도 4개 멀티 앰핑으로 8인치 우퍼 4개를 포함한 총 6개 유닛을 울린다.
DSP9은 또한 철저한 디지털 오디오 머신이다. 이번 시청의 경우 디지털 신호를 받아들여, 디지털 도메인에서 4웨이 크로스오버를 한 뒤, E3 Bass, Free-Q, Q-Sync, Pro-Active Bass 같은 각종 DSP 프로그램을 거쳐, 최적의 상태로 튜닝된 디지털 신호를 멀티 DAC에 넘겨준다. 이 정도면 음악 신호가 거의 재탄생한다는 느낌. 음악을 디지털로 처리할 때 어떤 이득이 있는지 꿰뚫은 메리디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맞다. 메리디안의 DSP9은 생긴 것은 순하고 얌전하지만 안에는 드라마 ‘무빙’에서 나온 표현 그대로 ‘기력자들’이 숨어있는 스피커다.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 스피커란 바로 이런 것이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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