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맛이 무섭다’라는 말이 있다. 이미 경험해 본 즐거움인데도 얼마나 중독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익숙함의 치명적인 매력 말이다. 그리고 필자가 경험한 게임 ‘세피리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느껴보는 획기적인 시스템이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검증된 ‘아는 맛’들을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세피리아’는 던그리드를 개발한 ‘팀 호레이’에서 새롭게 선보인 로그라이크 액션 RPG다. 이용자는 탑 꼭대기 마을의 ‘토끼’가 되어 멸망이 예견된 세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며 싸워야 한다.

게임의 구조 자체는 평범하다. 적을 잡고 레벨업을 하면 원하는 아티팩트를 하나 고른다. 이 아티팩트에는 각자의 능력이 있는데, 단순하게 최대 체력을 늘려주는 게 있는가 하면, 동종 효과가 강화됐을 때 큰 효과를 내는 시너지 아이템도 있다. 특히, ‘세피리아’는 ‘백팩 히어로’처럼 인벤토리 정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가방 정리를 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티팩트는 가방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만 효과를 내고, 특정 아티팩트는 최상단에 있어야만 가진 효과를 드러낸다. 여기에 세피리아는 ‘석판’ 시스템이 있어서 좀 더 전략적인 정리를 요구한다. ‘석판’은 아티팩트의 레벨을 올려주는 신비한 물질인데 석판의 종류에 따라서 효과를 올려주는 ‘위치’가 달라진다. 예컨대 ‘양육’ 석판은 전방 세로 3칸에 있는 아티팩트의 레벨을 1 올려주는 반면, 후방 2칸의 아티팩트 레벨은 모두 1 낮춘다. 석판으로 올라가는 레벨은 중첩이 가능해서 잘 끼워 맞추기만 해도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어서 게임은 한 층을 클리어하고 내려갈 때마다 2~3개의 선택지 중 원하는 구성이 있는 방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각종 골드를 획득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을 만날 수 있는 방을 찾을 수도 있고, 무기를 강화해 무기에 ‘특성’을 부여해 주는 모루 방으로 갈 수도 있다. ‘나무뿌리’라는 특수한 방에 들어가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영구적인 버프 및 디버프와 버프와 어울리는 아티팩트 하나를 받아갈 수 있다. 이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져 강해지는 맛이 쏠쏠하다.

여기서 플레이가 고착화될 즈음 ‘코스튬’을 통해 새로운 시너지 방향성을 구축해도 좋다. ‘코스튬’은 사실상 ‘캐릭터 선택’이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각 코스튬마다 이로운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가 있고, 몇몇 코스튬은 초반부터 몇 개의 아티팩트나 석판을 제공받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두더지 코스튬은 일꾼 아티팩트 2개가 처음부터 제공되고, 스켈레톤은 체력 최대치가 50으로 고정되는 대신에 두 번 부활할 수 있다. 이 특성을 잘 활용하고 싶으면 전자는 일꾼 전투력 +35%가 되는 ‘장군’ 기적을 선택하면 되고, 후자는 체력 최대치가 50으로 ‘고정’되는 것이니 최대 체력 하락 페널티가 있는 아티팩트나 기적을 집어 페널티를 무효화시켜도 된다. 코스튬은 기본 제공되는 것도 있고,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자연스럽게 해금되는 것도 있다.


시너지만 잘 맞아도 스테이지가 빠르게 밀리긴 하지만, 필자처럼 컨트롤이 좋지 않거나 게임에 미숙한 이용자들은 초반 보스전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게임은 장기적인 성장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서 미숙한 이용자도 찬찬히 성장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세피리아’는 사망할 때마다 사망 시점까지 오른 레벨을 ‘사파이어’로 치환해 준다. 이 사파이어는 ‘운명 각인’을 통해 영구 성장 시스템을 해금하거나 레벨을 올리는 재화로 사용된다.


‘사파이어’로 ‘운명 각인’의 능력들을 하나씩 해금하면 영구적인 능력치 상승인 ‘재능’에 투자할 수 있는 포인트가 제공되기도 하고, MP 회복 속도가 올라가거나 레벨업 시 일정량의 체력이 회복되는 패시브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물론 후반에 좋은 능력들을 해금하기 위해선 필요 ‘사파이어’가 점점 늘어나기는 하지만, 올렸을 때 체감이 확실히 되는 편이라 강한 성장 동력이 되어주는 편이다.
물론 아직 아쉬운 점도 있다. 아직 아티팩트의 수가 아주 다양하지는 않고, 성능이 애매해 등한시되는 아티팩트도 종종 눈에 띄는 편이다. 또한 방 선택 중에서 ‘아티팩트 레벨’을 올려주는 방이 있는데, ‘석판’ 시스템이 있는 만큼 해당 방은 잘 이용하게 되지 않아서 좀 더 확실한 보상을 제시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이외에도 가시성에 대한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세피리아’의 도트 그래픽은 상당히 수려한 편이지만, 정작 ‘내 캐릭터가 어디에 있는지’, ‘뭐가 적 투사체고 내 투사체인지’ 알아차리기 위한 가시성이 아쉬운 편이다. 심지어 일꾼 같은 별도의 아군이 더 있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특히, 첫 번째 구역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편이라 밝은 캐릭터는 잘 보였는데, 두 번째 구역부터는 색감이 밝고 화사한 배경이라서 어디가 캐릭터고 배경이고 적인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세피리아’는 멀티플레이를 지원하는 만큼 가시성을 강화했을 때 체감되는 게임 완성도가 크게 달라지리라 본다.
다만 아직 ‘세피리아’가 ‘얼리액세스’ 단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부분들은 차차 개선되고 완성도 높은 게임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이다. 로그라이크에서 기대하는 성장의 재미, 시너지 구축의 쾌감, 다양한 전략의 재미를 알차게 느끼고 싶은 이용자라면 ‘세피리아’가 새로운 만족감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세피리아’가 얼리액세스 단계를 넘어 정식 출시됐을 때 새로운 인디게임의 성공 신화로 기록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