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드 디옹-부통이라는 자동차 회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클래식카 매니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가 처음 들은 브랜드일 것이다. 그만큼 생소한 메이커지만 자동차의 역사에서 드 디옹-부통은 빼놓을 수 없는 회사다.
1900년에서 190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만들어낸 최대 규모의 자동차 메이커가 바로 프랑스의 드 디옹-부통이다. 1900년 드 디옹-부통은 950여 명의 종업원이 400여 대의 자동차와 3천200대의 엔진을 생산했고 대서양 건너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도 조립 공장을 운영했다. 불과 1년 전까지 가장 큰 자동차 메이커였던 벤츠가 드 디옹-부통의 절
반 규모였었다. 아무튼 당시 세계 150여 개의 자동차 회사들이 드 디옹-부통의 엔진을 구입, 자동차를 만들거나 아예 드 디옹-부통의 모델을 라이선스 생산했다.
실제로 르노(Renault)가 1898년 발표한 첫 차는 드 디옹-부통의 엔진을 얹고 탄생했다. 또 미국의 피어스-애로우(Pierce-Arrow), 피어리스(Peerless) 등도 드 디옹-부통의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한 모터레트(Motorette)가 기원이었다. 한편 이태리의 이소타 프라스키니(Isotta Fraschini)는 드 디옹-부통의 수입상으로 출발했다.
역사가들은 자동차가 전 세계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일등공신으로 싸고 간단한 구조의 드 디옹-부통을 꼽는다. 또 드 디옹-부통은 그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알베르트 드 디온 백작 때문이라도 자동차 역사에서 기억될 만하다. 풍요로운 귀족계급 출신인 드 디온백작은 19세기말의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1895년 세계 최초로 파리에서 자동차 동호회(Club)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의 모터쇼가 1898년 파리에서 열리도록 앞장선 사람이다. 또한 머지않아 자동차의 용도가 개인 사치품에서 대중교통과 상용차 중심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도 했다.
증기 기관 자동차로 출발
조르주 부통(Georges Bouton, 1847~1938)과 그의 매제 샤를르 트레파르도(Charles Trépardoux)는 1880년부터 파리에 트레파르도 엔지니어링 제작소Trépardoux et Cie., ingénieurs-constructeurs)를 열고 소형 증기 기관을 이용한 모델 및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다. 1882년 알베르트 드 디온(Albert De Dion, 1856~1946) 백작이 파리의 상점에서 이들이 소형 증기 기관을 이용해 만든 모델을 보고 그 마무리에 감탄한 나머지 바로 투자하겠다고 나서 1883년 드 디옹-부통 & 트레파르도(De Dion-Bouton et Trépardoux et Cie.)가 설립되었다.
드 디옹-부통 & 트레파르도는 보트나 자동차용 소형 증기 기관의 개발에 몰두했다. 1883년 말에 제작한 증기 기관 자동차는 앞쪽에 설치한 증기 기관에서 구동력을 뽑아 벨트로 앞바퀴를 굴리고 조향은 뒷바퀴로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단점이 많아 이듬해 조향은 앞바퀴가 맡고 구동력을 뒷바퀴로 보내는 방식으로 개선, ‘라 마르키스’(La Marquise)라는 별칭으로 내놓았다. 영국의 한 개인 수집가는 현재도 운행이 가능한 ‘라 마르키스’를 소유하고 있다.
드 디옹-부통 & 트레파르도는 1887년부터 경량 증기 기관을 얹은 3륜 자동차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892년부터는 미쉐린에서 제작한 튜브 타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893년에는 승차감과 핸들링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뒤쪽 서스펜션을 개발했다. 이른바 드 디옹 튜브(de Dion tube)다. 드디옹 튜브는 1개의 차축(드 디옹 튜브)에 양쪽 바퀴를 붙이고 디퍼렌셜 기어박스는 따로 차체에 붙이는 방식인데, 차체 바닥을 낮게 할 수 있고, 스프링 아래 무게가 가벼워 승차감과 접지력이 뛰어나고 커브를 돌 때 타이어의 캠버 변화가 없는 등의 장점이 있었다. 다만, 구조가 복잡하고 값이 비싼 단점이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낮은 차체로 유명한 로터스(케이터햄) 세븐은 드 디옹 튜브식 서스펜션을 뒤쪽에 쓰고 있다. 1886년 독일의 다임러와 벤츠가 휘발유 엔진을 쓴 자동차를 내놓자 유럽에서는 기존 증기 자동차가 좋은가 아니면 새로 나온 휘발유 엔진 자동차가 더 좋은가 하는 논쟁이 시끄러웠다. 이에 따라 1894년 7월 파리―루앙 간 126km를 달리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프랑스의 ‘프티 주르날’ 신문사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모두 102대 신청자중 두 번의 예선을 통해 81대가 탈락하고 21대가 본선에 진출했는데, 이중 드 디옹 백작이 운전한 드 디옹-부통 증기 자동차가 평균 시속 21km로 달려 출발한지 6시간 만에 골인 지점에 1등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자동차 뒤에 증기 기관용 석탄을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달렸다는 이유로 실격되고 말았다. 결국 2등으로 골인한 푸조와 파나르-르바소 자동차가 공동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 5천 프랑을 나눠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두 대의 우승차는 모두 다임러의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드 디옹 백작은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증기 기관에 미련이 남은 샤를르 트레파르도가 회사를 나가게 되었고, 회사 이름은 드 디옹-부통(De Dion-Bouton et Cie.)으로 변경되었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
일 년 뒤 드 디옹-부통은 단기통 137cc 휘발유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1896년에는 성능을 개선한 단기통 185cc 가솔린 엔진을 드꼬비예(Decauville)에서 제작한 3륜 차 섀시에 얹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쁘티 보아츄르(petite voiture, 작은 차)라는 이름의 이 3륜 차는 1902년까지 생산되며 오늘날 세계 최초의 대량 생산 소형차로 평가받는다.
1898년에 드 디옹-부통은 드디어 4륜 차(타입 D)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드 디옹-부통은 프랑스의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공동으로 1898년에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람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파리 오토쇼의 기원이다.
1900년에는 단기통 402cc 3.5마력 엔진을 장착한 타입 E를 발표하였다. 타입 E와 개량형인 타입 G, 타입 L은 ‘비자비’(vis-a-vis)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두 명씩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좌석 뒤쪽 하단에 엔진을 배치한 형태로 말없는 마차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최고속도 시속 35km로 달릴 수 있는 비자비 모델은 당시로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00년 드 디옹-부통은 마침내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1903년에는 배기량을 700cc와 942cc로 대형화한 뽀뿔레르(Populaire) 모델(정식 명칭은 타입 N, Q, R, S)를 발표한다. 뽀뿔레르 모델은 엔진을 차체 앞쪽에 배치했다. 오늘날의 FR 구동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이라는 뜻이 담긴 뽀뿔레르는 이름에 걸맞게 큰 인기를 모은다.
1904년에는 4기통 2천545cc 엔진을 얹은 타입 AD를 선보였다. 이 차는 라디에이터를 엔진의 앞쪽으로 옮겨 냉각 성능을 개선했고 기존에 핸드 레버로 작동하던 클러치를 발로 밟는 페달로 전환시켜 운전 편의성을 높였다.
드 디옹-부통은 1910년 V8 6천107cc 35마력 엔진을 얹은 타입 CJ를 대량 생산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승승장구하던 드 디옹-부통에게 큰 상처를 준다. 전쟁 중 군용 자동차와 총기류를 생산하며 경영을 이어왔지만 종전 뒤 회사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자금난으로 기존 모델 생산은 물론 새로운 모델 개발에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드 디옹-부통은 1927년 공장 문을 닫는다.
이후 다시 공장을 열고 직렬 4기통 1천982cc 엔진을 얹은 타입 LA와 직렬 8기통 2천496cc 엔진을 얹은 타입 LB를 주문 생산했지만 값이 너무 비싼 초고급차인 관계로 판매가 미미했다. 결국 1932년 드 디옹-부통은 자금난으로 폐업하고 만다. 드 디옹-부통은 자동차 역사의 여명기에 단순히 ‘신기한 발명품’이던 자동차를 오늘날처럼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게 한 선구적인 회사였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