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 소개할 클래식브랜드는 파나드-르바소(Panhard et Levassor)다. 생소한 독자들도 있겠지만 실상은 ‘세계 최초의 자동차 메이커’로써 클래식카 매니아들에게는 꽤 유명한 회사이다.
물론 칼 벤츠(Karl Benz)가 휘발유 엔진을 1885년 발명해 벤츠 페던트 모터왜건에 장착했다. 이듬해 내연기관 엔진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 역시 휘발유 엔진을 1885년 발명해 이를 자전거에 달았다. 1885년 11월에는 자전거에 이듬해인 1886년 3월에는 네바퀴 자동차에 엔진을 얹었다. 자동차를 발명한 사람은 독일의 벤츠와 다임러가 맞다.
그러나 칼 벤츠는 1888년에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팔았고 19
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자신의 자동차를 전시한 후 1890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임러 역시 마찬가지다. 1886년 이후 자신의 엔진 개량에만 주력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강철 바퀴(Steel Wheel)’라는 별명의 2번째 자동차를 전시하기까지는 자동차를 생산•판매하지 않았었다. 1892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1889년 다임러에게서 가솔린 엔진의 특허사용권을 취득하고 1890년에 회사를 설립해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파나드-르바소가 ‘세계 최초의 자동차 회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 세운 세계 최초의 자동차 회사
세계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파나드-르바소는 벨기에 사람인 루이스 사라쟁(Louise Sarazin)이라는 여성 때문에 설립될 수 있었다. 루이스 사라쟁의 남편인 에두아드 사라쟁(Edouard Sarazin)은 변호사 출신의 사업가로 파리에서 당시 세계최대의 엔진회사인 독일의 도이츠 엔진 회사(Deutz-AG-Gasmotorenfabrik)가 생산한 공장 동력용 가스엔진 판매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에두아드는 당시 도이츠의 기술이사였던 다임러와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형성했고, 이후 다임러가 도이츠를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리자 종종 그를 찾아가 프랑스 내에서 다임러의 엔진과 자동차를 라이선스 생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다임러는 아직 완성단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번 거절했었다. 1887년 에두아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다임러가 전시한 자동차 ‘강철 바퀴’를 본 미망인 루이스는 다임러를 만나 남편의 유언에 따라 다임러의 자동차를 라이선스 생산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이에 감동한 다임러는 그녀에게 자신의 엔진과 자동차에 대한 라이선스 생산을 허락해 주었다.
루이스 사라쟁은 다임러에게서 자동차의 생산•판매권을 얻기는 했지만 19세기 사회에서 여성이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남편의 사망 후 자신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던 남편 친구인 에밀 르바소(Emile Levassor)와 함께 자동차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에밀 르바소는 당시 목공구 제조업자였던 르네 파나드(Rene Panhard)와 합작으로 르네 파나드의 목공구 공장을 자동차 공장으로 바꾸기로 하고 이를 운영할 세계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파나드-르바소 자동차회사’를 1890년 파리에 설립했다.
요즘 기준으로 표현하면 파나드는 공장과 돈을 제공하고, 르바소는 사라쟁이 가진 기술특허를 제공하는 합작기업의 설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회사의 설립은 성공적이었고, 그해 5월 루이스 사라쟁은 에밀 르바소와 재혼해 루이스 르바소가 되었다.
파나드-르바소는 1890년에 다임러의 V형 2기통 휘발유 엔진을 이용해 첫 자동차를 생산했다. 초기 모델은 다임러의 엔진을 가운데 배치한 말없는 마차형태로 매번 모습이 달랐다. 그러나 차 앞쪽에 라디에이터를 장착하고 체인구동방식의 기어박스를 클러치 페달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오늘날과 유사한 기술을 새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1892년에는 세계 최초로 컬러 브로셔를 제작해 선전에 사용하는 등 자동차의 판매에도 앞선 방법을 사용했다.
파나드-르바소의 초기 고객이던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는 자신에게도 다임러의 자동차를 제조•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1891년에 파나드-르바소는 푸조에게 다임러 자동차의 라이선스 생산을 허락해 주었다. 파나드-르바소가 생산한 다임러 엔진을 얹은 푸조의 자동차는 주로 독일 시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증기기관 자동차와 휘발유 엔진 자동차 중 누가 더 우수하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1894년 7월 파리-루앙간 126km를 달리는 세계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개최되었는데 증기기관을 얹은 드 디옹-부통이 먼저 결승점을 도착했지만 이후 증기기관용 석탄을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달렸다는 이유로 실격되어 2등으로 골인한 파나드-르바소와 푸조의 자동차가 공동 우승한 것으로 결정되기도 했다. 이 경주결과 때문에 드 디옹-부통도 휘발유 엔진 자동차 제작에 뛰어들어 결국 증기기관 자동차가 시장에서 퇴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FR구조의 선구자
조금씩 발전된 기술을 선보이던 파나드-르바소는 마침내 1895년 파나드 시스템(Systeme Panhard, Panhard System)이라는 혁신적인 차체 구조를 선보인다. 파나드 시스템이란 엔진이 차체의 앞에 달려 박스 안에 감추어져 있고 엔진 뒤에는 4단 변속기가 장착되며 이를 통해 체인으로 뒷바퀴를 돌리는 동력전달 시스템이다. 즉, 오늘날의 FR(Front engine, Rear wheel drive)구조를 뜻한다. 파나드-르바소의 1895년 모델이 바로 오늘날 자동차의 기본 디자인이 된 것이다.
말없는 마차형태의 다른 자동차들과는 달리 파나드 시스템을 장착한 파나드-르바소의 차는 차체가 낮아서 차체 균형이 뛰어났고 이에 따라 운전이 쉽고 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파나드-르바소의 자동차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안타깝게도 1897년 개최된 파리-마르세이유 간의 장거리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에밀 르바소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1884년 프랑스 최초로 전자 모터로 움직이는 비행선 ‘프랑스(La France)’호를 조종했고, 1886년 자동차의 바퀴를 항상 진행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캐스터 각(Caster angle)을 발명한 관료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아르튀르 크레브스(Arthur Constantin Krebs, 1850~1935)가 르바소를 대신해 파나드-르바소의 사장(General Manager)이 되었다.
선진적인 파나드 시스템을 장착하고, 뛰어난 크레브스 사장의 경영아래 파나드-르바소는 마침내 1903년에 1,500명의 종업원으로 1,129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이익을 많이 내는 자동차회사 중 하나로서 성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 자동차가 소개된 것은 1898년이라고 하는데 이때 들여온 자동차가 바로 파나드-르바소였을 정도로 그들의 차는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재앙이었다. 전쟁 후 공장 설비를 잃고 자금난에 빠진 파나드-르바소는 과거의 활력을 잃었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는 빠른 복구를 위해 고급차 생산을 억제하고 소형차의 생산을 독려했으나 결국 1965년 시트로엥에 흡수되었고 1967년을 끝으로 오랜 역사의 승용차 생산을 멈추었다.
참고로 시트로엥에 흡수된 이후에도 프랑스 군대를 위한 장갑차 생산은 계속해서 파나드(Panhard)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즉, 1968년부터 파나드는 군용차량 전문 브랜드로 존재한 것이다.
한편 2004년부터는 차세대 장갑차를 오벌랜드(Auverland)에서만 독점적으로 만들기로 결정되어 파나드 브랜드는 군용차량에서도 영원히 사라질 뻔 했으나, "파나드"라는 브랜드의 유명세 때문에 오벌랜드가 PSA 푸조-시트로앵 그룹으로부터 상표권을 2005년 구입하여 차세대 장갑차를 파나드 브랜드로 군에 납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