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눈길을 사로잡고, 어딜 가나 향긋하다. 예술과 카페로 기억하는 LA.

●예술은 우리 가까이에
고전주의도, 현대미술도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니 머리가 아프다. 또 유명 작가 위주로만 보면 평단과 이름값에 휘둘리는 기분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내 감성에 집중하고 나서야 미술관이 편해졌고, 자꾸 가게 된다. 조금씩 취향과 관점도 생겼다. 작가가 작품을 기획하고, 실현해 가는 과정을 상상하고, 그들의 삶을 쫓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또 제목과 형상, 색감, 질감 등 모든 부분에서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반추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예술에 골몰하고 싶은 이들에게 최선의 여행지 중 하나가 로스앤젤레스(LA)다. 여행자를 기다리는 10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심지어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수십 곳의 공간을 탐닉할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약 13만 점의 작품을 보유한 LA 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 매월 둘째 주 화요일 무료), LA 현대 미술관(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게티 센터(Getty Center)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엔 게티 센터. 게티 오일 컴퍼니(Getty Oil Company)로 부를 축적한 장 폴 게티(J. P. Getty, 1892~1976)의 헌신이 담긴 곳이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들을 기반으로 12년의 세월과 1조3,000억원에 달하는 비용이 투입됐다. 17~18세기 유럽부터 근대 작품(그림·조각 등)까지 두루 만날 수 있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Irises)’, 모네의 ‘해돋이’, 마네의 ‘봄’ 같은 유명한 작품도 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이 떠오르는 공간과 근사한 생활용품 등도 있다. 게다가 1997년 문을 연 이후 계속해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게티 센터의 예술 세계가 두터워지는 배경이다.
여기서 그치면 절반만 본 것이다. 도심 곳곳에 공공미술도 있다. 취지는 좋은데, 참 어려운 게 공공미술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작품만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니라 온갖 요소들이 섞여 있는 도심 한복판에 설치돼야 해서 그렇다. 까딱하면 없느니만 못하고, 도시 자체가 우스워진다.

LA는 확실히 달랐다. 베네시안 쿼드런트(Venetian Quadrant), 레비테이티드 매스(Levitated Mass), 포 아치스(Four Arches) 등 근사한 작품들이 도시에 녹아들었다. 그중에서 ‘더블 어센션(Double Ascension)’에 마음을 뺏겼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조각가, 건축가인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 1900~1985)의 작품이다. 새빨간, 빛을 받으면 주황빛으로도 보이는 두 개의 계단은 빌딩숲에 이질감 없이 스며들었고,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봤는데, 단 하나의 예술품으로 평범한 광장이 야외 갤러리로 바뀌었다. LA의 예술력에 다시금 놀랄 뿐이다.
●아침을 깨우는 향
로스앤젤레스(LA)에서 허락된 기회는 단 3번. 선택지는 정말 많고, 아침 커피를 즐길 시간은 제한적이라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로스앤젤레스의 커피 문화는 폭넓고, 다채롭다. 며칠은 고사하고 2~3달도 턱없이 부족하니 여행자는 괴롭고 또 괴로울 뿐이다. 일단 구역을 좁혀 검색했다. LA는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달리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지 않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나와 도보 약 10~15분 거리, 구글 지도 평점, 현지인 의견, 관광청 추천 등을 종합해 4~5곳을 추렸다. 그리고 개인 취향에 딱 맞는 3곳으로 확정. ‘결정했으면 추가 검색 금지’라는 여행 제1원칙을 떠올리며 카페 호핑(Cafe Hopping)에 나섰다. 순서는 오래된 가게에서 요즘 감성의 카페로. 루틴 아닌 루틴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현지에서 오래 사랑받은 공간을 보면 지역을 관통하는 감성과 통용되는 맛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첫 번째는 100년째 로스앤젤레스의 아침을 책임지고 있는 ‘디 오리지널 팬트리(The Original Pantry)’로 낙점. 1924년에 문을 열어 지금도 주말이면 오전 8시부터 사람들을 줄 세우는 곳이다. 바 테이블 좌석에 앉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종업원과 안부를 나누는 모습에서 로컬의 찐 사랑방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 무한 리필처럼 계속해서 커피를 채워 주는 것도, 북적이는 다이너(미국식 분식집) 분위기도 미국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메뉴 또한 소박하면서 정겹다. 팬케이크와 달걀 요리(스크램블·프라이·오믈릿 등), 프렌치토스트, 소시지, 비스킷 & 그레이비 등 전형적인 미국 밥상이다. LA뿐 아니라 미국에 오면 으레 먹게 되는 팬케이크를 중심으로 두툼한 햄(돼지고기 목살 스테이크 수준), 바삭한 감자볶음, 튀기듯 구운 반숙 프라이를 더했다. 분명 1인분인데 성인 남성 2명이 먹어도 풍족한 양이 내 앞에 놓였다. 이것마저 미국스러워 속으로 한참을 웃었다.

다음은 도회적인 공간. 뉴욕과 LA,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선 왠지 모르게 일어나자마자 카페를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싶다. 드립커피처럼 거창한 음료가 아니고 주문하면 바로 나오는 커피포트의 검은 물이다. 생각해 보면 다 할리우드와 미드 영향이다. 촌스러운 고정관념을 여행자의 로망으로 바꿔 준 카페가 나이스 커피(Nice Coffee)다. 카페는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으리으리한 빌딩들을 병풍으로 삼고 있다. 내부 좌석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시티 내셔널 플라자 광장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분위기다. 근처에서 직장을 다녔다면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것 같다.
음료와 먹거리는 에스프레소, 필터 커피, 콜드브루, 라벤더 라테와 부리토(베이컨·소시지·비건)와 요거트, 퀸아망, 뺑오레즌, 머핀 등 다양하다. 아침이니까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있는 카푸치노와 버터 향이 풍부한 크루아상, 이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으니 비건 부리토까지 욕심을 냈다. 커피와 베이커리 모두 수준급이라 놀랐고, 광장 중앙의 더블 어센션(Double Ascension)이 우아함을 더해 줬다. 이게 LA라고 뽐내는 것처럼.
벌써 마지막 아침이다. 지도에 찍어 놓은 별들만 수십 개라 더 서글프다. 컴(Kumquat Coffee DTLA)이 울적한 여행자에게 상큼한 위로를 건넸다. 브루잉 커피를 선호하는 이에게 컴은 향긋한 안식처다. 푸어 오버(핸드드립), 에스프레소, 콜드브루를 주문할 때 4~5가지 원두에서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플레이버 노트를 살펴보면서 진중하게 골랐다. 컴이 한국어로 금귤이라 라즈베리, 살구 등 새콤함이 특징인 원두로 하루를 시작했고, 결과는 대성공. 마찬가지로 부리토를 곁들였다. 그리고 벌써 다음 여행을 걱정했다. 팬케이크와 부리토 사이에서 고민할 내 모습이 눈에 선해서.
그건 그렇고 컴은 유난히 편안했다. 의자는 예쁜 디자인에 치중돼 딱딱하고 불편했지만, 원두 판매대에 프리츠와 모모스 등 한국 카페의 상품이 보였다. 알파벳 공격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우리말이 보이니 내심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 여행자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