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이어폰과 헤드폰에 푹 빠져있습니다. 워낙 음악 듣는 걸 좋아하거든요. 물론 마음은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입니다만 총알(?)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환경이 여의치 않네요. 그래서 나름대로 현실적인 이어폰과 헤드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직업상 신제품을 접할 기회가 많으니 최대한 이것저것 들어보고 있죠. 지인들이 구입한 제품을 빌리기도 하고 대학로 이어폰샵이나 용산 헤드폰샵, 청담 셰에라자드도 종종 가보곤 합니다.
그러던 중 최근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이어폰이 하나 생겼습니다. 줄루(Zorloo) 제로(Zero)라는 제품입니다. 이어폰인데 DAC를 넣었다고 하네요.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직접 들어봤습니다.
● 음질 높이는 DAC
줄루 제로를 보기 전에 DAC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은 음질을 즐기려면 여러 가지 장비가 필요하죠.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DAC나 파워 앰프, 프리 앰프, 스피커 등의 장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중 DAC는 디지털 음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장치입니다. Digital to Analog Converter의 약자죠. 소리를 내는 기기라면 거의 다 들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다른 기기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DAC가 들어갔느냐에 따라 음질이 달라집니다. 음 손실이나 왜곡을 줄이는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물론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내부에도 DAC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통신과 영상 등 여러 칩셋이 같이 들어 있어 노이즈도 많고 간섭도 심합니다. 특히 모바일에 있는 DAC는 크기와 소비전력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니 고음질을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죠.
<소니 아시아 홈페이지>
그래서 별도의 DAC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포터블 장비를 위한 DAC가 있거든요. 모바일 기기 내부에 있는 DAC의 부족한 성능을 보완하는 건 물론 음 손실이나 왜곡, 간섭을 줄여 음질을 높입니다. 물론 플레이어 외에 장비를 하나 더 챙기는 게 번거롭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디서나 좋은 음질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죠.
● DAC 넣은 이어폰
줄루 제로는 이런 DAC를 내장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한 제품들이 몇 개 있습니다. 소니 MDR-1ADAC와 필립스 M2L 말입니다. DAC와 앰프를 넣어 휴대성과 음질을 모두 잡았죠. 둘 다 직접 들어봤는데요. 음질 부분에선 정말 모자람이 없더군요. 이동하면서도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 버금가는 선명하고 깨끗한 음질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헤드폰입니다. 그에 반해 오늘 소개할 줄루 제로는 이어폰이죠. 심지어 DAC를 담은 최초의 이어폰입니다.
줄루는 제로의 리모컨 부분에 DAC와 앰프 칩셋을 넣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썼네요. 크기는 작지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ARM의 코어텍스(Coretex) M3 MCU와 울프슨의 고음질 DAC, 헤드폰 앰프를 넣었거든요. 참고로 울프슨은 DAC 업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곳입니다. 믿을만한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DAC가 들어갔으니 음원 소스는 디지털 신호로 받아야 합니다. 디지털 그대로 받은 후 이어폰 자체의 DAC 칩에서 아날로그로 바꾸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3.5mm 단자를 쓸 수 없습니다. 대신 모바일 기기에서 많이 사용하는 마이크로USB 단자를 달았습니다.
여기서 아쉬움이 생깁니다. 애플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등 iOS 기기는 사용할 수가 없죠. 물론 국내에는 마이크로USB 단자를 사용하는 모바일 기기가 훨씬 많으니 제조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iOS 기기를 사용하신다면 마이크로USB-라이트닝 어댑터를 따로 사야겠습니다.
아, 올해 안에 iOS를 위한 제품을 내놓는다고 하니 기다리시는 것도 좋겠네요. 참고로 소니의 경우 케이블을 교체할 수 있게 분리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보유한 모바일 기기에 맞는 케이블을 고르면 되는 것이죠. 필립스는 아예 라이트닝 단자만 달았습니다. 줄루와 반대로 iOS 전용인 것이죠.
그나마 줄루는 마이크로USB-USB 어댑터를 기본으로 제공합니다. PC나 노트북에 연결할 때 사용하면 됩니다. 요즘에는 PC 앞에 있는 일도 적지 않으니 꽤 유용하겠습니다. 이런 배려는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는 부분이죠.
참고로 DAC 구동에 필요한 전력은 디지털 단자를 통해서 공급받습니다. 별도의 배터리를 넣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전력 소모가 적은 회로를 넣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전력을 눈에 띄게 잡아먹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 풍부한 저음, 깨끗한 사운드
기대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들어보았습니다. 확실히 일반 이어폰과는 차이가 납니다. 일단 저음형입니다. 주로 저가형 이어폰이 택하는 방향이죠. 하지만 전체적인 음질은 이 녀석이 한 수 위입니다. 굉장히 풍부하고 어택감도 꽤 단단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귀 언저리에서 때리는 묵직한 베이스가 마음에 쏙 듭니다. 저처럼 저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 합니다. 단 중고음도 그만큼 받쳐주기 때문에 답답하다는 느낌은 덜 합니다. 보컬도 꽤 잘 들리고 빠른 곡의 반응성도 좋습니다.
iKON의 <취향저격>이나 레드벨벳 <Dumb Dumb> 같은 KPOP이 듣기 좋습니다. 빵빵한 저음이 흥을 한층 돋우네요. 무한도전 가요제의 숨은 공로자 재환 씨가 김예림과 함께 발표한 <커피>, 소유와 권정렬의 <어깨> 같은 곡에서는 색깔이 확연히 다른 남녀 보컬을 선명하게 그려냅니다.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임창정의 <또다시 사랑> 같은 발라드에서도 선명한 보컬과 함께 풍부한 현악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영화 <위플래쉬>의 삽입곡인 <Whiplash>와 <Caravan> 같은 재즈 밴드도 굉장히 풍성하게 들려줍니다. 단 저음형인지라 해상력 부분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클래식이나 오케스트라보다는 가요나 팝, EDM, 힙합 장르를 더 잘 소화하는군요. 맛이 아주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어두운 방에서 침대에 누워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데요. 빵빵한 저음과 뚜렷한 보컬, 세밀하게 그려내는 사운드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더군요.
디지털 신호 입력 주파수
아날로그 신호 입력 주파수
물론 사운드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르죠. 누구는 저음을 좋아하고 누구는 해상력을 중시합니다. 같은 소리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래서 제조사의 도움을 받아 그래프를 준비했습니다. 위는 디지털, 아래는 아날로그 입력 때의 주파수 응답입니다. 좌우 편차가 거의 없고 폭넓은 대역을 소화합니다. 역시 저음이 강한 편이지만 V자에 가까운 형태를 보여 줍니다.
참고로 유닛은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그 안에는 네오디뮴 드라이버를 넣었습니다. 응답 주파수는 20Hz~20kHz이며 임피던스는 32Ω입니다. 보통 임피던스가 높으면 노이즈가 줄어들지만 출력이 낮아집니다. 줄루 제로는 임피던스가 높은 편인데도 일반 이어폰보다 2~3배 정도의 출력을 구현합니다.
보통 12mW인데 반해 27mW의 출력을 냅니다. 아, PC나 스마트폰에 줄루 제로를 꽂으면 소스 기기의 음량이 최대로 올라간 채 고정됩니다. 음량은 리모컨에 있는 볼륨 조절 버튼을 이용해야 합니다. 기기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호불호가 갈리는 디자인
솔직히 줄루 제로를 처음 봤을 때 그리 기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디자인 이야기입니다. 유닛은 무난하지만 케이블은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투명한 피복으로 감쌌습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더군요. 누구는 촌스럽다 하고 누구는 독특해서 좋다네요. 그래도 내구성이 강하고 줄 꼬임도 덜 하니 그 점은 마음에 듭니다.
리모컨에는 마이크가 없습니다. 리모컨이니까 응당 마이크가 있는 줄 아셨겠지만 3.5mm 단자가 아니니 통화를 할 수는 없습니다. 색상은 레드와 골드로 나왔습니다. 케이블 색상은 그대로지만 유닛과 리모컨의 색상이 다릅니다.
구성품은 여느 이어폰과 비슷한 편입니다. 크기별 이어팁 3개, 케이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USB 어댑터가 들어 있습니다. 케이스는 꽤 단단합니다. 크기도 큼직해서 좋네요.
● 눈을 의심케 하는 가격
자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죠. 바로 가격입니다. 솔직히 DAC가 들어간 이어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느 정도의 가격대를 예상했습니다. 소니 MDR-1ADAC의 출시가가 39만 9,000원, 필립스 M2L의 출시가가 33만 원이니까요.
그런데 이 제품의 가격을 봤을 때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눈을 씻고 몇 번을 다시 확인했죠. 5만 8,600원입니다. 6만 원이 채 안 됩니다. 포터블 앰프를 따로 사려 해도 몇 십만 원은 줘야 하는데. 디자인이야 그렇다 쳐도 사운드는 10~20만 원대 이어폰 못지않거든요. 이 정도 가격이라면 단자의 불편함이나 해상력 부분의 아쉬움 등 앞에서 말씀드린 단점들은 다 취소해야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줄루 제로가 아직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단언컨대 저가형 이어폰 제조사들에게는 분명한 위협 요소입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소비자에게는 두 손 들어 반길만한 제품이고요. 꼭 한 번 들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나와 테크니컬라이터 조선혁
(c)가격비교를 넘어 가치쇼핑으로, 다나와(www.dana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