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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 나는 경찰서에 갔다

2021.04.01. 13: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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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리스본을 사랑하게 되는 시간
오후 10시, 리스본을 사랑하게 되는 시간

그날 리스본의 해는 유난히 길고 눈부셨다.

●뛴다, 뛴다


6월 여름, 포르투갈 리스본. 시작은 좋았다. 호기롭게 질러 버린 KLM 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덕이다. 돈을 썼으면 티를 내는 게 자본주의의 도리지. 샴페인도 들고, SNS용 허세숏도 찍고, 괜히 안 보던 흑백 영화까지 보고. 뭐 하여튼 남들 하는 온갖 천진난잡한 짓은 다 했다. 그땐 지금보다 여행을 더 즐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후 얼마간의 여행도 행복했다. 이름만 들어도 1만408km의 거리가 느껴질 만큼 낯선 나라. 모든 게 신기했고, 좋았다. 아침엔 상 조르제 성이 보이는 방에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보사노바를 들으며 깼고, 저녁엔 알파마 지구의 단골 펍에서 파두를 들었다. 리스본 시내의 전망대란 전망대는 다 올라가 매일 밤 10시에 노을을 봤다. 6월의 리스본은 해가 10시에 진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 에그 타르트는 정말 눈물 나게 맛있어서 3개를 먹고도 6개를 더 사 먹었다. 아무리 먹고 마셔 대도 해가 중천인 도시. 꿈만 같던 매일이었다.

초록과 주황은 리스본을 위한 색이다
초록과 주황은 리스본을 위한 색이다

그리고 대망의 경찰서 씬. 포르투갈 여행이 한 편의 영화라면, 순식간에 장르가 공포물로 바뀌는 대목이다. 아니, 코미디인가? 어쨌든 클라이맥스다.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하필 그날따라 현지 음식에 질렸던 것이고, 하필 사람들로 북적였던 그 거리의 그 맥도날드에 들어간 것이며, 하필 가족들은 나만 두고 빅맥 세트를 주문하러 갔던 거다. 하필, 하필.


허름한 행색을 한 의문의 여성이 등장한다. 가족들을 기다리며 테라스 좌석에 앉아 있는 주인공(나) 앞으로. 유럽여행시 어디서든 꼭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사람, 집시(Gypsy)다. 유럽이 처음도 아니었고, 이런 상황은 더더욱 익숙했다. 곧바로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그녀가 다가온다, 슬금슬금. 나도 가드를 올린다, 슬금슬금. 그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품 안에서 뭘 꺼내나 봤더니 메뉴판이다. 아이스크림인지 사탕인지 모를 요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걸 팔러 왔구만. 판은 금세 코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더니 이번엔 메뉴판을 위아래로 마구 휘젓는다. 정신이 없다. 손으로 밀쳐 내도 속수무책이다. 됐다고, 안 산다고. 돈 없다는데 왜 이렇게 들이밀어. 저기요, 저 학생이라 캐시가 없어요. 아이 해브 노 머니, 노 머니.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 사람도 많고 집시도 많은데, 볼거리는 더많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 사람도 많고 집시도 많은데, 볼거리는 더많다

포기를 모르는 그녀. 지치지도 않고 판을 주구장창 흔든다. 만만찮은 상대군. 쐐기를 박을 때다. “노! 노!!”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두 번째 ‘노’는 첫 번째 ‘노’보다 더 크게 외칠 것. 유럽여행 커뮤니티에서 읽은 집시 대처법 10가지 중 하나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리자 드디어 그가 돌아선다. 나의 승리다. 배낭을 사수했고 잃어버린 물건도 없다. 그는 오늘 교훈을 얻었을 거다. 코리안 젊은이를 얕보지 말라. 그런데 이상하다. 저건 어째 포기하는 이의 발걸음이 아닌데. 그녀의 발이 빨라진다. 가뿐하고 산뜻한 발이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판단이 내려진 순간,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없다. 그녀가 뛴다, 뛴다, 멀어진다.

골목길 산책. 리스본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다
골목길 산책. 리스본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찌그러진 도넛 같던 그녀는 작은 점이 되었다가 1초 만에 사람들 사이로 페이드아웃 됐다. ‘썰’로만 들었던 남의 일이 벌어진 거다. 영화도 썰도 아닌, 내 현실에서. “자긴 소매치기 같은 거 안 당한다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눈 뜨고 코 베였네.” 감자튀김을 씹으며 내뱉은 동생의 말. 저 입을 꿰매 주고 싶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순간을 기록해 두고픈 그의 욕심은 나와 같았다. 방식만 달랐을 뿐
순간을 기록해 두고픈 그의 욕심은 나와 같았다. 방식만 달랐을 뿐

심장이 설컹설컹 썰리는 것 같다. 산 지 1년도 안 된 새 모델에다 약정에 할부금까지 남은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아까운 건 사진이다. 벨렘 탑과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찍은 인생숏들. 턱을 깎고 눈을 키우고 콧볼을 좁히고 인중도 짧게 줄여 만든 내 수작들. 내가 아닌 내 사진들. 후회가 밀려온다. 엄마가 사진 백업하라고 잔소리할 때 들을걸. 햇살이 밉고 바람마저 원망스럽다. 찬란한 오렌지색처럼 보였던 리스본 시내의 지붕들도 이젠 싹 다 오줌색 같다. 지린내 나는 오줌색. 세상은 잔인할 만큼 내 사연에 무심했다. 거리의 여행객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난리들이었다. 그들의 명치를 있는 힘껏 세게 때려 주고 싶은 고약한 마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노란색 트램마저 노랗게 물들이는 리스본의 오후 햇빛
노란색 트램마저 노랗게 물들이는 리스본의 오후 햇빛

정신 차리자.
어디로든 가야 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자니 시뻘겋고 뜨끈한 분노가 솟아 뱃속이 우글우글했다. 아무 택시나 잡고 탔다. 타긴 탔는데,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대성통곡에 놀란 아저씨가 사연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되물어 온다. “흠…. 포리스(Police)?” 예스, 예스. 거기라도 가야겠어요. 지푸라기라도 절실하니까. 그렇게 6월의 어느 여름. 우글거리는 배를 쥐고, 나는 리스본에서 경찰서에 갔다.

매일 아침, 숙소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마주했던 풍경
매일 아침, 숙소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마주했던 풍경

●썩은 동아줄의 끝


좁은 골목길을 지나 택시가 멈춰선 곳은 경찰서보단 파출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덟 명 정도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오른편으로는 사무용 책상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 흔한 컴퓨터 모니터 한 대 없다. 층고가 낮은 건물과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벽. 바닥엔 자잘한 금이 가 있다. 좀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언제 마지막으로 닦았을지 모를 천장의 팬이 휘휘 돌아간다.

나에게 인생숏을 남겨 줬던 벨렘 탑. 이젠 ‘준’이 아니라 ‘줬던’으로 과거가 됐지만
나에게 인생숏을 남겨 줬던 벨렘 탑. 이젠 ‘준’이 아니라 ‘줬던’으로 과거가 됐지만

그렇게 좁은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한 책상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경찰관 한 명이 책상에 앉아 뭔가 받아 적고 있다. 누군 여권을 소매치기 당했다고 하고 누군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고 난리를 쳤다. 땀을 뚝뚝 흘리며 노발대발인 할아버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하는 아저씨. 아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여자도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집시의 희생양들이었다. 나만 괴로운 건 아니구나. 때론 백 마디 말보다 타인의 처절한 고통이 더 큰 위안이 된다. 잔인하게도.

핸드폰을 도둑맞은 나와 달리, 마냥 평화롭기만 했던 리스본의 일상
핸드폰을 도둑맞은 나와 달리, 마냥 평화롭기만 했던 리스본의 일상

바닥에 간 금을 멍하니 세 보며 도대체 몇 개의 금이 더 가야 이 건물이 무너지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내 순서가 됐다. 갈색 파마머리를 한 경찰관이 수염을 만지며 앉으라고 했다. 웃기게 생긴 콧수염이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볼펜을 딸깍이며 그가 묻는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는요? (딸깍) 집시의 인상착의가 어땠죠? (딸깍 딸깍) 어떤 수법으로 털리셨어요? (딸깍 딸깍 딸깍)” 그 놈의 볼펜 소리. 가뜩이나 심란한데 쉴 새 없이 귓불을 긁는다. 볼펜이 딸깍일 때마다 그가 앉은 오래된 철제 의자도 삐걱거렸다.


게다가 비염이 심한지 코를 팽팽 잘도 풀어 댔다. 최악의 오케스트라다. 낡은 팬만 힘겹게 돌아가는 실내는 또 너무 습했다. 간만에 쓰는 영어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미끄러졌다. 진땀이 났다. 나는 자꾸만 축축해져 가는데, 그는 자꾸 딸깍이고 끽끽 대고 킁킁거렸다.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눈동자가 좀 이상했다.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는 바싹 말라 있었다. 얼마나 텅 비어 있던지, 손끝으로 동공을 살짝 누르면 바삭하게 부서져 가루가 될 것 같았다. 마치 육체의 껍데기만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오후 4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회사원의 동공 같달까. 그런 눈동자로는 피해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공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선은 곧 그의 두툼한 손으로 이어졌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직감(aka 눈치)이라는 게 있다. 포르투갈어는 몰라도 이거 하난 확실하다. 그는 내 말의 삼분의 일도 받아 적지 않고 있다. 나의 사연에 무심한 또 하나의 세상이 여기 있었다.

다시 뱃속이 우글거렸다. 그의 콧수염을 냅다 잡아 뜯고 싶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심 드라마틱한 해결책(이를테면 찌그러진 도넛 같던 집시와 2년 약정이 남은 내 핸드폰을 찾아 주리라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조금 외로워졌고, 동시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적당히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몸통에 둥글고 휑한 구멍이 뚫린 듯했다. 살면서 그때만큼 ‘체념’이란 단어가 ㅊ, ㅔ, ㄴ, ㅕ, ㅁ, 으로 낱낱이 뜯어져 가슴에 쿡쿡 와 닿은 적은 또 없었다. 터덜터덜 나오는데 내 뒤 차례였던 여자가 경찰에게 영어로 욕을 해 댔다. 캐리어를 들고 튄 기차역의 그놈을 잡아 달라고. 볼펜이 다시 딸깍였다. 천장의 낡은 팬이 휘휘 돌아갔다.

●밤은 온다


경찰서, 아니 파출소의 문을 열고 나오자 선선한 오후의 바람이 스친다. 대서양의 바람, 리스본의 바람. 해가 지고 있었다. 10시에 가까워졌단 뜻이다. 놀 기분도 아니고 할 일도 없으니 노을이나 보자 해서 트램을 타고 알칸타라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라고는 하지만 딱히 무슨 빌딩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언덕이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벤치에 앉아 쉬는 장면 덕에 유명해졌다. 리스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사람들의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렸다. 거리의 악사는 연주를 이어갔고, 공기 중의 라임향은 새큰했다. 리스본에선 어딜 가든 묘하게 상큼한 향이 난다.

아직 다 저물지 못한 해가 하늘에 잔상을 남겼다
아직 다 저물지 못한 해가 하늘에 잔상을 남겼다

노을이 천천히 리스본 시내를 덮쳤다. 올리브나무와 골목의 계단이 차례로 주황빛으로 칠해졌다. 손으로 쓱 쓸어내면 금빛 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다. 지붕들도 찌든 오줌색이 아닌, 환한 오렌지색으로 반짝였다. 그 어떤 것도 이 망친 기분을 복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행자의 마음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싸워도, 마지막 기차를 놓쳐도, 인생숏 200장이 담긴 핸드폰을 도둑맞아도, 말문이 막히는 풍경 한 폭에 거짓말처럼 마음이 녹는다. 나를 정말 달래 준 건 타인의 처절한 고통도, 콧수염 난 경찰관도 아닌, 오후 10시 노을로 물든 리스본이었다. 어지러운 생각들은 공중으로 다 밀어내게 되는 풍경. 지금도 살다가 마음이 베일 때면 그날 리스본의 노을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갑자기 오렌지색 반창고가 가만히 생채기를 덮어 당도 높은 위안을 주는 기분이 든다.

리스본의 전망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 알칸타라 전망대와 함께 인기가 많은 노을 명소다
리스본의 전망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 알칸타라 전망대와 함께 인기가 많은 노을 명소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거기 서 봐. 사진 한 장은 남겨야지. 싹 다 날려 먹었는데.” 포즈를 취해 보라고 채근하는 동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는 안 나고 자꾸 웃겼다. 리스본에선 울 일도 웃을 일이 된다. 나 아닌 내 사진들이 동생의 핸드폰에 새로 담겼다. 우글거리던 배도 잔잔해졌다. 해가 유난히 길었던 하루의 끝. 하늘의 채도가 더 낮아졌다. 6월의 리스본은 해가 10시에 진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해가 중천인 도시에, 따뜻하고 조용한 밤이 오고 있었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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