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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울 여행, 양림동 한 달 살이

2021.06.01. 13:00:15
조회 수
 156
벚꽃 만발한 날의 수피아여고. 소녀들은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섰었다고
벚꽃 만발한 날의 수피아여고. 소녀들은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섰었다고

객관성을 잃어버린 여행지가 있다. 말하자면 각자의 고향 같은 곳. 내 고향은 아니지만 양림동이 그러하다.
광주 남구의 작은 마을. 아무렇지도 않던 그곳이 소울 여행지가 되기까지. 내게 무슨 마법이 걸렸던 걸까.

여행자라운지 카페 ‘10년후그라운드’
여행자라운지 카페 ‘10년후그라운드’

●짠하고 진한 이야기만 많았던 그곳


“휴직하신다고요? 그럼 내려오셔야죠!” 쥬스컴퍼니 이한호 대표가 대뜸 말했다. 때가 때인 만큼 여행은 생각도 안 했는데, 양림동이 ‘또’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어설프게 나는 양림동 1호 여행자다. 9년 전 취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떼는 말이야’식으로 말하자면, 당시 양림동은 지금과는 무척 달랐다.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간호대학교, 광주기독병원의 트라이앵글 안에 자리한 양림동은 기독교 선교사의 유적과 스토리 위에 세워진 고답의 마을이었다. 순례자들이 종종 찾아올 뿐, 여행으로 올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슬픔과 회한의 도시로 각인된 광주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양림동 첫 여행의 이유였다. 그때 만난 두 사람이 쥬스컴퍼니 이한호 대표와 아트주 정헌기 대표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양림동 최고의 비공식 가이드 2명을 좌우에 대동했던 셈이다. 2014년 트래비 1월호의 양림동 기사를 두고 정 대표는 농담삼아 ‘양림동을 여행지로 조명한 첫 기사’라고 말한다. 그것이 내가 양림동 1호 여행자라 주장하는 근거라면 근거다.

맘껏 찍어유, 양림동이 늘 그렇다
맘껏 찍어유, 양림동이 늘 그렇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선교 역사로만 알려져 있던 양림동의 속살은 양파 뺨치는 레이어드였다. 호남을 호령했던 양반가의 고택들, 그 부의 혜택을 입은 후손들이 배양한 예술적, 문화적 자양분, 선교사들이 들여온 유물과 서양 의료 기술을 바탕으로 한 박애 정신, 항일 독립운동과 5·18로 이어지는 민족애와 민주주의 정신이 반경 1km도 안 되는 양림동에 다 들어 있었다. 그 첫 여행을 마친 후 지금의 육각커피 자리에 있던 ‘다형다방’ 2층의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여행 소감을 말했었다. “좋긴 한데, 여행지로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네요.” 대책 없는 솔직함이었다. 당시 이 멘트를 듣고 불끈한 마음이 들어 뭐라도 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했다는 게 정헌기 대표의 후일담이다. 그 일이란, 지금 양림동의 시그니처 숙소가 된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를 연 것이다.

큐레이팅이 훌륭한 독립서점 러브 & 프리
큐레이팅이 훌륭한 독립서점 러브 & 프리

●역사, 사람, 공간, 다시 사람


드문드문 양림동을 방문했다. 때론 공적으로, 가끔은 사적으로. 9년이 흐르는 동안 양림동은 광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마을로 성장했고 자생적인 문화콘텐츠, 관광콘텐츠를 갖춘 성공적인 로컬 문화관광개발의 사례로 손꼽힌다. 돌아보니 애쓴 사람, 뜻을 더한 사람들이 많고, 운도 따랐다.

양림동 앞 광주천 양림교
양림동 앞 광주천 양림교

양림동 최초의 여행자 스폿이었던 ‘다형다방’의 바통은 ‘1930양림쌀롱’으로 전달됐다. 이한호 대표가 최승효 고택 옆에 있는 작은 한옥을 보수해 2016년부터 여행자라운지로 삼았다. 이후 5년간 ‘1930양림쌀롱’은 강의, 콘서트, 이벤트, 축제 등 30회 문화행사의 무대였다. 지난해 그 바통은 다시 ‘10년후그라운드’로 넘어갔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될 뻔했던 구 은성유치원은 여행자라운지 겸 카페, 문화공간으로 살아났다. 피아노와 마이크는 언제라도 무대로 변신할 공간이고, 야외 테라스에 앉으면 양림동의 사람과 정서가 흐르는 교차로에 선 기분이다. 누군가는 이 자리를 양림동 골목이 한데 모이는 그물망의 중심이라고 했다.

다형다방이 있던 자리엔 육각커피가 자리한다
다형다방이 있던 자리엔 육각커피가 자리한다

펭귄마을은 2012년경부터 자체적으로 발아했다. 아파트 개발 계획에 원주민들이 떠나고 철거될 위기에 있던 골목길은 화재로 더욱 쇠락하는가 싶었는데, 김동균씨(현 펭귄마을 촌장)가 들어와 마을 주민들과 함께 폐품을 이용한 정크아트로 골목길을 꾸미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이 유행하면서 펭귄마을도 부상했고, 주민들의 자긍심도 높아졌다. 그렇게 시민예술촌으로 발전한 펭귄마을은 지난해 공예창작촌으로 새 옷을 입었다. 공방마다 다양한 공예품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산만했지만 자연스러웠던 옛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주민공동체의 노력으로 지속 가능한 여행지의 방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1911년에 건립된 수피아홀
1911년에 건립된 수피아홀

노력이 기회를 만들고, 기회는 다시 도약의 계기가 되어 양림동은 자생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미술관, 기념관, 갤러리 등 마을의 자원 사이에 네트워크가 생겼고, 펭귄마을에 이끌려 온 여행자들도 양림동의 속살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도로가 닦이고 관광안내소가 생기고, 대형 버스도 너끈한 주차장이 생겼다. 그와 더불어 힙스터들의 취향 저격인 카페와 트렌디한 식당, 베이커리도 속속 오픈했다. 양림동이라고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속수무책으로 휩쓸리지는 않았다. 추천할 만한 식당, 카페, 숙소가 뚜렷해지자 양림동은 여행과 일상이 교차하는 매력적인 방문지가 됐다. 지인들에게도 양림동을 여행지로 추천했고, ‘힐링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이남갤러리 옥상. 반대편으로 무등산이 보인다
이이남갤러리 옥상. 반대편으로 무등산이 보인다

마을의 자원에서 양림동이 절대적인 비교우위에 있는 분야는 예술이고, 그 핵심은 양림동을 아끼고 지지하는 예술가들이다. 단위 면적당 예술가의 밀집도가 대단히 높다. 갤러리 겸 유화 체험도 진행하는 한희원 미술관은 한희원 작가를 직접 만날 확률이 꽤 높은 곳이다. 운이 좋으면 그의 피아노 연주도 들을 수 있다. 조선 실학자 이덕무가 17세에 만들었다는 윤회매를 밀랍으로 재현하는 김창덕 작가는 한옥 찻집 ‘윤회매 문화관’을 운영하고 있다. 단골이 되면 그의 바라춤을 볼 기회도 생길 것이다. 고 이강하 화백의 예술적 유전자는 이강하미술관의 큐레이터인 딸 이선 씨와 아들 이조흠 작가로 이어지고 있다. 광주가 낳은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이남 작가는 호신대 기숙사 앞에 이이남갤러리를 앉혔다. 오픈하자마자 광주의 핫플레이스로 등극해 주말이면 젊은 힙스터들이 끌고 오는 고급 승용차로 교차로가 꽉 막힐 정도다. 이 밖에도 양림동 안팎의 예술가들이 양림동의 일이라면 기꺼이 손을 보탠다.

양림오거리에 세워진 이이남 작가의 작품 ‘1904-2017 LIGHT’
양림오거리에 세워진 이이남 작가의 작품 ‘1904-2017 LIGHT’
전시가 진행 중인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전시가 진행 중인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새로운 ‘예술여행맛집’의 발견


2021년 봄의 광주는 코로나 시국을 잊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특히 양림동은 제13회 광주비엔날레와 제1회 양림골목비엔날레의 교차점으로, 차린 것이 많은 잔칫집이었다. 손님들에게는 새로운 ‘예술여행맛집’의 발견이었고, 호스트들에게는 로컬 여행 시대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양림동의 도약이었다. 평이 좋았고, 소문이 났고, 양림동이 다시 각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1회 양림골목비엔날레를 기획한 이한호 쥬스컴퍼니 대표를 만났다. 서울에서 촉망받던 청년문화기획자였던 그는 2012년 양림동으로 삶과 일의 터전을 옮겼다. 한 마을의 성장이 어디 한두 사람, 한두 해의 노력으로 가능했을까마는, 9년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의 언어로 잘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이남갤러리의 압도적인 미디어아트 작품
이이남갤러리의 압도적인 미디어아트 작품

●다시 1호, 양림동 한 달 살이 여행자


2021년 1월, 그 안전한 그물망 안으로 들어가 양림동 한 달 살이 여행자가 됐다. ‘산다’는 것은 여행과 일상의 경계 위를 걷는 일. 그런 면에서 양림동은 완벽하다. 학교, 병원, 도서관, 갤러리와 전시관 등 문화, 의료, 교육 인프라가 촘촘하게 갖춰져 있다. 호랑가시나무언덕에 올라서면 무등산의 실루엣이 사시사철 웅장하고, 마을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광주천을 넘으면 바로 충장로와 이어진 아시아문화전당과 도청이다. 살기 좋은 곳이 여행하기도 좋을 수밖에.

아트폴리곤은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장이었다. 김상돈 작가의 작품
아트폴리곤은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장이었다. 김상돈 작가의 작품

그동안 하루 이틀씩, 스타카토로만 묵었던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 1층에 묵직한 짐을 풀었다. 양림산의 남쪽, 양지바른 기슭에 있는 2층 벽돌 건물은 100여 년 전 선교사 사택으로 지어진 곳이다.


“이 공간을 빌려서 게스트하우스와 창작소로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열이면 열, 모두 반대했어요. 지금의 모습으로 바뀔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늘 그리운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
늘 그리운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

9년 전 기억 속에 호랑가시나무언덕은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언덕 위에 정성스레 조성한 선교사묘역이 있고 우일선선교사사택과 광주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 아래쪽 빨간 벽돌집 2채와 창고는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었고, 텃밭 옆으로 쓰레기가 쌓여 있던 곳이었다.

푸른빛에 잠든 우일선선교사 사택
푸른빛에 잠든 우일선선교사 사택

아트주 정헌기 대표는 언더우드선교사사택과 뉴수마선교사사택을 개조해 2013년부터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아트폴리곤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이너 겸 문화기획자인 그는 100년이 넘은 고택과 그 주변에 마법을 뿌렸다. 빨간 벽돌집과 북미의 숲에서나 볼 법한 거목들이 어우러진 이 공간은 도시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것 같다. 봄이면 1층 주방 통유리창 앞으로 수선화가 노란 물결을 이루고, 여름이면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2층 테라스에 꽃잎을 떨구고, 가을이면 호랑가시나무의 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겨우내 새들의 먹이가 되어 준다.

빛이 좋아 양림동, 침대에서의 일광욕
빛이 좋아 양림동, 침대에서의 일광욕

근처 직장인들은 점심마다 커피를 들고 산책 삼아 올라왔고 눈이라도 오는 날엔 근처 아파트의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눈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왔다. 근대의상 커플룩의 연인들은 피크닉 세트를 빌려 브런치를 즐기거나 삼각대를 들고 오르내린다. 이 모든 장면을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의 주방에 앉아서 목격했다. 두 모서리를 차지하는 통창은 양림동의 일상을 투영하는 스크린이었던 셈이다.

전시가 진행 중인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전시가 진행 중인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창작소 지하실 전시 공간
창작소 지하실 전시 공간

저녁이 되어 창밖 뷰가 사라지면 거실 벽난로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탁탁 소리를 내는 겨울밤의 모닥불에 고구마 굽는 요령을 익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볕이 따뜻한 날엔 2층 테라스에서의 맥주 한 캔이 좋았다. 그런 시간마다 내 앞에 새로운 인연, 오랜 인연, 위로와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트폴리곤에 전시했던 엄정애 작가의 인형
아트폴리곤에 전시했던 엄정애 작가의 인형

사실 한 달을 머물면서도 양림동을 다 보지 못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는 음악가 정율성 생가, 참신한 기획전으로 소문난 이강하 미술관, 큐레이팅 안목이 기가 막힌 독립 서점 LOVE & FREE도 모두 이번 여행에서 처음 가 본 곳이다. 사직공원 전망대에서 해 지는 무등산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미션은 끝끝내 완수하지 못하고 숙제로 남겨졌다. 고인 이야기가 많아서 이렇게 긴 글을 쓰고도 양림동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라니! ‘양림동 1호 여행자’에 이어, 또다시 ‘양림동 1호 한 달 살이 여행자’의 타이틀을 욕심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이 긴 기록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INTERVIEW
마을이 미술관이다


양림골목비엔날레 기획자
이한호 쥬스컴퍼니 대표

2011~2012년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 때부터 고민했었어요. ‘지역의 생활, 문화가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까?’ 하고요. 예전에는 문화를 관광으로 만든다는 것이 터부시되었거든요. 하지만 여행자들은 그 동네의 사는 모습을 더 좋아하더라는 거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2012년 무렵 하방했던 기획자들이 지역의 매력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가능성이 보이니 두렵지 않았죠. 광주에는 ACC처럼 거시적인 자원도 있지만, 양림동처럼 마을 안에 쌓여 있는 시간의 층위가 매력적인 자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스터디, 모임, 투어, 전시 등을 자발적으로 진행했어요. 그러다 2014~2015년 지역문화진흥법이 통과되면서 다양한 정책사업이 확대되었습니다. ‘1930양림쌀롱’이 문화가 있는 날 정책사업의 1호 사업으로 선정되었고 민간으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년을 이어오면서 30회의 문화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정부 지원이 중단된 후에는 자체 예산으로 소화했고요.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마을 안의 카페, 식당들이 서로 연결되는 경험이었죠. 1930양림쌀롱 프로그램 때 카페나 식당을 무대로 예술가들이 많은 공연을 했었거든요. 지난해부터 양림골목비엔날레를 준비했는데, 마을이 미술관이 되는 경험을 다들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매력적인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거죠.


2019~2020년으로 넘어오면서 문체부가 문화도시를 선정하기 시작했어요. 문화도시란 문화 시민이 사는 도시, 시설이나 행사가 많은 것이 아니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죠. 그런 면에서 양림동은 아주 고무적입니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지자체의 예산 지원이 전혀 없었지만, 자력으로 일군 성과니까요.

양림골목비엔날레 기간 동안 아트 마켓이었던 ‘10년후그라운드’

양림동은 0.98m2 안의 안전망인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망이 되어 주는 거죠. 지난해 양림동도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함께 공연도 하고 소풍도 가고 그랬죠. 누군가 멀리 가 있으면 보고 싶고, 돌아오면 함께 밥을 먹고 그래요. 양림동의 수많은 골목이 그물망처럼 묶이듯, 사람들도 느슨한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면, 양림동은 서로에게 지지와 공감을 주는 제3의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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