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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부여잡고

2022.04.11. 10:46:43
조회 수
294
5
댓글 수
4

백제의 마지막 도읍을 여행했다.
소박하고 천진한 동네였다.

●궁남지의 밤


백제는 도읍을 3번 옮겼다.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웅진에서 사비로. 위례성은 경기도 하남시 부근이라는 설과 충남 천안시 북면 일대라는 설이 있다. 웅진은 충남 공주 자리다. ‘사비’는 지금의 부여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 떠났다.


부여에 도착했다. 동네가 소박하고 천진스럽다. 내일이 오는 것도 모르게 게으름 피우고 싶은 기분이다. 금강변에 차를 세웠고 시동을 껐다. 봄이라기엔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꽃망울이 맺혀 있다. 쾌청한 바람이 분다. 겨울과 봄에 걸쳐 시원치만 따뜻한 계절이다. 어디든 가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딱히 어느 곳도 가야 할 곳이 없다. 금강이 흐르듯 잠들어 버렸고….

저녁이 됐다. 낮잠은 도시를 씻어 내렸다.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진 하루를 그래도 부여잡아 보자고, 궁남지로 향했다.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이다. 백제 무왕 35년(634년),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웠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가득 심었다. 못 가운데는 섬을 하나 만들었다. 신라의 인공호수로 경주 안압지보다 40여 년 먼저 만들었으며, 안압지 조경 역시 궁남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이 고요하다. 이따금 첨벙거리는 건 오리나 자라 같은 것들의 소리다. 조용하면 현실이 꿈같다. 앙상히 흐드러진 버드나무 줄기 끝에 맺힌 노을이 새카만 못으로 하염없이 타들어 간다. 부여잡고 있던 백제의 밤이 형체 없이 녹는다.

●24가지의 이야기
송정 그림책 마을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부여의 어느 마을로 향했다. 우연히 찾은 마을이라면 거짓이고, 취재였다. 또 가는 데 기분이 좋았다면 거짓이고 여행 반, 일 반의 마음으로. 부여 시내에서 20분 정도 달리니 송정 그림책 마을에 도착했다.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동네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이들 중 24명이 동화책 작가다.

칠팔십의 어르신들이 인생의 한순간을 떠올려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엮은 책이다. 볏짚으로 짚신을 만든 이야기, 꽃을 심는 닭 이야기, 누룽지, 까치 소리, 상추 자랑 이야기. 동화책은 3분이면 다 읽는다. 16쪽이다. 다만 삶을 책장에 올린 탓에 한 장 한 장이 조심스럽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처럼 담겨 있다.

송정 그림책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이 직접 자신의 책을 여행객에게 읽어 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밭을 일구다, 밥물을 올리다가 나온 어르신들이 책을 읽어 준다. 흙냄새도 나고 밥냄새도 나는데, 그게 또 좋다. 어떤 이의 살아왔던 이야기를 살아가는 공간에서 들을 수 있다. 송정 그림책 마을을 산책한다. 야학당을 중심으로 벽화가 뻗어 있다. 이따금 마을을 들르는 우체부는 헤맬 때마다 이 벽화를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해가 좋은 봄이다.

●부여가 그린 동양화
서동요 테마파크


송정 그림책 마을에서 조금 더 걸으면 송정 저수지가 나온다. 무려 83만 평방미터 규모다. 저수지 내부에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동남아시아 어느 맹그로브 숲을 연상케 한다. 송정 저수지 가장자리로 나무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돌면 출렁다리가 나온다. 출렁다리 너머에는 서동요 테마파크가 있다.

다리를 짚고 넘자면, 왜 높은 다리를 출렁이게 만든 것인지, 또 뭐가 재밌다고 출렁이며 건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금이 저린다. 언제부터 안전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겁쟁이라며 싸잡아 부르는지 모르겠다. 무서운 게 아니라 다리를 못 믿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서동요 테마파크까지 3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저수지를 둘러 돌아가면 10분 정도가 더 소요된다. 안전을 위해 차를 탔다. 부여는 늑장 부리면 더 좋은 동네다.

서동요 테마파크는 한국 최초의 백제 역사 드라마 <서동요>의 오픈 세트장이다. 백제, 신라왕궁, 왕궁촌, 태학사, 하늘재, 저잣거리 등 다양한 분류의 세트장이 있다. 이곳은 계백장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강인한 천등산 자락과 저잣거리의 조합이 동양화 같기도 하다.

●새콤한 시원함
장원막국수


장원막국수는 부여에서 가장 유명한 국숫집이다. 막국수는 메밀껍질째 맷돌에 막 넣어 갈아 만든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나름 여기선 존재가 귀하다. 주말에는 무조건 웨이팅이 필수다. 장원막국수는 구드레 나루터 근처에 위치한다. 세월이 워낙 오래된 국숫집이라 겨울에는 초입이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마당 가마솥 펄펄 끓는 물에 수육을 삶고, 주방 앞에서는 반죽을 기계에 넣어 면을 뽑아낸다.

메뉴는 단출하다. 막국수와 편육, 두 가지. 막국수는 푸르뎅뎅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면, 오이, 김, 깨, 양념장이 끝이다. 맛은 시원하고 시다. 방 안에 앉아 국수 한 그릇 먹고 있으면 여러 평이 귀에 들려온다. 워낙 맛집이라 소문난 탓이다. “소문만큼은 아닌데…” 혹은 “기다릴 맛은 아닌데…”. 거의 부정적인 평이 많다. 뭐, 기다릴 맛도 아니고, 소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 그릇 시원하게 끝까지 먹을 수 있는 맛이다. 막국수는 원래 그런 음식 아닌가, 굳이 이토록 시원한 음식을 두고 과하게 음미할 필요는 없다.

편육도 좋다. 특이하게 돼지고기 목삼겹을 사용해서 살코기 비율이 높고 부드럽다. 김치랑 잘 어울린다. 장원막국수 김치는 전형적인 충청도식 김치다. 간이 삼삼해서 처음 담갔을 때는 못 먹을 정도로 싱거운데, 익으면 익을수록 사이다처럼 청량한 맛이 특징이다. 참고로 편육은 반만 주문할 수 있다. 양도 반이고 가격도 반이다.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62번길 20
영업시간: 매일 11:00~17:00
가격: 메밀막국수 7,000원, 편육 1만9,000원

●반찬의 매력
삼정식당


백제는 예로부터 평야가 발달해 쌀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매일 부드럽고 단맛이 감도는 쌀밥을 밥상에 올렸고, 자연스레 반찬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여 삼정식당은 파불고기와 냉면이 유명하다. 둘 다 맛있는데, 그보다 더 젓가락이 향하는 곳은 밑반찬이다. 도라지무침, 메추리알조림, 궁채나물, 미나리무침, 고춧가루 살짝 넣은 물김치가 나온다. 물김치는 배추를 아무렇게나 막 썰어 물에 띄워 놓고 고춧가루를 흘린 참담한 비주얼인데, 청량감이 포카리스웨트 저리 가라다. 궁채 줄기의 꼬들거림은 이가 있음에 감사한 식감이다.

파불고기는 간이 강하다. 자작하게 깔린 사골육수가 끓으면, 한 번 담가 먹는 방식을 추천한다. 간이 삼삼해지고 사골 육수의 농밀함이 더해진다. 냉면 육수는 소뼈와 사골을 고아 야채와 함께 넣고 중탕해 만든다. 사골국물의 진득함보다는 야채 육수의 가볍고도 상쾌함이 부각되는 냉면이다.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성왕로 292
영업시간: 매일 11:30~20:30(브레이크 타임 14:00~17:30)
가격: 파불고기 1만8,000원, 냉면 7,000원


글·사진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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