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오후, 김길동 씨는 서재 컴퓨터에 거대한 우퍼와 사람 키만큼 큰 스피커를 연결하고 있다. 무조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 남자는 컴퓨터로 음악을 듣기 위해 수백만 원짜리 앰프와 DAC을 구매했고, 1m에 수십만 원에 달하는 케이블도 질러버렸다.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 “PC-Fi”라고 대답하는 이 능력남. 웃음이 괜스레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가 하고 있는 것이 PC-Fi가 맞을까?
PC '로' 음악을 듣는다. PC-Fi
김길동 아저씨의 PC-Fi는 평범한 우리들이 느끼기에는 PC-Fi 라고 부르기엔 너무 멀리 갔다. "어...PC를 쓰긴 쓰는데... 저게 PC-Fi가 맞아?" 이런 느낌. 학교 운동회에서 학부모 달리기 이벤트가 열렸는데, 티타늄 스파이크가 박힌 축구화로 전력질주 하는 아저씨를 보는 기분이랄까.
PC-Fi는 주로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단어인데. ‘PC로 음악 듣는 것'을 대강 통칭해서 PC-Fi라고 부른다. 아마도 *하이파이(Hi-F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Hi-Fi (High Fidelity) : 사운드의 원음을 정확하게(Fidelity : 충실함, 정확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또는 그러한 음악 감상의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
▲ 무손실 음원 지원과 세세한 세팅이 강점인 foobar2000. PC-Fi 라는 말이 생기는 데 나름대로 영향이 있었을 듯
지금은 무손실 음원도 많고, PC로도 얼마든지 고급 음악 감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PC 음원 파일의 음질이 조악했다. 미디 음원의 시대를 넘어서 MP3, RA 같은 초기 압축 음원 파일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이 APE, FLAC 같은 초기 무손실 음원인데,
PC-Fi는 무손실 음원이 이제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던 때 부터 쓰이기 시작한 단어이기 때문에, 이 단어의 유래를 생각하면 수백, 수천만 원 이상까지도 호가하는 고오급 취미 Hi-Fi 와는 약간 결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요즘은 초호화판 부품으로 도배하면 수천만 원 짜리 PC-Fi도 가능한 세상이 됐지만, 그렇게 오버파워로 세팅한 PC-Fi는 컴퓨터를 소스기기로 사용하는(파일만 담아두는 수준의) HI-Fi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동네 코인 세차장에 몰고가서 "제 취미요? 허허 소소하게 손세차 하는 겁니다(PC-FI 입니다)" 라고 인터뷰 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 거지. 하지만 실제로는 페라리 람보르기니를 타는 것(Hi-Fi)이 취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피씨파이는 어렵게 생각할 거 없고 그냥 컴퓨터 쓰면서 음악을 틀면? 그것이 PC-Fi다. PC → 메인보드의 사운드칩셋(일종의 DAC) → 액티브 스피커(앰프 + 스피커) 를 거쳐서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도 꿀릴 것이 없다. 여러분과 저, 주눅들지 말자. 우리는 모두 PC-Fi를 즐기고 있다. 확실히 할 것은 이때 PC를 이용하는 것이 메인이고 음악을 듣는 것은 부차적인 거다. 그러니까 "컴퓨터를 하면서 음악을 틀건데, 이때 음악을 더 좋은 음질로 듣고 싶어" 이것이 PC-Fi에 가장 근접한 설명이 아닐까.
PC-Fi는 태생적으로 가성비를 좋아해
PC-Fi 단계별 접근법
PC-Fi는 음악 감상의 끝을 보는 ‘Hi-Fi’(하이파이) 와는 세팅의 정도가 다르다. 요즘은 컴퓨터 메인보드에 사운드 칩셋이 기본으로 내장되기 때문에 누구나 PC-Fi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을 약간 더 업그레이드 하느냐 마느냐 하는 수준의 세팅이면 될 터. 값비싼 장비, 값비싼 헤드폰으로 하는 것은 Hi-Fi의 영역으로 떠넘기면 된다. 그래서 PC-Fi는 태생적으로 가성비를 중요시한다.
입문 : 지금 쓰는 그대로 (소요비용 월 5,000~10,000 원)
PC나 노트북은 다들 있으니까 소스 기기는 0원이다. 무손실 음원만 구하면 된다. 구매 비용도 부담이 줄었다. ‘멜론’, ‘벅스’, 'Tidal’과 같은 사이트에서 고음질 음원을 월정액으로 무제한 스트리밍할 수 있으니까.
DAC은 메인보드의 사운드 칩셋으로 해결했고, 앰프는 액티브스피커에 내장돼 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이용해도 된다. 이 단계에서는 세팅 바꿀 것은 없고, 내가 PC로 음악을 듣는 것에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심이 있고 더 좋게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 다음 단계로. 관심 없다면 그냥 이 상태에 머무르면 된다. 황금귀는 저주이고 막귀는 축복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오히려 이 단계에 머무르는 자가 승자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 부터는 본격적으로 돈이 나가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만족 : 스피커를 바꾼다 (소요비용 50,000 ~ 500,000 원)
음질 향상에 대해 갈증을 느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데 바꿔야 할 것이 제법 많다. 스피커, DAC, 앰프 등등. 아무리 저렴한 것으로 해도 저걸 다 구비하려면 한동안 커피와 취미생활을 끊고 폐인처럼 살게 된다. 그러니까 선택과 집중을 하자. 음질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 구매 만족도가 가장 큰 것을 먼저 바꿔야 한다. 스피커다.
스피커와 헤드폰, 헤드셋은 저가형과 고가형의 가격이 천지 차이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만 원 이상도 시원하게 긁을 수 있다. 그러면 아내에게 등짝을 시원하게 긁히겠지만 내가 좋아서 사겠다는데 뭐 어쩔 텐가. 등짝에 피 정도는 까짓꺼 양보한다.
등짝에 피 나기 싫다면 가성비, 가심비를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대략 5~20만 원대 사이에 평이 괜찮은 제품들이 많다. 본인이 지금 사용 중인 제품이 저 가성비 제품들보다 저렴하다면 (모니터 스피커, 또는 초저가 스피커) 스피커를 교체하고 BASS TREBLE 다이얼을 좀 만지는 것만으로도 귀가 트이는 듯한 효과가 있다.
내가 고음질로 듣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의심이 들때 : DAC 구매 (30,000 ~ 990,000원)
스피커를 바꿨는데도 뭔가 아쉬운 게 생긴다면 스피커의 개성이 본인과 잘 안 맞는 취향의 문제이거나 또는 잡음 문제다. 우리가 주로 쓰게 되는 액티브 스피커는 스피커 내부에 앰프와 전원부가 다 들어있고, 보통은 전자파나 노이즈 차폐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화이트 노이즈에 취약하다. 쓰---- 츠---- 하는 미세한 화이트 노이즈가 음악 뒷배경에서 한 번 들리기 시작하면 끝이다. 그때부터는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할 테니까.
잡음을 최대한 해결하고 싶다면, USB 연결방식의 DAC을 알아보면 된다. DAC는 Digital to Analog Converter의 약자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시켜 주는 장치. PC에서 생기는 잡음이나 노이즈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대부분 USB 단자만 꽂으면 작동하기 때문에 매우 손쉽게 연결할 수 있다.
PC 사운드카드, 메인보드의 사운드 칩셋도 DAC의 역할을 겸한다. 본인이 좀 괜찮은 사운드 카드를 쓰고 있거나, 메인보드 사운드 칩셋만으로도 음악 감상에 불편함을 안 느낀다면 DAC를 굳이 안 사도 되고, 사더라도 저렴하게 해결하려면 커뮤니티에서 '꼬다리 DAC' 이라고 부르는 작은 포터블 DAC 으로 체험해봐도 된다. 제대로 살 거라면 거치형 제품으로 검색하자.
가격은 *거치형 DAC은 저렴한 것이 대략 10만 원 전후이고, 가성비로 좀 이름난 제품들은 10~20만 원. 커뮤니티에서 가성비가 합리적이라고 언급 되는 DAC+AMP 일체형 제품은 30~50만 원 정도 사이에 많다. 꼬다리는 1만 원 미만의 저가형부터, 고급형은 수십만 원까지 가는데.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악 듣는 PC-Fi가 목적이니까 포터블 위주의 꼬다리에 큰 돈 쓰는 것은 비추이고, 1~3만 원 사이의 제품으로 맛보기 하는 것을 추천한다. *거치형의 기준이 다소 모호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꼬다리 DAC을 제외한 모든 제품을 거치형으로 취급
나 진심이다... 진정성 MAX다 : 앰프(AMP)를 알아보고, 스피커도 업그레이드 한다
PC-Fi로 풀세팅을 해보고 싶다면 우선 앰프를 추가하고, 더 좋은 스피커나 헤드폰, 헤드셋으로 넘어가면 된다. 앰프는 입력된 신호의 출력을 높여주는 증폭 장치이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왜곡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게 앰프마다의 개성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고출력 액티브 스피커가 많아서 출력을 더 높일 필요가 없으니까 스피커를 쓰는 가성비 PC-Fi 구성에서는 앰프까지 사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고가의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앰프를 써야 볼륨 확보가 된다. '댁엠, 덱엠'으로 불리는 DAC+AMP 일체형을 구매하면 한방에 두 가지 기기가 해결되므로 이런 제품이 인기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생긴다면 최후의 지름, 고가의 하이엔드급 DAC, 앰프, 스피커, 헤드폰으로 세팅하게 된다. 일반인은 굳이 갈 필요가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사실상 이 정도 수준까지 오면 그냥 컴퓨터 하면서 음악 좋게 들어 보겠다는 수준(PC-Fi)이 아니고, 음악감상으로 끝장 보기 위해서 세팅한 건데 단지 컴퓨터가 끼어 있을 뿐이니까 Hi-Fi라고 부르는 게 맞다.
가심비를 잊지 말자. 음악 감상의 영역은 취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방에 끝판왕을 질러도 나에게 안 맞으면 무의미하다. 무리하지 말고 한 걸음씩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가성비도 좋고 재미도 있을 거다. 가성비 좋은 PC-Fi용 스피커와 DAC은 다음 시간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