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한 정보 공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PC나 스마트폰을 켜면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콘텐츠를 저장 장치에 내려받는 행위도 귀찮아 아예 스트리밍으로 감상해버리는 시대다. 지금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환경이 완벽하게 구축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지만 말이다.
▲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을 기억하는가?
1990년대의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PC는 그냥 프로그램이나 게임을 사용하기 위한 기계였을 뿐 별도의 연결 장치가 없이는 다른 사람과 연결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초고속 통신망이라는 개념 역시 실사용 가능한 단계가 아니었고 가격이 저렴한 편도 아니었기에 ‘OFFLINE’이라는 환경이 더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씩 'ONLINE'의 무한한 가능성을 겪어본 몇몇 선각자(?) 들에 의해 이른바 ‘접속’의 시대가 서서히 다가오게 되었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PCI 방식 내장형 모뎀
초창기 ONLINE의 매개체는 전화선이 일반적이었다. 전화선 특성상 Dial-Up, 즉 PC가 전화선을 독점하기 때문에 사용시엔 통화를 사용할 수 없는 구조다. 사용이 끝난 뒤 전화를 끊는 것처럼 OFFLINE 되는 식이었다. 덕분에 부모님, 가족들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을 위해 필요했던 장치가 바로 모뎀(MODEM)이다. ’Modulator(변조기) and DEModulator(복조기)’의 약자에서 따온 모뎀은 PC에서 나오는 디지털 신호를 전화망을 통해 보낼 수 있도록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는 기능과 다른 쪽에서 들어온 아날로그 신호를 다시 PC에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기능을 담당한다.
지금이야 ISDN과 ASDL을 지나 기가 비트급 속도를 자랑하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하면 친절한 설치 기사분들이 알아서 뚝딱뚝딱 셋팅해 준다. 하지만, ONLINE 기능이 전화망에 딸려오는 기본 서비스가 아닌 별도의 부가 서비스 개념이기 때문에 사용을 원하는 사용자가 직접 전화망을 이용한 전화형 모뎀(Dial-up MODEM)을 구입해서 사용해야 했다. 일종의 PC 업그레이드용 부품 같은 개념이었다는 말이다.
1MB 그림 한 장 받는데 1시간씩 걸렸다고?
▲ 1959년 최초로 등장한 모뎀, Bell 101 모델
<이미지 출처 : Historyofinformation.com >
전화 접속 모뎀이 최초 개발된 것은 1959년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이쪽 기술들이 그렇듯(?) 군사용으로의 활용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초당 전송 비트 수(bps)의 경우 조금씩 상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1200bps 또는 2400bps의 속도로 실 사용을 시작했다. 초기 PC 통신 붐이 불었던 90년대 초반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규격은 1984년 탄생한 2400bps(24kbps, 0.3KB/s)였으며, 이후 9600bps(9.6kbps)과 14400bps(14.4kbps), 28800bps(28.8kbps), 33600bps(33.6kbps)를 지나 90년대 중후반에는 57600bps(56kbps)까지 꾸준히 발전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모뎀이 상용화된 이래 일반 가정에서는 주로 외장형을 장착해 사용했다. 폭발적인 성장 속에 대세로 자리 잡은 하드웨어 업체는 U.S Robotics. 56K 시대로 들어오면서 시장을 거의 평정하다시피 했지만. 모뎀 칩셋 제조사들 간 규격 논쟁이 벌어지면서 자충수를 두었다는 평이 많다. Rockwell과 Lucent라는 업체가 K56Flex라는 규격을, U.S Robotics가 X2라는 규격으로 경쟁해 모뎀 시장에 혼란기가 불어왔던 것. 정작 통신 분야의 표준을 책정하는 ITU-T가 1998년 V.90을 표준으로 채택하며 두 진영사이의 전쟁은 그냥 없던 일로 되었다. V.90 규격은 다운로드 7.2KB/s 업로드 4.2KB/s 속도로 이론상 1MB의 이미지 한 장 받는데 143초, 즉 2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14.4Kbps는 10분 정도, 28.8Kbps는 5분 정도였다. 운이 나쁘면 1시간 넘게 걸리곤 했는데, 덤으로 그 시간 동안 집 전화는 먹통이 된다. 또한, 이렇게 파일을 내려받는 도중에 어머니나 가족이 수화기를 들기라도 하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공은 모두 공중으로 사라져버린다. 지금은 너무도 순식간에,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는 통신의 과정이 그 당시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는 걸 기억하며 감사히 사용하자.
ATDT01410! 모뎀이 열어준 PC 통신 전성시대
▲ 01420으로 접속되던 천리안 초기 접속 화면
이 Dial-Up 모뎀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퍼지게 된 것은 이를 활용한 서비스들 덕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서비스들을 ‘PC 통신’으로 불렀다. 이러한 PC 통신들은 데이터베이스 혹은 게시판 서비스의 이용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대부분 텔넷 프로토콜 기반의 서비스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과 같은 4대 PC 통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1985년에 한국데이타통신(데이콤)이 시작한 정보은행(비디오텍스) 서비스 ‘천리안’과 정보 제공 IP에서 1986년에 별도의 서비스로 독립했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 당시 초인기 스타인 김희선씨를 등장시킨 유니텔의 광고
1988년 올림픽에 맞춰 외국인들을 위한 편의성 서비스로 시작했던 이들 PC 통신들은 조금씩 그 편의성에 주목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며 사용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흐름 속 90년대 초부터 PC 통신의 게시판 서비스는 각 유형별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사랑방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한 흐름 속 ‘케텔’은 한국통신(현 KT)에 인수되며 ‘코텔’이 됐다가 한국통신의 비디오텍스 서비스인 ‘하이텔’과 통합되어 ‘하이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리고 비디오텍스 서비스 ‘천리안’은 ‘천리안II’로 개편된 뒤 커뮤니티 중심 서비스인 ‘피시서브’와 통합되어 ‘천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가 진행됐다. 여기에 나우콤의 ‘나우누리’와 삼성SDS의 ‘유니텔’ 등이 가세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PC통신’의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PC 통신은 텔넷 기반이라 UI가 텍스트 중심이었다. 하여 지금 시각에서는 굉장히 촌스러운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랬던가? ANSI의 8비트 기반으로 이른바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했다. 극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끼를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이후 개인이 호스트가 되어 방을 열면 사람들이 접속해 정보와 자료를 주고받는 사설 BBS들까지 등장하고야 만다.
그러나 이런 전성기에도 복병이 존재했었다. PC 통신, 전화선으로 연결되는 만큼 무제한으로 전화를 쓰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한 전화 요금 폭탄이 기다리고 있던 것. 하이텔, 천리안은 그나마 전화 요금이 일반 전화보다 비교적 적게 책정되었으나 사설 BBS까지 영역을 넓히면... 하..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핵폭탄을 맞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편 하이텔의 경우 PC가 없거나 모뎀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단말기가 전화국 등을 통해 보급되기도 했는데 이 기기는 모뎀에 소형 화면, 자판 등이 함께 담겨있는 휴대용 워드프로세서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에 하이텔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이 단말기를 대여해서 사용하거나 단말기가 전시된 전화국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도 중고시장에 가끔 올라오는 게 종종 보일 정도로 많이 보급되었던 기기다.
▲ 현재의 1인 방송 시대를 예견하는 듯한 1997년 1월 6일자 매일 경제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렇게 PC 통신에 빠져든 사람들은 채팅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호회, 팬클럽 등에서 활동을 이어갔는데, 특히 당시 일본 문화의 수입이 금지됐던 90년대에 일본 만화나 영화, 음악들과 관련된 동호회들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소설과 음악, 만화를 창작하는 창작 동호회들도 동인 활동의 큰 거점이 되어 좋은 반응을 얻는 가운데 SF 소설이나 특정 밴드, 힙합을 주제로 하는 일부 동호회들은 인기를 얻고 프로 활동으로까지 무대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 중 사용됐던 ID, 닉네임, 정모, 벙개 등의 용어는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며 커뮤니티 활동에서 꾸준히 사용 중이다.
이야기와 새롬 데이터맨이 없었다면?
이러한 PC 통신을 즐기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도우미가 필요했는데 바로 텔넷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텔넷 터미널 에뮬레이터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과 같은 프로그램이 바로 이 역할을 했던 것들로 DOS 환경과 Windows 환경에서 각각 PC 통신을 위해 빠질 수 없었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경북대 컴퓨터 동아리 '하늘소'에서 처음 만든 ‘이야기’는 처음에 무료로 배포되었기에 빠르게 침투가 이뤄졌으며 이후 큰사람(현 큰사람커넥트)이라는 업체를 통해 상업화가 진행된 후에는 Windows 기반으로 환경이 넘어가는 것과 맞물리며 이전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어 PC 통신의 인기가 사그라들며 큰사람은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인 다양한 통신 관련 서비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야기의 뒤를 이은 건 ‘새롬 데이터맨’이었다. 새롬 기술에서 WIndows 3.1 버전용으로 선보인 것이 시작으로 PC 사용 기반이 Windows 쪽으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특히 자체 웹 브라우저나 마우스 버튼같이 이야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편의 기능을 제공했고 다이얼 업이 아닌 LAN 기반으로 중심이 넘어가는 동안에도 발 빠르게 대처해 PC 통신 이용자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IMF 에디션이나 시각 장애인용 버전 등 다양한 에디션을 내놓은 것도 이 인기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고속 통신 서비스, 그리고 전화 접속 모뎀의 몰락
▲ '유쾌, 상쾌, 통쾌'라는 유명한 카피로 기억되는 Megapass TV-CF
이렇게 PC 사용자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PC 통신은 밀레니엄 시기에 변화를 맞이하게 됐는데, 이는 초고속 통신망의 도입과 시기를 같이한다. 1999년에 대한민국에 일반 전화선을 이용해 고속 데이터 통신을 이용할 수 있는 ASDL의 도입은 음성 전화와 별개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MB급 모뎀의 사용으로 일반 다이얼업 모뎀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빠른 세계를 사용자들에게 보여줬다.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는 추세에 통신사들과 통신 서비스 제공 업체들이 난립하며 경쟁은 격화됐으며, 2010년대 100MB급을 넘어 2020년대 GB급, 10GB급 통신망이 구축되며 사용자들의 눈을 끌었으며 한동안 군용망 등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던 다이얼업 모뎀의 시대는 끝을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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