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우리나라의 보물이자 국민들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들어 PC의 운영체제, 특히 DOS가 영문 위주로 개발되니 조합형 문자인 한글은 구현이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두벌식, 세벌식 한글 키보드 조합이 탄생하고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으로 인해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게 입증되었다.
▲ 1985년 2월 28일 매일경제에 게재된 삼성전자 워드프로세서 광고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현재 워드프로세서는 PC 운영체제에서 구동되는 소프트웨어로 인식되지만, 1980년 중후반까지 워드프로세서는 뒷부분에 프린터가 달린 작은 단말기 형태의 하드웨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워드프로세서는 계산기 액정 같은 작은 LCD 창에 문자를 표시해 줬고, 전자식으로 구동되는 타자기 같은 기계였다. 다단이나 이미지 삽입은 꿈도 못 꾸는 수준이었다.
◎ 한글, DOS에 내리다 ◎
▲ 삼보 보석글 2.0의 스크린샷
<이미지 출처 : DOS 프로그램 저장소>
그러던 와중 1985년에 드디어 삼보에서 DOS용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보석글' 개발해 출시했다. 보석글은 한국 최초로 대중화된 워드프로세서로 기억된다. 사실 T.Maker Research라는 외산 소프트웨어를 수정해 한글화한 것에 불과했지만, 한글에 척박한(?) DOS 환경에서 우리말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이 보석글이 뿌려놓은 씨앗은 1988년 금성소프트웨어주식회사(현 LG디스플레이)의 하나워드로 이어지게 되었고 하나워드는 각종 행정 전산망 워드프로세서로 각광받기도 했다.
▲ 한글 1.5 버전을 DOSBOX 애뮬레이터로 실행시킨 화면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드디어 1989년 4월 24일 한국 PC 시장에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가 출시되었으니, 바로 아래아 한글 v1.0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찬진, 김택진, 김형집, 우원식 씨가 개발한 아래아 한글은 한컴퓨터연구소의 '한글2000'이라는 워드프로세서를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한글2000은 국내 최초 WYSIWYG 방식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텍스트 모드가 아닌 그래픽 모드로 한글을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했으니 한글 v1.0도 당연히 그래픽 모드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체 한글 입력기와 비트맵 방식 한글 폰트를 내장했고 조합형, 완성형 한글은 물론 고어(古語)까지 구현하는 등 상당히 호평을 받은 워드프로세서였다.
▲ 1991년 1월 발표된 아래아한글 v1.5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아래아 한글의 버전이 올라가면서 1990년엔 (주)한글과컴퓨터가 출범되어 직접 소프트웨어를 유통하게 되었고 지금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v1.5 버전도 비슷한 무렵 출시되었다. 아래아한글의 등장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사건이었는지, 등록문화재청은 2013년에 v1.0을 등록문화재 제564호로 등재하였지만, 알고 보니 v1.2 패키지라서 부랴부랴 취소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이 아래아한글 v1.0은 국립한글박물관에서도 수소문 중이라니 집 안 창고나 서랍을 잘 뒤져보자.
◎ 시작은 미비했지만, 점점 창대해지리라 ◎
초창기 한글 1.0대 버전들은 자체 한글 입력, 글자/문단 모양, 선 그리기까지 지원하는 지금 기준으로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맨땅에 헤딩 수준의 노력으로 인해 탄생한 소프트웨어이기에, 그리고 애국심까지 어우러져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아래아한글은 이에 그치지 않고 v2.0대까지 판올림 되면서 획기적인 기능 개선을 시도했다.
우선 외곽선 글꼴을 구현했으며 무려! 표 그리기와 이미지 삽입 기능이 추가되었다. v2.0에야 비로소 우리가 현재 인지하는 워드프로세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v2.5가 발표되던 1994년 6월 24일에는 마치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이찬진 대표가 직접 한국종합전시장에 등장에 브리핑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나고 북한 김일성이 사망했던 해다.
▲ Windows XP에서 한글 3.0b를 실행시킨 모습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하지만, 아래아한글의 근본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운영체제의 변화였다. 유저들의 PC 환경이 마이크로소프트의 DOS에서 Windows로 옮겨가며 아래아한글의 기본 틀까지 송두리째 바꿔야 했다. 1997년 3월 출시된 한글 v3.0은 단축키 위주의 키보드 중심에서 마우스 포인터 중심으로 옮겨갔고, 상단에 툴바를 모아 배치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때 구축된 기본 틀은 훗날 한글 96, 97은 물론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물론 DOS와 OS/2 버전 한글 3.0도 함께 출시되어 다양한 유저 환경을 고려한 것도 잊지 않았다.
◎ 군대 행정병 출신들의 PTSD ◎
▲ 사진만 봐도 쿰쿰한 내무반 냄새가 나는 듯한 군 행정반 풍경
<이미지 출처 : 인터넷 커뮤니티>
키보드 위주의 UI에서 마우스 위주로의 변혁은 일반 소비자들에겐 별다른 혼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의 판올림이나 운영체제를 바꾸기 힘든 행정전산망 시스템이나 군 행정반 환경이었다. 엄연히 처음 국가 행정전산 시스템의 공식 워드프로세서는 앞서 언급한 하나워드였다. 하지만, 아래아한글보다 먼저 나왔고 판올림에 의한 기능 개선이 미비했던 하나워드는 사용자에게 엄청난 불편함을 주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아래아한글의 강력한 기능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편법으로 하나둘 아래아한글이 행정전산망에 진출하더니 어느새 한글 3.0이 아예 군 행정병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덕분에 원래 하나워드의 파일 확장자인 HWP는 아래아한글의 소유(?)로 전환되었고, 군 행정병들의 PTSD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구글링하면 사제(?) 한글 단축키 모음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군대 행정반 신병도 소대고참서열 표와 함께 손바닥만한 단축키 표를 지급받았다고..
<이미지 출처 : blog.naver.com/mylike9392 >
필자의 지인 중 정보작전계원 출신에 따르면 일단 군 행정병은 거의 모든 작업을 단축키로 진행했다고 한다. Windows 버전이라도 혹여나 마우스를 사용했다간 선임에게 뒷통수를 맞는 일이 허다했다고. 하지만, DOS 판도 나오는 한글 3.0이기에 마우스를 사용하지 않아도 모든 작업이 가능했으며, 군대 특유의 내리 갈굼 방식 교육으로 인해 짧은 기간 단축키의 달인이 양성되곤 했다. 참고로 필자는 의무경찰 내근 출신이라 마우스는 자유롭게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군대 행정반 출신 스킬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관용 공문서 양식
<이미지 출처 : data-for-korean-students.tistory.com>
군대 문서는 표에서 시작되어 표에서 끝난다는 말이 있듯이 표 그리기가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었는데, 현재는 표 크기나 분할, 합병을 마우스로 한다. 하지만, Ctrl+N+T를 눌러 표 그리기 메뉴를 불러와 오른쪽과 하단 테두리 두께를 0.4mm로 지정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물론 사단마다, 부대마다 규칙이 다를 수 있으므로 불편해도 넘어가길...) 앞서 언급한 바대로 표 그리기 기능은 아래아한글이 크게 보급되어 대중화되던 v2.0부터 지원하는 기능이다. 제목 칸의 색깔은 연한 녹색이나 노란색 위주.
▲ 딩벳 유니코드 블록 일람표
또한 단락을 나누거나 항목을 나눠 작성할 경우 딩벳기호를 자주 사용했다. 아래아한글에서는 Ctrl+F10으로 딩벳기호를 입력할 수 있었는데, 주로 그림자 깔린 정육면체나 원을 입력했다. MS 워드에서는 기호에서 Wingding으로 들어가 수동으로 입력해야 하는 등 불편함이 있는데, 한글에서는 아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글꼴은 항상 견명조나 견고딕 종류를 사용해야 했고, 흑백 문서가 기본이었으나 강조할 문장, 단어는 파란색 볼딕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대외비나 부대 마크 등의 워터마크를 넣을 경우 Alt+W를 누르고 F를 선택하면 '바탕쪽' 편집 화면으로 전환되는데 거기에 들어갈 문구를 넣어야 하는데, 때에 따라 이미지를 크게 넣을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포돌이' 마크를 크게 20% 투명도로 넣은 기억이 있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확실치는 않다.
◎ 요새는 천덕꾸러기? 하지만 국가대표 워드프로세서 ◎
▲ 개인사용자에 한해 1년동안만 사용할 수 있었던 한글 815버전
<이미지 출처 : 한글과컴퓨터>
이야기가 군대라는 삼천포로 심하게 빠졌다. 하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아래아한글은 한때 애국심 마케팅으로 815버전까지 선보였던 것과는 달리 위상이 많이 바뀐 상태다. 공무원이나 국가 기관에서는 무조건 아래아한글을 써야 하지만, 은행이나 일반 기업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워드를 쓰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호 호환성이 떨어져서 뷰어를 따로 설치하거나 폴라리스 오피스를 이용하곤 한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워드프로세서의 자존심을 굳건히 지키고 한글 사랑을 실천했던 업적만큼은 우리가 알아줘야 하지 않을까? 군대 행정병 출신들의 PTSD를 불러와서 미안한 마음이 무척 크다. 부디 좋은 기억으로만 간직하길...
기획, 글, 편집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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