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품의 소비자 트렌드가 급변하면, 트렌드를 반영하여 새로 나오는 신제품의 가격이 비싸져서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이 손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계식 키보드 시장은 정 반대다. 업체 간 경쟁이 심해지고 중국 정부의 제조업 보조금이 거들어 주면서, 제품의 퀄리티는 상승하는데 '퀄리티 대비 평균 단가'는 오히려 내려간다. 즉, 좋아졌는데 싸지고 있다.
과거에는 20만 원을 줘도 못 구했을 정도의 고퀄리티 키보드가 3~10만 원으로 내려왔을 정도니, 바야흐로 '좋은 키보드를 저렴하게 사기' 딱 좋은 시절이 온 것. 대체 뭐가 얼마나 좋아졌길래 호들갑인지 궁금하다면 아래 본문으로 스크롤을 내려 보자.
1. 대세로 자리 잡은 기계식 키보드, 구입 용도가 다양해진다
(과거) 입력도구
(현재) 인테리어 소품, 타악기, 게이밍 기어
기계식 키보드는 이미 2020년 이전부터 전체 키보드 판매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주류 제품이지만, 2020~2022년까지 3년 동안 점유율 50~55% 사이에 갇혀서 더 이상 보급이 안 되고 있었다. 그러던 기계식 키보드의 시장 점유율이 올해 들어 많이 늘었다.
▲ 키보드 입력방식별 연간 판매량 점유율, 빨간색이 기계식 키보드. 2024년은 1~8월까지
<자료 출처 : 다나와리서치>
위의 표를 보면, 기계식 키보드의 시장 점유율은 55%의 벽에 막혀 있다가 2023년부터 오르기 시작해서 59%를 찍었고, 올해는 무려 67%까지 도달했다.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 점유율 20% 전후를 사수하던 멤브레인 키보드는 올해 14.69% 까지 밀려났다.
키보드라는 물건에 별 관심 없던 멤브레인 키보드 구매자들도 2023년부터는 점차 멤브레인을 떠나서 기계식 키보드로 넘어간다는 것을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기계식 키보드의 점유율이 70%를 넘을 가능성도 있겠다.
▲ 인테리어 소품(디자인), 타악기(타건감 타건음), 게이밍기어(빠른 반응속도) 등의 용도로 쓰인다
한편, 기계식 키보드가 완전한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하는 용도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이제 키보드는 단순한 입력도구에서 그치지 않고 인테리어 소품(데스크테리어, 하우징이나 키캡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김), 타악기(타건음이나 타건감 중시), 게이밍 기어(더 빠른 반응속도) 등으로 세분화하는 모습.
그 중에서도 특히 '디자인이나 타건감/타건음 같은 감성적인 요소'가 최근 기계식 키보드 시장의 성장을 주도한다.
2. 기계식 키보드의 심장 : 스위치
스위치에 진심인 괴짜 브랜드들의 스위치가 커뮤니티에서 인기 얻었다
청축(클릭), 갈축(넌클릭)은 거의 사라지고 적축/흑축류(리니어)가 대세
(1) 기계식 키보드는 체리 스위치만 있는 거 아니었어?
2024년 기계식 키보드 커뮤니티에서는 체리 스위치를 언급하는 비중이 많이 줄었다. 요즘은 체리 스위치를 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가 됐으며, 그 대신 HMX, SWK, BSUN 등이 핫한 스위치 브랜드로 취급 받는다.
새롭게 떠오른 스위치 제조 브랜드들의 특징은 '스위치에 진심'이라는 것. 이 브랜드들은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를 구성하는 부품들의 원료를 다양하게 바꿔가며 연구하고, 내부 부품의 사이즈, 윤활제의 양과 점도까지도 세밀하게 컨트롤한다. 이런 연구 개발 과정을 통해서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소리, 새로운 타이핑 감각을 주는 스위치들을 계속 출시한다. 이들은 스위치의 가격도 체리와 비슷하거나 체리보다 더 비싼 경우도 많다.
체리 MX스위치를 대충 따라해서 저렴한 가격만 강조하고 스위치의 퀄리티 개선에는 뒷전이었던 초창기 스위치 제조 브랜드들과는 딴판이다. 초창기 브랜드 중에는 그나마 게이트론과 TTC가 유행을 잘 따라오는 편.
(2) 2024년 9월 기준, 인지도 높은 스위치 브랜드들
2024년 9월 기준으로는 HMX가 커뮤니티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스위치 브랜드이며, 그 뒤를 SWK, BSUN(비선), Keygeek(키긱), KTT, MZ 등의 브랜드가 따라 붙고 있다. 기존 대형 브랜드 중에는 게이트론, TTC, 체리가 종종 언급 되며, 오테뮤(저소음스위치)나 카일(박스 넌클릭 계열)은 일부 특수한 스위치를 제외하면 언급이 거의 없다.
'독거미(AULA) 키보드'에 기본 장착되어 인지도를 크게 높인 LEOBOG 브랜드도 있다. LEOBOG 스위치는 DIY(커스텀) 키보드 시장에서는 거의 취급을 안 하지만, 기성품 시장에서 독거미 키보드가 워낙 초대박을 낸 덕분에 기성품 기계식 키보드 소비자들에게는 1황급 인지도를 지녔다.
(3) 청축류(클릭), 갈축류(넌클릭 택타일)는 가고, 적축류(리니어)의 시대가 왔다
최근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는 95% 이상이 '누를 때 걸림이 없는 리니어 스위치'다.
돌이켜 보면, 기계식 키보드가 막 보급되던 시절에는 '적축/흑축(리니어)은 걸림 없이 쑥 내려가서 재미가 없다'는 인식이 강해서 고급형은 갈축, 보급형은 청축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제는 기계식 키보드의 설계 수준, 그리고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의 퀄리티가 향상돼 리니어 스위치로도 다양한 타건감, 다양한 타건음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극적인 청축류(클릭), 갈축류(넌클릭 택타일) 스위치들을 사용할 이유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도각도각 바둑돌 같은 소리, 묵직한 저음 ~ 하이톤의 자극적인 소리 등등, 유튜브에서 ASMR로 유명해진 키보드 타건 영상들은 홀리판다*를 제외하면 대부분 리니어 스위치인 것도 큰 영향을 줬을 듯.
*홀리판다(Holy Panda) 스위치는 리니어가 아닌 넌클릭 택타일 타입이다. 내부 기둥의 길이가 긴(롱폴) 스위치 유행을 만든 시초를 홀리판다로 보기도 한다. 2018~2020 사이에 유행
번외 : 요즘 잘나가는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는?
2024년 9월 기준,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 되는 취향별 스위치들
스위치 제조 브랜드가 늘고 그들이 출시하는 제품의 종류도 늘면서, 시중에 유통 되는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는 수십 종(누적으로는 수백 종)이 넘는다. 신제품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에 '대세 스위치'의 순환 속도도 빠르다. 기계식 키보드 커뮤니티를 몇 달만 쉬어도 요즘 어떤 스위치가 유행하는지 캐치하기 어려울 정도. 아래에 소개한 스위치들이 몇 달 뒤에는 한물 간 스위치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1) 밝고 높은 톤의 스위치
HMX 바이올렛 (또는 HMX 히아신스v2, 신하이, 블루 토파즈, 선셋 글림, 덕덕 등)
▲ HMX x WoB 바이올렛 스위치
<사진 : WoB>
HMX x WoB 바이올렛은 'WoB 레이니75' 키보드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치가 됐다. 궁극의 가성비(가격 대비 타건감)로 이름을 날리는 레이니75 키보드의 기본 스위치가 HMX 바이올렛이기 때문. 키압이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손 끝에 달라붙는것 처럼 탄력이 좋은 편이며, 눌렀다가 올라올 때 톡톡 터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타건음의 톤은 보통~높음 사이 정도이고, 바닥을 치는 타격감도 딱 중간 정도로 호불호가 크게 안 갈리는 무난한 스위치다. 만약 바이올렛보다 더 높은 톤의 소리를 원한다면 같은 제조사의 히아신스v2, 신하이, 블루 토파즈, 선셋 글림, 덕덕 등을 선택할 수 있다.
(2) 보통 톤의 스위치
HMX 히비스커스 (또는 젤리, 에바, 파도, 마키아또, 퍼플-던 등)
▲ HMX x SPM 히비스커스 스위치
<사진 : SPM>
같은 HMX이지만 소리의 톤이 상대적으로 낮은 스위치들이다. HMX 기준으로는 톤이 낮지만 다른 브랜드까지 생각하면 완전 저음은 아니고 보통 정도에 해당한다. 커뮤니티나 유튜브에서 '도각도각' 이라고 표현하는 소리를 상상하면 비슷하다.
HMX x SPM 히비스커스가 국내에서 구하기 쉽고 무난한 선택지이며, 그보다 덜 자극적인 소리와 타건감은 HMX 젤리와 HMX 퍼플-던. 그밖에 HMX 에바, HMX 파도, HMX 치즈, HMX 마키아또 등이 비슷한 계열이다. 이 중에서 치즈가 가장 존재감이 강하다. 참고로 HMX 젤리는 SPM 조약돌75 키보드 아이보리 모델에 기본 장착되고 있으나, 아직 스위치는 따로 판매가 안 되고 있다. 판매 된다면 꽤 인기를 끌 수 있을 듯.
(3) 묵직한 톤의 스위치
BSUN RAW 리니어 버전 (또는 SWK 투칸, SWK 고래바다, 게이트론 오일킹 등)
▲ 우유 색상이 매력적인 BSUN RAW 리니어 스위치, 완전 투명한 BSUN RAW는 택타일 버전이다
<사진 : Dvinikey.com>
묵직한 저음을 좋아하는 사용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위치는 BSUN RAW(비선 로우) 또는 SWK 투칸, SWK 고래바다(경해축), 게이트론 오일킹 등이다. 게이트론은 오일킹보다 더 낮은 톤을 지닌 잉크 블랙(구형) 스위치 등도 있었으나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워서 인지도가 높은 오일킹으로 선정.
참고로 요즘 유행하는 저음 지향 스위치들은 소리는 묵직하지만 바닥을 치는 타건감은 경쾌하고 자극적인 경우가 많다. 비선 로우, SWK 투칸, SWK 경해축은 자극적인 맛이 있고, 게이트론 오일킹은 상대적으로 심심하고 키보드 하우징에 따라 체감 차이가 큰 편.
3. 기계식 키보드가 벌크업 했다 : 진화하는 내부 설계
가스켓(개스킷, Gasket) 마운트 대유행, DIY 시장에서 기성품 시장으로 진출
기판/보강판에 각종 튜닝 성행. 타건감, 타건음을 상향 평준화 시켰다
▲ 가스켓 마운트 방식의 대표적인 예
<사진 : SPM>
키보드의 전체적인 구조 설계나 내부 튜닝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이 올라갔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시중에 새로 나오는 기성품 키보드들이 대부분 채택하는 <가스켓 마운트>다. <가스켓 마운트> 방식은 기계식 키보드의 외부 하우징과 내부의 PCB 기판/보강판을 실리콘 재질의 가스켓으로 간접 체결하는 방식이다. 가스켓 마운트 방식을 사용하려면 키보드 내부 구조가 예전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해야 한다.
만약 가스켓 마운트를 쓰지 않고 기판/보강판을 키보드 외부 하우징에 다이렉트로 체결하면 키보드를 칠 때 보강판과 기판에 생긴 진동이 그대로 키보드 전체로 전달되어서 안 좋은 타건감, 타건음이 생길 수 있는데. 가스켓 마운트 방식은 그 중간에 실리콘 가스켓이 있기 때문에 실리콘이 진동을 흡수하고, 더 말랑말랑한 타건감도 만들어 준다. 최소 '평타' 이상의 타건감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스켓 마운트의 장점이다.
▲ (왼쪽) 몇년 전 키보드의 내부 모습. 키보드 내부에 기판-보강판이 전부다.
(오른쪽) 최근 출시되는 키보드의 내부 모습. 타건감/타건음을 튜닝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부에 흡음재, 스펀지, 튜닝용 스티커, 실리콘 등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예전에는 키보드를 분해하면 속이 텅텅 비어있고 기판+보강판(총 2겹)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요즘은 키보드를 분해하면 각종 흡음재와 진동 저감재가 들어 있어서 5겹은 기본이고 7겹~9겹까지 꽉 들어찬 경우도 있다.
이처럼 키보드 내부를 꽉꽉 채울 수록 기복 없이 좋은 소리와 타건감을 내는 편인데, 무조건 100%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흡음재나 흡음 설계는 볼륨을 줄여주지만, 필요 이상으로 내부를 가득 채우면 오히려 소리의 볼륨이 커져서 타건음이 너무 시끄럽다거나, 스위치의 개성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단점도 생길 수 있다.
한편 가스켓 마운트 + 내부 튜닝이 잘 된 키보드가 점차 흔해지다 보니 정 반대의 소리와 타건감을 추구하는 유행도 생겨났다. 요즘 DIY(커스텀) 키보드 커뮤니티에서는 플라스틱 기성품 가스켓 키보드로는 구현할 수 없는 '알루미늄 키보드의 금속성 소리를 활용하는' 하이톤 클래키 사운드 튜닝이 성행하는 중.
4. 기계식 키보드 가성비가 얼마나 좋아 졌길래? '2~4배'
과거 10~20만 원대 키보드보다 요즘 3~7만원대에서 더 좋은 퀄리티 가능
알루미늄 키보드도 10만 원 전후에서 구매
우리나라 일반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풀배열이 없는 것은 약점
결론을 말하자면 기계식 키보드의 가성비는 몇 년 사이에 체감상 2~4배 이상 개선됐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는 고급형 플라스틱 기계식 키보드가 10~20만 원에 달했다. 그런데 당시의 키보드들은 내부가 텅텅 비었고, 기판과 하우징을 연결하는 방식도 기둥 몇 개에 나사를 박아서 고정하는 게 전부였다. 스위치 또한 윤활 처리가 안 됐다.
돈을 쓴 것에 비해 타이핑 경험이 썩 드라마틱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매자들이 그냥 만족하고 쓰거나, 아니면 본인이 직접 땜납제거 후 윤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 키보드 윤활을 대행해주는 윤활 대행 공방이 성행했을 정도.
▲ AULA(독거미) F99 키보드
<사진 : 펀키스 FUNKEYS>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가장 유명한 AULA 독거미 키보드로 예를 들면 해외 직구 시 할인행사 여부에 따라 3~7만 원대, 국내 정식 유통 제품은 6~7만 원대(옵션에 따라 상이함)로 판매 되는데 타건감이나 타건음, 키보드 자체의 마감과 완성도가 높은 건 물론이고 무선 연결까지 지원한다. 윤활이나 스테빌 철심 튜닝 작업은 안 해도 되는 수준.
가격은 절반 이하로 내려갔는데 만족도는 두 배 이상이므로 실질적인 가성비(가심비)는 4배 이상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참고로 독거미 키보드와 유사한 제품으로는 Mchose 브랜드의 K87, iLovbee 브랜드의 B87 등도 있다. 이에 자극 받은 국내 브랜드들도 저렴한 가격대에 키보드 내부 설계를 더 강화한 키보드를 속속 출시하거나 출시 예정에 있다.
▲ 10만 원 전후 고퀄리티 가성비 알루미늄 키보드들
(위 2개) 레이니75, (왼쪽아래) 아콘 HX, (오른쪽아래) 조약돌75
욕심을 더 낸다면 10만 원 전후에서 고퀄리티 알루미늄 키보드를 구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알루미늄 키보드는 WoB 레이니75 이며, 레이니75와 거의 동일한 마이너 변경 모델 <프리플로우 아콘 HX>가 국내 정식 유통 중이다. 아콘 HX는 키캡에 한글 각인이 되어 있으니 한글 각인이 필요한 소비자라면 레이니 직구보다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만약 레이니75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타건감을 원한다면 SPM 브랜드의
글 김진우 / news@cowave.kr
기획, 편집 / 다나와 송기윤 iamsong@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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