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지켜 내고 싶은 기억이 하나 있다.
트랑트무의 기억
시간이 흐를수록 잃는 것이 늘어 간다. 분과 초, 주와 달, 혼과 힘, 또 한 번의 계절, 또 한 명의 사람….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모든 것을 앗아간다. 너무나 정확해 슬픈 소멸이다.
기억은 내가 마지막까지 시간으로부터 지키고 싶은 것 중 하나다. 트랑트무의 기억도 그런 기억이다. 거스를 수 없는 법칙 안에서도 예외란 걸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트랑트무가 그 예외이길, 나는 늘 바랐다.
2년 전, 취재 때문에 프랑스 낭트에 잠시 머물렀다. 관광청 주관의 꽤 큰 이벤트가 열렸던 터라 연일 낭트 전체가 들썩였다. 당시 나에겐 개인적으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좀 있었다. 이렇다 할 묘수도, 대안도 없는 문제였다. 처음엔 머리에서 시작됐다 점점 마음으로 번지더니 나중엔 온몸의 질서까지 바꿔 버린 일이었다. 마침 낭트에서 비즈니스를 끝내고 잠시 틈이 생겼다. 바라는 바는 없었다. 어디든 단순한 곳이면 됐다. 페리에 올랐다.
뱃머리는 루아르강 남쪽으로 향했다. 낭트의 보트 터미널(Gare Maritime)에서 15분쯤 달렸을까. 달렸다는 말도 민망하게 가까운 거리다. 트랑트무 부두에 도착했다. 겨우 15분 새 많은 게 달라졌다. 시간성과 공간성, 거리의 표정, 그림자의 길이, 대지를 이루는 모든 입자들의 성분이, 전혀 다른 주파수의 세상이, 생경했다. 볶아치던 시간은 속도를 얼마간 늦춘 것 같았다. 낭트에선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느라 땅 전체가 뜨끈뜨끈한데, 트랑트무는 조각난 얼음 바위처럼 혼자 덩그러니 동떨어져 있었다. 고독하다기엔 상처가 희미했고, 희망차다기엔 활기가 부족했다. 그 모습이 나와 닮아 놀랐다.
섬이었다고 했다. 도시 개발로 제방이 건설되고 주변 습지가 매립되면서 육지와 연결됐지만, 과거엔 분명 섬이었단다. 19세기엔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고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어부들이었다고. 낚싯줄이 한 동네를 먹여 살리던 생명줄이었을 때의 얘기다. 트랑트무의 몰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낭트의 조선소가 쇠퇴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용 감소, 인구 감소, 생산 감소. 사람들은 떠났고 마을은 잊혀졌다. 많은 것들을 잃기만 했던 시기다. 그러다 1979년에 선착장이 세워지고, 1990년 프랑스의 한 영화 촬영지로 거듭나면서 마을은 조금씩 되살아났다. 지금은 1,700명이 채 안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골목길로 들어섰다. 3층짜리 집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홍수 때마다 침수 피해가 잦아 예전부터 집은 모두 3층으로 지었다고 했다.
1층까지 철렁철렁 차오른 빗물을 3층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물엔 무엇이 뜨고 가라앉았으려나. 시간은 어떤 기억을 침수시키는 건지. 지금 이 순간은 부력이 강한 기억이 될까. 32층 아파트에 사는 서울 시민의 상상 속에선 모든 게 물안개처럼 부옇기만 하다.
땅바닥엔 아이들이 한참 놀고 난 흔적이 낙서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두서없고 엉뚱한, 순수를 모르는 순수가 흘리고 간 자국이었다. 그 낙서를 마당 안의 야자수가 굽어본다. 그러고 보니 집집마다 야자수며 이국의 식물들이 많다. 과거 고위 해군 요원들이 먼 땅으로부터 가져온 일종의 기념품이었는데, 워낙 기후가 온화해 지금까지도 잘 자라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기념’도 ‘일상’으로 만든다. 이국의 식물은 어느덧 고국의 식물이 됐다.
무채색 집은 찾아볼 수 없다. 분홍, 파랑, 주황, 빨강. 엄격한 질서가 있다기보단 기분 내키는 대로 채색한 느낌이다. 놀이처럼, 낙서처럼. 저 스스로 과시하지 않아 이윽고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는 알록달록함이다. 옛 어부들이 선체를 칠하고 남은 페인트로 집 벽을 칠했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모서리가 닳고 결함도 많은, 자유분방한 매력이 있다. 관광객들이 이따금 트랑트무를 찾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국내 블로그 후기 수를 보면 한국인들은 거의 오지 않는 것 같지만). 이탈리아 베니스의 부라노섬이 대놓고 ‘나 관광지요’ 하는 느낌이라면, 여긴 좀 더 은근하다. ‘대단히 내세울 것도 없으니 적당히 둘러보고 가쇼’의 분위기다. 실제로도 ‘적당히 둘러보고 가야’ 여운이 남을 곳이다.
부둣가엔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다. 대부분 루아르강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을 요리하는 곳들이다. ‘팬시하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소박한 멋이 있었다. 가장 손님이 없는 가게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셰프는 오늘 아침 갓 잡아 올린 숭어가 아주 싱싱하다며 열성적으로 메뉴를 추천했다. 전자파를 쐬고 사는 사람의 눈엔 전자파의 빛이 드러나듯, 바다를 오래 응시하고 사는 사람의 눈엔 바닷빛이 물드는구나. 그의 푸른 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접시에서도 바다 맛이 났다.
갈매기가 낚싯배 위를 빙빙 돌았다. 바람이 물결을 훑고 지나갔다. 엉킨 데도 꼬인 데도 없이 참 널널한 풍경이었다. 뭔갈 잃어도 보고 앓아도 본, 그리하여 부쩍 깊어진 얼굴을, 마침내 단순한 민낯을 갖게 된 사람 같기도 했다. 부두로 향했다. 페리가 경적을 울렸다. 먼 곳에서 함성과 폭죽 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러왔다. 다시 축제가 열리는 땅, 낭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2024년, 초가을의 문턱에서 트랑트무를 떠올린다. 야자수와 페인트, 돌바닥과 강바람. 싱겁지만 트랑트무의 기억은 이게 다다. 누군가는 ‘이따위 건 글감도 될 수 없겠다’며 내쳤을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소하고 시시한 기억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삶이 너덜너덜해질 때마다 날 기적처럼 구제해 줬다…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워도, 길고 귀찮은 인생을 사는 데 큰 격려가 돼 줬다. 때때로 기억이 격려 이상으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트랑트무 안에 얽힌 깊고 다정한 개인적인 정경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나의 말투, 행동, 사상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비쳐지곤 했다. 이런 기억들은 나라는 한 인간을 구성하는 데 어딘가에서(어디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어쩌면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뼈와 살을 야금야금 만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건 시간조차도 결코 내게서 앗아갈 수 없는, 최후의 ‘내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 지금의 나에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언젠간 잃을지언정 마지막까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는 것, 그 사실 자체만이 나에겐 중요하다. 그게 전부다.
*세계를 상대로 펼치는 ‘숨은 장소 찾기’. 곽서희 기자의 히든 스폿에서는 블로그 리뷰도, 구글맵 평점도 드문, 전 세계 숨은 스폿들을 찾아냅니다. 지도 위,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가 빼곡해질 그날까지!
글·사진 곽서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