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한 통의 메일로 시작되었다. ‘자판기마다 커피맛이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주제에 마시즘의 심장이 뛰었다고 할까? 그때부터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마시며 달라진 맛의 차이를 답변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기에 가보시면 정말 다른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동네의 자판기 커피 찾기에서, 전국의 자판기 맛집을 찾는 마시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려 79일이라는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마시즘은 독자님과 마시즘이 직접 찾은 전국의 7대 믹스커피 성지다.
01. 서울 동묘 벼룩시장 동묘벅스
- 주민 추천메뉴 : 천원 냉커피&토스트
- 에디터 추천메뉴 : 천원 미숫가루
레트로를 넘어 힙트로가 되어버린 어르신, 젊은이, 외국인의 조합을 볼 수 있는 그곳. 동묘 벼룩시장의 한가운데에는 ‘동묘벅스’라는 애칭의 가게가 있다. 천원 냉커피와 토스트를 판매한다. 지폐를 내면 종이컵에 국자로 커피를 떠주는데 무려 3초 컷으로 커피가 나온다.
왁자지껄하고 뜨거운 시장분위기와 어울리는 반대되는 달콤하고 시원한 냉커피는 열기를 식혀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맛 자체도 종이가 두꺼운 컵을 쓰고, 잘 녹지 않는 얼음을 적게 넣는 등의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한 잔 마시기에 살짝 아까운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괜찮은) 용량은 동묘에 방문한 이로 하여금 계속 음료를 주문하게 만든다.
02. 동두천 소요산 자판기
- 사장님 추천메뉴 : 밀크커피
- 에디터 추천메뉴 : 모카치노
등산에 믹스커피는 경기의 휘슬과 같다. 등산의 끝은 산을 내려오는 게 아니라, 산 아래에 있는 믹스커피를 마셔야 끝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등산객들의 믹스커피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동두천 ‘소요산’에 있는 자판기다. 무려 이곳은 생생정보통과 런닝맨에 나온 ‘방송에서 인증한 자판기 커피 성지’다.
사람들은 이곳의 밀크커피에 대해서 여러 추측을 한다. 소요산에서 내려오는 약수를 사용했기 때문에 맛있는 것이라거나, 사장님만의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막상 사장님을 만나서 물어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청결관리’다. 매점에서 운영하기에 계속해서 자판기 관리를 한다.
밀크커피는 동묘에 비하면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하지만 산속에서 자연의 향을 맡으며 마실 수 있기 때문에 훨씬 향긋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래서 커피를 마시러 등산을 간다고 하는 것일까(물론 나는 진짜 커피만 마시고 왔다).
03. 목포 어민동산 자판기
- 주민 추천메뉴 : 밀크커피
- 에디터 추천메뉴 : 카푸치노
이곳은 목포사람의 만남의 광장이다. 유달산의 ‘어민동산 자판기’다. 목포토박이라면 모두 이곳을 한 번쯤 다녀왔다고 한다. 그때의 기세는 아니라고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카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갔다.
무엇보다 맛이 가장 독특하다. 단골주민의 말로는 밀크커피에 헤이즐넛을 섞었다는데 단순히 달콤한 맛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독특하게 마셨던 ‘카푸치노’에는 시나몬 향과 같은 게 더욱 느껴지고, 자판기에 ‘바나나라떼’까지 파는 것을 보아 맛과 메뉴에 신경을 쓴 자판기임이 분명하다.
04. 경주 김유신 장군묘 입구 자판기
- 추천메뉴(주민, 마시즘 동일) : 밀크커피
목포에 어민동산 자판기가 있다면, 경주에는 ‘3대 자판기(혹은 길다방)’라고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주민마다 꼽는 곳이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곳은 ‘김유신 장군묘 입구’에 있는 자판기다. 마시즘은 3대 자판기를 모두 찾아보았지만 이곳은 정말 전국구 꼽혀도 손색없는 자판기였다.
김유신 장군묘 입구의 자판기가 사랑받은 이유는 이곳이 드라이브 데이트 코스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봄에는 벚꽃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가을에는 낙엽으로 아름다운 이곳 주변은 산책을 하기 딱인 공간이다. 90년대에는 이곳에 내려 산책 후 마시는 커피가 데이트의 마지막이었다고.
커피 역시 산책에 어울린다. 물의 온도가 뜨겁지 않고, 조금 더 달콤한 밀크커피의 맛은 산책을 하면서 바로 마셔볼 수 있도록 한 배려를 보여준다.
05. 강릉 안목해변 자판기
- 주민 추천메뉴 : 헤이즐넛 커피
- 에디터 추천메뉴 : 12곡차
한국의 ‘자판기 커피’의 전성기를 보여주었던 장소는 ‘강릉 안목해변’이다. 사실상 ‘커피의 도시 강릉’으로 불리게 된 단초를 이곳 해변을 둘러싼 50여 개의 자판기들이 만들었다. 당시에는 자판기마다 이름이 있고, 헤이즐넛, 건강차 등 자신들만의 특별메뉴를 만들어 경쟁하였다고 한다.
현재 안목해변 카페거리에는 자판기 대신 카페들이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판기가 있다. 이름도 ‘거리커피’로 운치가 있다. 해변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크고 작은 카페에 간다면, 강릉 주민들은 이곳 거리커피 앞에 차를 잠시 주차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신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추천하는 헤이즐넛이 들어간 믹스커피는 우리가 흔히 아는 헤이즐넛 커피보다 조금 더 독특하다.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맛이겠구나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맛으로만 따지자면 ’12곡차’가 최고였다. 율무차의 완벽한 상위호환 같은 맛이라고 할까?
06. 전주 시외버스터미널 자판기
- 주민 추천메뉴 : 자판기 우유
- 에디터 추천메뉴 : 쑥차
맛의 도시 전주에서 관광객이 아닌 주민인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가맥’과 ‘바게트버거’ 그리고 ‘자판기 우유’를 뽑겠다. 특히 버스기사님이나 택시기사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시는 자판기의 품질은 좋을 확률이 높다.
전주 시외버스터미널 자판기의 우유는 진한 맛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자판기우유와 함께 블랙커피를 뽑아 나만의 카페라떼를 만들 수도 있다. 이른 새벽이나 밤 버스를 기다리면서 마시는 자판기 음료의 낭만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그런데 쑥차가 있다는 것은 이곳을 정말 많이 다녔어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거의 쑥떡을 마시는 것 같은 창의적인 맛이 나는데? 단골인 자판기에도 이렇게 새로움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07. 탑골공원 300원 자판기
- 주민 추천메뉴 : 얼음설탕커피(보통)
- 에디터 추천메뉴 : 얼음설탕커피(단거)
한국에서 물가상승을 이야기할 때 가장 최후의 보루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탑골공원 자판기의 커피 가격’이다. 오랫동안 200원이었던 탑골공원 커피메뉴의 가격이 300원으로 오르는 순간을 다룬 기사가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 세상의 자판기 커피들은 대부분이 500원이라고.
이곳은 지금까지 다녀온 곳들과 다른 분위기가 있다. 일단 시간이 멈춰있는 느낌이고, 어르신이 정말 많고, 자판기는 더 많은 것 같다. 심지어 자판기 안에서 맛을 나누는 게 아니라 기계별로 맛의 차이가 있는 매장도 있다. 자판기가 지켜온 세월만큼이나 이곳의 사람들도 오랫동안 자판기의 단골이었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자판기 매장에는 사장님들이 항상 거리를 청소한다. 또 찾아온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어르신들을 위해 커피를 서비스로 드린다. 마치 카페나 사랑방을 운영하는 것 같은 친절함과 환대가 남아있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커피와 나눈 추억을 찾아서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가 즐겨온 커피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시즘에서 모은 자판기 커피에 대한 영상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요즘 커피’라는 전시에 한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판기 커피만을 가지고도 정말 많은 것을 얻었지만, 우리가 시대별로 정말 다양한 커피를 즐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커피를 마신다. 때로는 잠을 깨기 위해, 때로는 휴식으로, 때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목적도 다르고, 시대마다 마시는 커피는 다르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일상이 녹아져 있다. 과연 여러분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커피와 장소는 어떤 곳에 있을까?
<제공 :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