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명을 골라서 기원 전 석기 시대부터 우주 시대까지 성장시키면서 다른 문명과 경쟁하는 이 게임은, 탐험과 확장, 개발, 말살을 뜻하는 4X 장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시드마이어를 시뮬레이션 장르를 대표하는 개발자로 만들어준 게임이기도 합니다. 특히, 2010년에 발매된 문명5는 우리나라에서 ‘패왕 간디 열풍’과 더불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문명하셨습니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개발자의 이름을 게임명 앞에 붙이는 게임이 거의 없다보니, 요즘 세대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가 그동안 선보였던 수많은 명작들을 떠올려보면 명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보증서 같은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반가운 것은 지난 2016년 문명6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후속작이 드디어 내년 2월에 발매된다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권장 사양이 발표되면서 커뮤니티가 들썩들썩 하고 있네요. 문명과 비슷한 스타일의 경쟁작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역시 장르를 만든 원조의 귀환은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1991년에 처음 등장한 문명은 처음부터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전에 선보인 레일로드 타이쿤을 통해 타이쿤류라 불리는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를 성공시킨 시드마이어였지만, 실제 문명을 소재로,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을 하나의 게임에 담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새로운 시도였으니까요.
다른 게임처럼 전쟁으로 땅 따먹기를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이 부러워할만한 불가사의 기념물을 짓고, UN을 활용해 외교 승리를 거두거나, 뛰어난 과학력을 바탕으로 우주 경쟁에서 승리해서 최종 승리를 거두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게임 플레이로 당시 PC 게임계의 모든 상을 휩쓸면서 전 세계 팬들의 수면 시간을 빼앗아갔습니다. 당시 인공지능이 개판이어서 전략 게임으로 봤을 때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웠다고 하나 현재 문명 시리즈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 1편 때 대부분 구현되었다는 것은 시드마이어의 천재성을 잘 보여줍니다.
게다가 플로피 디스크에 이 많은 것을 어떻게 넣었을까요? 요즘 나오는 게임들은 몇십 기가가 기본인데요! 당시 SKC에서 ‘불가사의 세계’라는 황당한 이름으로 정식 발매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한글화되지도 않았다보니,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게임이 많이 복잡하다보니 영어로 즐기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1996년에 나온 후속작 문명2는 저장 매체가 CD롬으로 바뀌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 시리즈의 모습이 완성된 작품입니다. 시드마이어가 경영진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제작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전작 대비 인공지능이 많이 개선되었고, 그래픽도 쿼터뷰로 변하면서 더 깔끔해졌네요. 당시 게임업계에서 유행하던 실사 영상 덕분에,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도 게임의 재미를 더해줬습니다. 한글화가 되지 않아서 조용히 묻혔던 1편과 달리 당시 유통사였던 쌍용에서 한글화 발매를 해준 덕분에 국내에서도 문명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번역 수준이 다소 아쉬웠긴 했지만, 아마추어 팬들이 힘을 합쳐서 완벽 한글 패치도 내놓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996년에 나왔던 화석 같은 게임이 2010년 이후에 다시 한번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입니다. 지난 2012년에 해외 커뮤니티인 레딧에 문명2의 한 시나리오를 무려 10년 동안 플레이했다는 이가 나타났는데, 게임 속 3991년은 핵전쟁으로 대부분의 땅이 오염됐고, 온난화로 인해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평지가 모두 물에 잠기고, 전성기 인구의 90%가 대기근으로 소멸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얘기할 때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으로 경고를 하는데, 문명에서 실제로 똑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고 하니 난리가 났었네요. 아무런 돌파구가 없어보이는 막장 같은 상황이었지만,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 덕분에 4008년에 미국을 멸망시키고 승리를 거두긴 했다고 합니다.
문명2가 기록적인 판매량을 보이긴 했지만, 그 다음 작품인 문명3가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드마이어가 마이크로프로즈를 떠나 파이락시스게임즈를 설립했고, 당시 문명 보드 게임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던 아발론 힐, 그리고 액티비전과의 판권 소송까지 있었거든요.
그 기간 동안 시드마이어는 문명의 미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알파 센터우리를 개발해서 문명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이크로프로즈에 남은 사람들은 문명 콜 투 파워를 선보였는데, 핵심 개발진들이 빠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보니, 정식 시리즈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네요.
다행스럽게 시드마이어의 품으로 돌아온 판권 덕분에 2001년 발매된 문명3는 오래 걸린만큼, 위인 개념 추가, 문화 승리 추가, 석유 자원 등장, 멀티 플레이 지원 등 더 발전된 모습으로 등장해 문명 시리즈의 게임성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도트 그래픽이었던 전작과 달리 전투 애니메이션이 도입되어 지금 봐도 준수한 수준의 그래픽을 자랑하며, 당시 인포그램 코리아 덕분에 한글 발매되어 한국 이용자들도 어려움없이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확장팩 플레이 더 월드에서는 시리즈 처음으로 왕건이 지도자로 등장하는 한국 문명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아쉽게도 인포그램 코리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다음 확장팩인 컨퀘스트는 발매되지 못했습니다.
2005년 발매된 문명4는 시리즈 중 가장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게임입니다. 아쉽게도 인포그램이 판권을 테이크투에게 넘긴 어수선한 상황이다보니, 국내에는 정식 발매되지 못했지만, 3D 그래픽의 도입과 종교 도입, 주식 회사 등장 등 더 심화된 게임 플레이로 마니아들에게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후 등장한 문명5가 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문명 시리즈 본연의 재미는 문명4가 더 나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문명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임 음악이자, 게임 음악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바바에투가 바로 문명4의 메인 테마 곡입니다.
2010년에 발매된 문명5는 문명 시리즈를 더 대중적인 인기 게임 시리즈로 만들어준 게임입니다. 그동안 문명 시리즈가 마니아 위주로 발전을 해오면서 점점 더 시스템이 복잡해지다보니, 문명4에 이르러서는 초보자들이 아예 접근도 하기 힘든 게임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시스템을 많이 간소화하면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문명4와 너무나도 많이 달라진 시스템 때문에 기존 팬들은 분노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문명5 덕분에 문명 시리즈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인기는 비정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아쉽게 국내 정식 발매가 무산된 문명4와 다르게 2K를 통해 정식 한글화 발매됐으며, 옥수수를 줄 테니 다이아몬드를 내놓으라고 외치고 거절하면 바로 선전포고를 하는 패왕 간디가 인기 밈으로 퍼져나갔고, 지인들이 이 게임을 하더니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며 “문명하셨습니다”라는 유행어까지 탄생했습니다. 확장팩으로 세종대왕이 추가되고, 동해를 EAST SEA로 표기하는 등 한국 이용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콘텐츠를 선보인 것도 인기를 더해준 것 같습니다.
그 뒤로는 송재경 대표가 이끄는 엑스엘게임즈와 손을 잡고 문명 온라인을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이용자가 힘을 합쳐 실시간으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선보였지만, 아쉽게도 하트셉수트의 일러스트만 남고 사라졌습니다.
2016년에 발매된 문명6는 호평받았던 문명5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좀 더 심화된 플레이를 선보였지만, 카툰 스타일로 변경된 그래픽과 좀 더 복잡해진 시스템 때문에, 문명5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문명5 때의 인기가 비정상적이었던 것도 있지만, 문명5 때 처음 문명 시리즈를 시작했던 초보자들 입장에서는 게임이 너무 어려워진 것이죠. 그래도 에픽게임즈에서 무료로 배포한 덕분에 가지고 있는 분들은 많을 것 같습니다.
오는 2025년 2월에 출시될 예정인 문명7은 실제 비율의 모델링으로 구현된 배경과 건축물이 등장하고, 시대가 달라지면 문명을 선택해 바꿀 수 있는 시스템 등 많은 변화를 담았다고 합니다. 문명5 개발진이 독립해서 선보인 아라 히스토리 언톨드 등 경쟁작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게임스컴 때 사전예약만으로 스팀 전 세계 판매 3위에 오르는 등 장르 원조 답게 엄청난 기대를 모으고 있네요. 문명5 때의 인기를 다시 한번 재현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