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드라마에서는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장기간 입원 중인 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식물인간은 심각한 뇌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을 상실했으나 호흡이나 소화 등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활동은 계속하는 이를 말한다. 현실에서는 교통사고 외에도 넘어져 머리를 부딪치거나 고의적인 충격으로 두부를 다치는 경우, 수술 중 뇌의 혈류가 막혀 의식을 잃는 등 여러 원인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말을 걸어도, 뾰족한 바늘로 손끝을 찔러도 일절 반응이 없는 이러한 환자들은 외부 자극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 국제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소개된 한 연구는 뇌 손상 환자의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fMRI)과 뇌파 검사(EEG) 결과를 분석한 결과, 이 중 4분의 1이 사실은 의식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연구진이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무엇일까?
의식 있는 식물인간?
식물인간 상태(Vegetative State)는 또 다른 의학 표현으로 무반응 각성 증후군(post-coma unresponsiveness, PCU)이라고도 불린다. 의료진은 단기적인 혼수상태가 아닌 한 달 이상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환자에게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뇌는 나머지 신체와 다양한 회로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의식이 없는 상태’를 통칭하는 식물인간의 실제 양상은 훨씬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식물인간이라고 진단받았음에도 마치 의식이 있는 듯 행동하는 환자는 흔하다. 어떤 이는 눈을 뜨고 있거나, 호흡하며 쉭쉭 소리를 내거나 기침 소리를 낸다. 심지어 큰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찡그리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다. 절대다수의 식물인간은 진단명 그대로 자신 또는 자신 주변의 환경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아직 살아 있는 다른 뇌의 기능이 외부 자극에 반응한 결과,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연구진은 식물인간의 어떤 상태에 주목한 것일까?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속 병원을 구성하는 의료 연구 기관 매스제너럴브리검(MGB)을 중심으로 한 국제 연구진은 의식 장애 연구가 다루는 ‘인지적 운동 해리(Cognitive-motor dissociation)’ 현상에 초점을 맞췄다. 인지적 운동 해리란, 심각한 뇌 손상을 입고 겉으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어떤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와 같은 인지 과제를 수행할 때 뇌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큰소리에 눈을 찡그리지만, 특별한 의도가 없는 환자와 달리 이들에게는 언어를 이해하고 주의를 유지하는 기능이 아직 남아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행동 지표가 없더라도 말이다.
뇌 영상 데이터가 보여 준 식물인간의 의식
혼수상태, 식물인간 상태 또는 최소한의 의식이 있는 범의식 장애 환자군으로부터 인지적 운동 해리가 관찰된다는 사실은 익히 20년 전 발표된 바 있다. 연구진은 이 현상이 대규모의 의식 장애 집단에 대해 아직 체계적으로 분석된 적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진은 2006년부터 2023년까지 여섯 곳의 연구 기관에서 중증 의식 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수행된 행동 및 과제 기반 fMRI, EEG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러한 연구에서 피험자들은 테니스 치기나 주먹 쥐기, 집 안 걷기 등의 활동을 상상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테니스를 치는 상상을 해 보라’와 ‘상상을 멈추라’는 명령을 15~30초 내외로 반복하며 몇 분간 지속하고, 피험자의 뇌 혈류 움직임과 뇌파가 측정된다. 대규모 데이터 분석 결과, 연구진은 인지 장애 환자 중에서도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 241명 중 60명이 이 지시를 반복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확인했다. 25%에 달하는 이 수치는 인지 장애 환자 중 약 15~20%에게서 인지적 운동 해리가 관찰된다는 기존 연구보다도 더 높다.
숨은 의식을 판독하려는 시도
네 명 중 한 명의 식물인간에게 일명 ‘숨겨진 의식’이 있다는 발견은 임상 현장에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로 ‘식물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식물인간은 행동도 없고 의식도 없다’라는 4분의 3의 확률에 기대어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연구진의 일원인 옐레나 보디엔 메사추세츠종합병원 신경과 교수는 인지적 운동 해리의 가능성을 간과할 때 환자의 생명 유지 장치를 빠르게 떼어버리거나 인지 회복을 위한 집중적인 치료 시기를 놓치는 등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숨겨진 의식’은 인지 장애 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의 또 다른 연구진은 같은 학술지 호에 루게릭병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환자의 뇌 신호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로 읽고, 그의 의도를 97퍼센트의 정확도로 텍스트화한 결과를 발표했다. 생각보다 많은 식물인간에게 숨은 의식이 있다면, BCI 기술로 이들의 뇌 활동을 더욱 정확히 판독할 수 있다면 의식을 표할 수 없는 이들의 숨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언어화되지 않는 뇌의 반응을 포착하고 미지의 신경 신호를 읽어내려는 과학자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글 : 맹미선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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