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에는 숨겨진 또 다른 한옥마을이 있다.
기와를 둘러싼 걸작
어렸을 때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풍속화 한 폭 속으로 쏙 들어가 그 너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극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고퀄리티의 CG(Computer Grapic)가 한몫했는지, 왠지 실제로 그림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 어쩌다 보니 재미없는 어른이 돼 그림 속 세상을 잊고 살다가 올해 여름, 흐릿해진 소년 시절의 작은 꿈을 안동 하회마을 안자락에서 다시금 찾게 됐다.
안동역에서 내려 인솔에 따라 ‘락고재 하회 한옥호텔’에 도착했는데 한옥 호텔이라기보단 하회 마을 안에 숨은 또 다른 한옥마을 같았다. 풍속화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기품 넘치는 기와의 향연에 잠시 조선시대 왕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락고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으니 이렇게 상기되는 것이 당연했다. 안동 락고재는 전통 한옥을 고집하며 15년을 공들였다.
안동과 락고재
’락고재(樂古齋)’는 ‘옛것을 누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2003년, 서울 북촌에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로 문을 연 이후, 두 번째 락고재가 안동에 자리를 잡았다.
두 번째 락고재의 터가 왜 ‘안동’이어야 했는지 락고재 라운지 앞에 서자마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안동 락고재는 안동 하회 마을의 초입에 위치해 있는데, 이 마을은 즐비하게 모여 있는 전통 가옥들과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풍수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지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한국 고유의 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평온한 민속 마을은 락고재를 품기에 딱 알맞다.
안동 락고재는 ‘기와 본관’ 말고도 ‘초가 별관’을 따로 둔 것이 또 다른 매력인데, 초가 별관은 부용대와 낙동강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 보이는 강변길에 위치해 있다. 숙박객들이 청량한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기기 좋아 기와 본관 못지않게 인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5년 정성으로 이은 전통 한옥의 계보
15년간 한 땀 한 땀 안동 락고재를 지어 올린 안영환 회장의 안내를 따라 락고재 기와 본관 이곳저곳을 누볐다. 돌 하나, 기둥 하나에도 정성이 안 밴 곳이 없었고, 그중에서도 안영환 회장이 가장 신경을 기울인 부분은 다름 아닌 ‘차경’이었다. 한지를 바른 창과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맛은 우리네 한옥의 고유한 특징이다. 락고재는 이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한옥들이 서로의 차경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옥의 경사와 배치까지 고려했다. 마침 머물게 된 방이 락고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차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었는데 눈으로 담은 그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침에 잠에서 덜 깬 채로 눈을 비비며 창을 열자 락고재의 고즈넉한 한옥들과 그 위를 감싸는 푸른 산과 구름이 차르륵 펼쳐졌다. 황홀한 풍경을 내려다보며 온몸으로 햇살을 들이키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질세라 침대 머리맡의 다른 창문도 활짝 열어 보았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안 회장의 섬세한 배려에 감동할 수 있었다. 방 내부에 채광이 잘 드는 창과 채광이 들지 않는 창을 따로 배치해 숙면을 원하는 손님들의 기호까지 고려한 것이다.
숙박객의 입장으로 차경을 즐기면서, 안영환 회장이 여기에 오랜 시간 정성을 쏟은 이유를 자연스레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락고재의 세심함은 차경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통 한옥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인조적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숨겼다. 서까래와 기둥, 단청 등으로 삐져나오는 수많은 천장 배관을 절묘하게 가려 한옥 고유의 아늑함을 해치지 않았고, 방 안은 사람이 사는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하지만 옷장을 열 듯 벽에 달린 문들을 하나씩 밀어보니 커피포트부터 냉장고, 간식거리까지 5성급 호텔 수준의 편의시설들이 깜짝 선물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락고재 곳곳에서 가림의 미학을 느끼며 폭신한 침대에 누워 눈도 마음도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담은 방
락고재의 기와 본관에는 20여 채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하회 마을의 민가 양식과는 또 다른 전통 한옥의 멋을 선보이기 위해 궁궐 건축 양식을 본떠 지어진 건물들이다. 특히 부용정, 관람정, 애련정, 연경당, 낙선재를 참고해 창덕궁의 정취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단청을 채색할 때, 화려한 색감을 덜어내고 빛바랜 파스텔톤을 덧칠해 고택의 이미지를 살렸다. 창덕궁이 조선 궁궐 중에서도 후원과 정자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것처럼, 이를 본뜬 락고재도 라운지 앞을 차지한 정자와 후원의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연못에 구름이 비쳐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신비로운 정자는 락고재에서 가장 특별한 곳으로, 실제로 숙박할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신혼부부가 손을 잡고 작은 다리를 건너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꾸며져 있고, 연못 주변 곳곳에 거북이와 두꺼비 등 작은 석상들이 있어 다산의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락고재 방들에 담긴 이야기는 황톳길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주니어 스위트 객실 앞에는 정방형의 정자 ‘애련정’이 놓여있는데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의 이름과 모양을 그대로 따왔다. 왕과 왕비가 이 정자에서 수행비서 없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어두운 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궁궐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연인들을 위한 방들이 정자를 중심으로 마련돼 있다면,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을 응원하는 방도 있다. 바로 락고재의 가장 높은 곳에 독채로 이뤄진 슈페리어룸이다. 예로부터 과거를 중시하는 집안에서는 붓 받침대인 ‘필가’를 닮은 봉우리나 붓 끝을 닮은 ‘문필봉’이 차경에 담기도록 방을 두었다.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 슈페리어룸의 창을 열면 산봉우리들이 물결치듯 펼쳐진 ‘필가봉’의 경관이 한눈에 담긴다. 시원하게 멀리 뻗은 산봉우리들처럼 이곳에 방문하는 수험생의 꿈도 멀리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연의 기운을 듬뿍 담았다.
기와 본관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곳을 찾자면 이름하여 VIP 룸이다. 창덕궁의 낙선재와 연경당 두 건물의 모습을 본뜬 건물들은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대부의 위엄을 뿜어낸다. 대문에는 전주 이씨의 열녀문이 숙박객을 반기고 마당에는 조선 왕족이 키웠던 수석 3점이 장엄하게 놓여 있다. 락고재 자체가 하나의 역사 박물관인 셈.
락고재만의 특별 서비스
락고재는 바깥 조경뿐만 아니라 방 내부에서도 다양한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오래된 도자기, 그림, 서예 작품들이 눈을 돌리는 곳마다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100년 넘은 청자를 머리맡에 두고 잠에 드니, 고미술품의 숭고한 기운에 평소에 꾸던 악몽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화재급의 유물들이 특별한 설명 없이 가구처럼 배치돼 있는 것은 숙박객들이 전통문화를 더욱 친근하게 향유하길 바라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체크인을 하고 궁궐 같은 락고재 곳곳을 둘러보다 방에 들어와 그림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맨발로 황톳길을 밟으면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절 시즌에 맞춰 제사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는 모두 14세기 제품들로, 유림의 고장인 안동의 종갓집 제사를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
락고재에서는 전통문화가 단순한 관람의 대상이 아닌, 함께하는 삶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인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북촌 락고재의 경우 투숙객의 90% 이상이 외국인으로, 다양한 글로벌 여행 미디어에 소개되기도 했다. 락고재는 한국인에게는 옛 선조들의 전통을, 외국인에게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락고재는 전통 건축 기술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안동 한옥학원’을 부설하여 매년 전통 목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락고재의 가치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의 장으로서 K브랜드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높여갈 예정이다.
안동 글·사진=김예린 인턴기자 rinrin@trave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