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는 스위스 산악관광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펼친 곳이다. 1896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3,454m)까지 기차를 운영하겠다는 한 야심가(아돌프 구에르첼러)의 무모한 도전이 16년 후 현실이 된 곳이다. 전 세계에서 한 해 백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이른바 무장애 여행으로 해발 3,500m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 융프라우는 한국 여행시장에도 방점을 찍었다. 드라마 촬영을 연계한 관광 홍보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컵라면’ 하나로 시작한 세일즈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도 꼽힌다.
묻지 않을 수 없었던 안부,
융프라우는 안녕한가요?
아돌프 구에르첼러의 위대한 논픽션 스토리가 여전히 경쟁 중인 서사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사랑 이야기다. 철 지난 드라마를 자꾸 부활시키는 것은 OTT의 위력이고, 성공한 드라마-관광 홍보 사례로, 방문객보다는 융프라우 현지인들에게 더 각인되어 있다.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그래서 수용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이젤트발트 마을에 몰려온 관광객들이 주민들에게는 ‘불시착’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융프라우 정상(해발 4,158m)을 배경으로 스위스 국기를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40분을 기다리는 동안, 진짜 불시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2년 만에 다시 찾아간 융프라우는 믿기 힘들 만큼 맑고, 파랗고, 따뜻했다. 고소증이 올 수 있으니 뛰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청량감에 기분이 가뿐했다.
산악관광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융프라우의 미래가 마냥 밝은 것은 아니다. 계절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기온은 제멋대로이고, 알프스에서 가장 긴(81.7km) 빙하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는 점점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더 녹기 전에 봐야겠다는 열정이 오버투어리즘으로 번지면, 그게 악순환이 될까 걱정이다.
피르스트 산장의 점심 테이블에 마주한 융프라우 레일웨이 그룹의 한국시장 담당자 레모(Remo Käser) 씨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꺼내고 말았다. 지난 여름 혹독한 무더위 앞에서 우리가 느꼈던 그 무력감이 그의 얼굴에도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128년 동안 혁신을 거듭해 온 융프라우 철도가 아닌가. 속도를 늦추고, 적정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은 재생에너지 사용과 자원 순환, 수용인원 조절까지 다각도로 적용되고 있었다. 철도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발전소부터 지었다는 융프라우 레일웨이는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자급자족하고 있다. 또한 이미 수십년 전부터 빙하터널(얼음 궁전)에 들어온 방문객들의 체온을 에너지로 전환해서 물을 끊이고 난방에도 사용해 왔다. 그래서 융프라우요흐에는 난방기가 없다. 생활용수는 눈과 얼음을 녹여 확보해 왔다. 2009년부터 1일 방문객을 5,500명으로 제한해 왔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사전 예약이 꼭 필요하고, 이용객 현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역마다 테마를 부여해 관광객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흩어 놓는 것도 마케팅적 노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융프라우의 자연은 지역 주민과 820명이 넘는 근로자에게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융프라우의 고민은 산만큼 높고, 협곡만큼 깊다.
융프라우의 결정적 순간들
어느새 고공생활에 적응이 됐다. 해발 2,000m급이 자연스럽다. 2,166m 높이에 있는 피르스트(First) 롯지에서 점심을 먹고 트레킹에 나섰다. 가이드 크리스틴은 케이블카 막차 운행까지 시간이 부족할 거라고 경고했지만, 적당히 갈 때까지 가 보자고 했다. 중간에 돌아오면 되니까. 하지만 몰랐다. 그녀의 사전에는 ‘적당히’가 없었다는 것을.
사실 몇 해 전 피르스트에 도입된(집라인, 바이크, 행글라이더를 응용한) 아웃도어 액티비티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결국 트레킹이 모험심을 이겼다. 베터호른(3,690m), 슈렉호른(4,078m), 핀스터아어호른(4,274m) 등 해발 4,000m가 넘는 알프스의 연봉이 선사할 장관이 더 매력적이다. 시간에 쫓기는 2시간의 트레킹, 그 반환점에 있는 것이 바흐알프제(Bachalpsee) 호수다. 2,265m 높이에서 알프스의 봉우리와 빙하를 거울처럼 반영하기에, 오죽하면 별명이 ‘거울 호수’다. 다리가 아니라 팔이 아플 정도로 카메라와 핸드폰은 넣었다 꺼냈다 하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카메라 2~3대와 드론까지 이고 지고 낑낑대며 뒤쳐졌던 인플루언서 사진가의 곡소리도 이 풍경 앞에서 금세 감탄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케이블카를 놓치면 한달 동안 산에 갇히게 될 거라는 엄포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더 빨랐던 것 같다. 피르스트 가을 시즌의 마지막 날,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옳은 선택이었다고.
그날 오후의 대미를 장식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도 마찬가지였다. ‘라우터’는 ‘소리가 큰’, ‘브루넨’은 ‘샘’이라는 뜻이다. 70여 개의 폭포가 흘러내리는 바위 협곡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 바로 라우터브루넨이다. 기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물이 흐르듯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대략 30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슈타우프바흐(Staubbach) 폭포가 보이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폭포 앞에서도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폭포 이면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올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협곡으로 어둠이 쏟아지고 있었다.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곧장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폭포와 멀어지기를 선택한 것이다.
협곡과 마을의 랜드마크인 교회와 폭포를 융프라우를 배경으로 한꺼번에 카메라에 담겠다는 이 원대한 포부는 톨킨이 부추긴 것이다. 라우터브루넨은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톨킨이 작품에서 요정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 ‘리벤델 계곡’의 모델이 된 곳이다(물론 촬영은 알려진 대로 뉴질랜드에서 했다). 19살에 라우터브루넨을 방문했던 톨킨이 이 마을을 잊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쉽게도 사위가 이미 어둑해 사진은 흐릿하게 남았다. 괜찮다. 그럴수록 기억은 더 선명할 테니까.
글·사진 천소현 에디터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스위스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