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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의 탄생 feat.가을 스위스

2024.11.29. 10: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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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어떻게 알프스 여행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스위스를 걸으며 그 이유를 알았다.

로마시대의 중요한 무역로였던 겜미패스
로마시대의 중요한 무역로였던 겜미패스

스위스를 바꾼 패키지 여행

한 무리의 영국 사람들이 스위스를 방문했다. 스위스 여행을 목적으로 교통, 숙박, 식사, 가이드가 모두 포함된 여행상품을 구입한 사람들. 1863년 영국의 토마스 쿡 여행사가 내놓은 이 최초의 스위스 패키지 여행은 스위스 관광의 문을 열었다. 가난한 스위스 산간마을 사람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졌을 상황. 단체 모객으로 비용을 줄인 패키지 여행은 중산층으로 여행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신박한 상품은 스위스 산악지역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꾸준한 관광객의 유입은 철도와 곤돌라 같은 관련 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가 알프스의 관문 국가로 각인되고, 관광이 스위스의 핵심산업으로 성장하는 역사의 서막이 올려진 순간이다. 여행산업에 눈뜬 스위스는 외딴 산간 구석구석에도 철도 네트워크를 연결했다.

걷기, 달리기, 자전거, 스키 등 ‘패스’의 방법은 다양하다
걷기, 달리기, 자전거, 스키 등 ‘패스’의 방법은 다양하다
1863년 최초의 스위스 패키지 여행 참가자들도 겜미패스를 걸었다
1863년 최초의 스위스 패키지 여행 참가자들도 겜미패스를 걸었다

당시 토마스 쿡의 스위스 여행에 참가했던 31세의 영국 여성 제미마 모렐(1832~1909년)의 일지는 100년 후에 발견되어 책(Miss Jemima’s Swiss Journal: The First Conducted Tour of Switzerland)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스위스 그랜드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발레주의 산악지역, 그중에서도 겜미패스(Gemmi Pass)였다. 로마 시대부터 사용됐던 고대 무역로이자 발레주의 주요 계곡으로 가기 위한 통로였던 겜미패스는 마크 트웨인, 레닌, 파블로 피카소 등 수많은 명사들이 걸었던 곳이기도 하다. 검증된 풍광을 약속한다는 뜻이다.


●Trekking
여전히 ‘핫’한 고대 무역로,
겜미패스 트레킹

‘말도 안돼!’ 케이블카가 다우벤호른(2,942m)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여러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거의 수직의 암벽에 사나운 예각으로 그려진 지그재그 길, 그리고 실제로 그곳을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이제 막 겜미패스 트레킹을 시작한 사람들이 능선(935m)을 오르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고, 그 순간 케이블카를 선택한 것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발레주에서 베른주로 넘어가면 언어도, 풍경도 달라진다
발레주에서 베른주로 넘어가면 언어도, 풍경도 달라진다

겜미패스는 발레주의 로이커바트(Leukerbad)에서 출발해 베른주의 칸데르슈텍(Kandersteg)까지 주의 경계를 넘는 8.5km, 3시간 트레킹 코스다. 외출에 신난 개들과 케이블카를 나눠 타고 겜미 롯지(Gemmi Lodge, 2,350m)에 도착하자 강풍이 모자를 후려쳤다. 전날 로이커바트에서 올려다보는 바위산들의 위용이 내내 근사했다면, 역으로 바위산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손바닥만 하여 지구를 내려다보는 우주인처럼 마음을 겸허하게 했다. 이런 강풍에도 삼각대를 펼치고 버티는 야생동물 사진작가들의 열의에 마음을 다잡고, 강력 추천을 받은 고단백 베이컨 뢰스티(감자전과 비슷한 스위스 전통요리)로 연료를 보충했다.

겜미 롯지는 야생동물 사진가들의 아지트다
겜미 롯지는 야생동물 사진가들의 아지트다
다우벤제 호수 옆에서 만난 트레커
다우벤제 호수 옆에서 만난 트레커

다행스럽게도 이후의 겜미패스는 2,200~2,300m 고도를 평탄하게 유지하는 즐거운 산행이다. “어떻게 해도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다”던 고원의 풍경은 황량하고 멋졌다. 기록하고 싶었던 제미마 모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스위스 산장문화를 보여 주는 슈바렌바흐 산장
스위스 산장문화를 보여 주는 슈바렌바흐 산장

감동은 감동이고, 오랜만의 트레킹은 다양한 상념을 이고 갔다가, 내려놓고 오는 과정이었다. 수위가 낮아진 다우벤제(Daubensee) 호수를 지나 피로가 쌓일 때쯤 구세주 같은 산장호텔 슈바렌바흐(Berghotel Schwarenbach)가 나타났다. 1742년에 지어진 산장은 한때 도둑과 살인자들의 소굴이었다고. 산적은 세계 공통의 범죄 장르인 모양이다. 모파상과 코난 도일도 자신의 스릴러 작품에서 이곳을 언급했을 정도. 하지만 오늘날의 트레커들에게는 단비 같은 휴식의 장소다. 핫초코 한 잔의 달달한 만족감을 삼키니 다시 힘이 솟았다.

언어가 다양해 픽토그램이 발달한 스위스
언어가 다양해 픽토그램이 발달한 스위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여러 사람이 베른주에서 발레주로 넘어가면 독일어보다 프랑스어를 듣게 될 거라고 강조했지만, 어차피 다 외국어가 아닌가. 이방인이 체감하는 변화는 풍경이었다. 내내 황량했던 바위산이 상록수와 활엽수로 조금씩 색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도는 여전히 1,900m 이상. 겜미패스의 종착지인 순뷔엘(Sunnbüel)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당연히 케이블카다.

2,000m 고원에서의 휴식

곧바로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칸데르슈텍까지 이동하는 10여 분 사이에 발견한 것은 스위스 여행시스템에 완벽히 적응한 나였다. 초행자의 불안을 날려 버리는 직관적인 정보 전달 방식(그래서 스위스는 픽토그램이 발달해 있다)과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스위스 패스와 앱 하나면 충분한 실시간 교통정보까지. 200년 전 스위스 그랜드 투어가 패키지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위험과 고생 요소가 많았다면, 똘똘하게 진화한 스위스의 여행안내 시스템은 스위스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개인 여행자들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Wellness : spa, wine, lake

겜미패스 트레킹을 기준으로 앞뒤의 일정은, 지금 생각하면 꽤 섬세했던 것 같다. 전날 우리는 바렌의 와이너리에서 환대에 흠뻑 취했고, 오전에는 로이커바트의 따끈한 스파에서 몸을 풀었다. 이렇게 미리 인출한 힐링의 에너지를 원 없이 탕진한 곳이 바로 겜미패스였다. 하산 후 도달한 칸데르슈텍의 호텔은 가까운 맛집이었고, 근처 호수를 찾아 잔잔한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 와인, 온천, 산책이라는 가을 여행의 3요소, 이제 보니 완벽에 가까운 웰니스다.

론강을 따라 발달한 발레주의 와인 산지 바렌
론강을 따라 발달한 발레주의 와인 산지 바렌

Varen Wine
스위스다운 와인을 위하여,
바로니에 와이너리

루가노를 떠나 로이커바트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론(Rhone)강을 만났다. 론 알프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처음 맛본 것은 오래전 프랑스 남부에서였는데, 그 강의 상류인 바렌(Varen) 지역에서 바로니에 와이너리를 만난 것이다.

할아버지를 닮은 3대 경영자 앤디씨
할아버지를 닮은 3대 경영자 앤디씨

스위스 고유 품종을 포함해 40여 종의 포도로, 오직 단일 품종 와인과 유기농 와인을 고집하는 앤디 바로니에(Andy Varonier)씨는 할아버지(Cäsar Varonier)가 1969년 설립한 포도원을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와인 주조를 시작했다. 10년 사이에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자가 되고, 셀럽과 함께하는 요리와 와인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유명해졌을 정도로, 그는 탁월한 마케터이자 사업가다. 잘 나가던 직장을 놓고, 위기에 처한 가업을 이어 받아 브랜드를 일으키는 3세의 성공 스토리에는 포기할 수 없는 동기가 있다. 이를테면 자신을 똑 닮은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잊혀지지 않는 사랑 같은 것 말이다.


Leukerbad
40년을 흘러 고인 온천수, 로이커바트

온천마을 로이커바트의 온천수는 40년의 세월을 응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지대의 암반 사이로 스며든 물은 지상에 도달하는 사십년 동안 미네랄 성분을 함유한 섭씨 51도의 온천수가 되었다.

로이커바트의 온천수는 40년에 걸쳐 산을 내려왔다
로이커바트의 온천수는 40년에 걸쳐 산을 내려왔다

덕분에 로이커바트는 2개의 대형 온천욕장 외에도 호텔마다 스파 시설을 갖추고 있는 온천마을이 됐다. 목욕 가운 차림으로 마을을 활보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리 놀라지 마시라는 것. 화끈하고 매끈한 온천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뭔가 미지근하고 애매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파워만큼은 확실하다.

다양한 자쿠지가 있는 로이커바드 온천
다양한 자쿠지가 있는 로이커바드 온천

2시간 정도는 질리지 않고 놀 수 있는 로이커바트 온천(Leukerbad Therme)은 각 층마다 노천탕과 실내 수영장, 야외 수영장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슬라이더, 사우나, 휴식 공간과 카페테리아 등을 갖춘 온천 테마파크다. 뜨겁지 않으니 수중 체류 시간이 길어지는데, 정확한 매뉴얼대로 작용하는 다양한 버블 자쿠지를 하나 하나 격파할 수 있다. 스폿을 옮겨가며 때로는 허리를, 때로는 다리를, 등과 어깨를 강타하는 물줄기와 정면 승부 하다 보면 많이 얻어맞을수록 시원해지는 요상한 기분에 흠뻑 젖게 된다.


Kandersteg
푸른 호수의 전설, 블라우제

겜미패스 종주 후에 도착하는 첫 마을 칸데르슈텍(Kandersteg)은 설명하기 어려운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보통 경사면에 위치한 스위스 산악마을과 달리 해발 1,200m의 고원 평야에 위치한 칸데르슈텍 마을은 안정적이다.

베른 알프스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칸데르슈텍 마을
베른 알프스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칸데르슈텍 마을

마을은 베른주 산간지역의 관문마을로도 유명하지만, 호수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참고로, 1,480여 개의 호수가 있는 물의 나라 스위스에서 호수 감상은 제주도의 오름 여행처럼,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잡아야 할 기회다. 특히 그 계절이 가을이라면! 칸데르슈텍에서는 곤돌라로 쉽게 갈 수 있는 해발 1,600m의 산정호수 외시넨제(Oeschinensee)와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블라우제(Blausee)가 대기 중이다.

전설에 따르면 블라우제는 소녀의 눈을 닮아 푸르다
전설에 따르면 블라우제는 소녀의 눈을 닮아 푸르다

이번에는 아담한 호수, 블라우제를 선택했다. 호수 둘레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지만 몇 바퀴를 돌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기자기한 풍경이 블라우제의 매력이다. 수면 전체에 가을빛을 코팅하고도 바닥까지 투명하게 비춰 주는 호수에서 여인의 조각상을 발견했다면, 슬픈 사랑의 전설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으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물속으로 사라진 어느 처녀의 이야기. 그녀의 푸른 눈빛을 닮아 이곳은, 푸른 호수, 즉 블라우제로 불리게 되었다.

조각가 라파엘 푸흐스(Raphael Fuchs)의 수중 여인상
조각가 라파엘 푸흐스(Raphael Fuchs)의 수중 여인상

글·사진 천소현 에디터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스위스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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