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아나톨리아. 고대 그리스어로 ‘떠오르다’를 뜻하는 ‘아나톨레’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의 땅을 여행했다.
마음을 데우는 곳
앙카라 하마뫼뉘
“튀르키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에서 만난 어느 튀르키예 소녀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보다 놀라웠던 건 이방인을 향한 주저 없는 살가움이었다. 따뜻한 환영을 받은 곳은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위치한 동네, ‘하마뫼뉘(Hamamonu)’에서다.
‘하맘의 앞’이라는 뜻인데, ‘하맘’은 아랍어 ‘데우다’라는 의미인 ‘함’에서 파생된 단어로 몸을 데우는 장소를 뜻한다. 즉 하맘은 목욕탕, 하마뫼뉘는 목욕탕 앞을 가리킨다. 과거 15세기,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전통 가옥이 모여 있는 동네였는데 유독 곳곳에 하맘이 많이 자리했다고 한다. 그중 일부 하맘은 현재까지도 손님을 받고 있다. 전통 가옥은 카페와 식당, 기념품 가게 등으로 변모했다.
튀르키예 어느 도시를 가건 기시감처럼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홍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적어도 하루에 5잔 이상씩은 필수로 마시는 것 같다. 여름이라고 예외는 없다. 중국인도 한 수 접을 차(茶)에 대한 사랑. 거기에 전통 커피 제조 방식을 고수하는 튀크르 커피까지. 그 뜨거운 연기의 끝엔 따스한 미소가 스민다. 그런 의미에서 시원하게 목욕 후 홍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하마뫼누는 그야말로 튀르키예 어르신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을 터.
그런데 의외로 튀르키예 MZ세대들도 대거 목격할 수 있는 장소다. ‘하제테페 대학교’가 하마뫼뉘와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는 학생들의 발랄함과 카메라 앞에 서서 자길 찍어 달라는 상인들의 호탕함은 여행자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힌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 주는 곳, 앙카라 하마뫼뉘에서 느낀 튀르키예의 첫인상이다.
과거보다 오래된 이야기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아나톨리아는 튀르키예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반도를 뜻한다. 그 중심에는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가 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앙카라를 우스갯소리로 ‘노잼(재미가 없는)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전 같은 포지션이랄까나. 수도라고는 하지만 여행자가 가볼 만한 곳이라고는 튀르키예의 국부로 추앙받는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 멋진 일몰을 보기 좋은 앙카라성, 우리에게나 중요한 한국공원 정도가 전부다. ‘이스탄불’이란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명목상 행정수도 정도로 여겨지는 도시지만, 사실 앙카라의 역사는 이스탄불보다 오래되었다. 4세기까지는 이스탄불보다 인구도 많았다.
그 흔적을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18세기경 앙카라에 터를 잡은 ‘히타이트’를 시작으로 ‘프리기아, 우라르티아, 리디아,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 등 아나톨리아 반도는 각 시대를 풍미했던 국가의 유물을 오목조목 품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토록 아득한 과거를 품은 박물관의 건물도 15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의 여관이었다는 점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68년, 중세~근세 국제 대상들이 머물던 여관을 리모델링 해 꾸민 것이 바로 지금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이다. 아나톨리아에 스친 것은 과거고, 머문 것은 역사다. 이 땅에 머물렀던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아나톨리아 횡단을 시작했다.
시절을 담은 목조 기둥
중세 아나톨리아의 목조 하이포스타일 모스크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서 시작한 아나톨리아 횡단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중세 아나톨리아의 목조 하이포스타일 모스크’를 따라 이어진다. 이 유산은 앙카라를 포함해 아나톨리아 중부의 서로 다른 도시에 건축된 5개의 모스크를 통칭한다. 각기 다른 지역에 자리하는 모스크지만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 무렵에 건축된 셀주크 시대의 모스크라는 점, 외부는 석조로 건축하고 내부는 목조로 건축한 점 등 공통된 특징을 띄고 있다.
모스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모스크 내부를 떠받치는 수많은 기둥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건축된 모스크의 탁 트인 내부와 비교하면 상당히 독특한 첫인상이다. 천장을 여러 기둥으로 받치는 건축 방식을 ‘하이포스타일’이라고 한다. 눈여겨볼 것은 내부 기둥이 모두 목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의아한 점이 있다. 이토록 메마르고 건조한 아나톨리아에서 이렇게 굵고 큰 나무라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과거 아나톨리아는 울창한 숲과 비옥한 토지를 지닌 땅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써는 듬직한 모스크의 목조 기둥을 보며 아나톨리아의 과거를 상상할 뿐이다.
울창한 아나톨리아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뜬금없는 건 모스크 한가운데에 매달린 ‘타조알’이다. 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메카인들로부터 쫓길 당시 동굴에 숨었는데, 동굴 입구에 친 거미줄과 곳곳에 둥지를 튼 비둘기 덕분에 무사히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안식일 예배 전에 거미줄은 치우는 것이 금기시됐다. 놀랍게도 타조알은 벌레와 거미를 쫓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타조알은 거미줄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모스크 전용 세스코인 셈이다.
맛에 취하고 싶다면
아피온카라히사르
아나톨리아 횡단을 이어 가던 중 ‘아피온카라히사르’라는 중소도시를 경유하게 됐다. 다소 긴 지명 탓에 현지에서는 ‘아피온’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이 이름, 왠지 낯설지 않다. 바로 ‘아편’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양귀비에서 채취하는 그 아편이 맞다.
오스만 제국 시절, 이곳은 양귀비꽃 재배를 통한 아편 생산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 후 지명까지 아피온으로 바뀌었다. 20세기에 들어 마약용 아편의 생산은 중단됐지만, 현재까지도 아피온이라는 지명을 유지할 만한 이유가 있다. 현재 아피온은 세계 최대 의료용 아편 생산지이다. 무려 전 세계 의료용 아편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그뿐일까? 환각 성분을 제거한 아편을 식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피온은 가지안테프, 하타이와 더불어 튀르키예 3대 미식 도시로 꼽히는 곳이다. 2019년에 ‘유네스코 음식 창의도시’에 선정된 후, 매년 9~10월경 미식 축제를 열어 올해로 벌써 6회를 맞이했다. 마침 아피온을 찾았을 때,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장은 부스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부스는 아피온을 대표하는 식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스는 아피온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이크발 부스’. 대기 줄이 거의 축제장 입구까지 늘어서 있다. 이크발에선 아피온의 대표 음식인 ‘수죽 되네르’를 맛볼 수 있었다. ‘수죽’은 튀르키예식 쇠고기 소시지로 주로 아침 식사나 케밥에 곁들여 먹는다. 통조림 햄이 연상되는 모양새지만 살짝 매콤하면서 짜지 않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달콤한 꿀과 곁들여 먹는 카이막, 젤리처럼 쫄깃한 로쿰 등이 아피온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참고로 아피온은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그러고 보니 먹고 놀고 쉬기에 모두 좋은, 팔자 좋은 도시다.
돌고, 돌고, 돌고
세마
길고 길었던 아나톨리아 횡단의 마지막은 ‘코냐’였다. 코냐는 튀르키예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코냐가 알려진 데엔 12~14세기 ‘룸 술탄국’의 수도로 번영하며 남긴 유적들의 힘이 크다. 그중 ‘메블라나 박물관’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이슬람 성지로 꼽힌다. 메블라나 박물관 내부는 박물관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종교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무릎 꿇은 사람. 자세는 다르지만, 시선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엔 커다란 관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곳,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라 시인이자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분파인 수피즘의 창시자 ‘메블라나 루미’의 영묘였다. ‘메블라나’는 스승, ‘루미’는 동로마 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룸 술탄국을 의미한다. 즉, ‘아나톨리아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메블라나 루미가 창시한 수피즘은 신과의 합일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이는 ‘세마’라는 독특한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세마는 춤과 음악, 시로 이루어진 수피즘의 종교의식이다. 세마는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바닥에서 진행된다. 하피즈의 코란 암송을 시작으로 몽환적인 음악에 맞춰 ‘데르비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데르비시는 이슬람교 집단의 일원을 뜻하는데 극도의 금욕 생활을 서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을 벌려 우주를 껴안은 후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략 1시간을 내리 돈다. 일반적으로 댄서들이 회전할 때 어지럼증을 예방하고 균형을 잡기 위한 기술인 스팟팅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돌고, 돌고, 돌 뿐이다. 무아지경이다. 데르비시의 치맛자락에서 이따끔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의 황홀경을 대신할 뿐이다.
●아나톨리아에서 반드시 가 봐야 할 곳 3
Spot 1
차탈회위크
차탈회위크(Çatalhöyük)는 코냐에서 동남쪽으로 40km 떨어진 신석기 시대의 도시 유적지다. 당시 아나톨리아의 총인구는 약 7만명. 그중 10%, 약 8,000명이 살았던 대도시였다. 튀르키예어로 ‘갈라진 언덕’을 뜻하는 차탈회위크는 두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동쪽 언덕엔 신석기 시대의 거주지가 남아 있고 서쪽 언덕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이 남아 있다. 1958년 발견 당시 튀르키예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으로 여겨졌으나 1963년 샨리우르파에서 기원전 9,675년 무렵의 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며 그 자리를 내어 줬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Spot 2
고르디온
고르디온(Gordion)은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9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과거 키르기아 왕국의 수도였다. 지명은 프리기아어로 ‘도시’를 뜻하는 ‘고르둠’에서 유래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끊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일화로 유명하다. 202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Spot 3
시브리히사르
시브리히사르(Sivrihisar)는 앙카라와 아피온 사이에 있는 사랑스러운 소도시다. 카펫보다 작고 얇은 러그로 유명하다. 시브리히사르 그랜드 모스크 옆 러그 박물관에서 다양한 러그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러그는 ‘굴뚝 러그’로 시브리히사르 성을 침략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또한 러그는 결혼을 앞둔 여성의 필수품이었다. 러그의 각 문양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여성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사진 최재원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