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에서 암만으로, 암만에서 페트라로.
요르단을 알고 싶단 마음 하나로 사막 위를 가르고 달렸다.
8인승 승합차가 달린다. 덜컹덜컹, 바퀴가 구를 때마다 부연 모래 먼지를 일으킨다. 끝이 안 보이는 거친 황무지. 생명체라곤 이 좁은 차 안에 갇힌 8명이 전부일 것 같은 착각. 생명력이 넘쳐나는 푸른 지구에서 사막만큼 이질적인 공간이 있을까. 창밖에선 저 멀리 모래폭풍이 회오리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희끗희끗한 덤불들만이 미약한 숨결을 내쉰다.
여기는 요르단. 국토의 80%가 사막지대인 나라. 대부분의 중동 국가가 그렇듯, 요르단도 사막 위에 세워졌다. 도심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풍경은 금세 화성 뺨친다. 실제로 <미션 투 마스>, <마션>, <듄> 등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요르단에서 촬영됐다. 일론 머스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마디 건네주고 싶을 정도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마시고 그냥 요르단을 오셔라.
그렇다면, 그런 요르단에서 차로 로드 트립을 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파손된 도로 위로 위태롭게 뒤뚱거리는 차량, 불량한 노면 상태로 인한 타이어 펑크, 포트홀(도로 파임)이 쏘아 올리는 각종 사건 사고…. 뭐 그런 익스트림한 여정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 마침 보이는 풍경까지 이러니 괜한 모험심도 샘솟는다. 나도 그랬다.
요르단은 이웃이 많은 나라다.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중동 국가들과 국경을 공유한다. 그중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간 물자 운송에서 요르단은 중요한 허브 역할을 한다. 요르단이 7,999km의 포장된 고속도로를 비롯한 양호한 도로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 이유다. 세계 경제 포럼(WEF)의 경제 경쟁력 지수에 따르면, 요르단은 세계에서 35번째로, 개발 도상국들 중에선 가장 좋은 도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면, 기사로 써먹을 만한, 도파민 터지는, 기자로서 군침이 싹 도는, 그런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단 뜻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물론 ‘좋은 도로 인프라’ 앞엔 ‘비교적’이란 에어백 같은 방어적 수식어가 붙는다. 요르단의 주요 도로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외진 지역으로 갈수록 포장 상태가 좋지 않거나 관리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특히 산악지대로 들어서면 길이 급격하게 구불구불하고 좁아진다. 근데 여기서 여행자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요르단에서 자동차 여행은 선택이 아니다. 무조건 겪어야 하는 필수의 영역이다. 암만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행지(사해나 와디럼 등)는 대중교통으론 도저히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극단적으로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사방으로 덜컹이는 터프한 승차감을. 구불구불한 창자 같은 꼬부랑길을. 네 바퀴로 부지런히 달려야 겨우 요르단의 몸체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모름지기 점심으로 먹은 만사프*가 턱 끝에서 울렁울렁거려야, 비로소 당신은 요르단에 온 것이다.
*만사프(Mansaf): 베두인의 향토 음식이자 요르단 국민 음식 중 하나. 육수와 향신료를 넣어 지은 쌀밥에 삶은 양고기, 요거트, 채소 등을 곁들여 먹는 요리다.
●DEAD SEA
사해에서 저지른 실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전날 제모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성스러운 요르단 여행기를 털 자른 썰로 시작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여행 첫날부터 사해(Dead Sea)에서 진짜 ‘죽음’을 맛봤다.
해발 -430.5m. 지구상 가장 낮은 고도의 육지. 바닷물보다 약 10배는 더 짠 죽음의 바다, 사해. 이름은 바다지만 사실 서울시 크기만 한 호수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세 국가가 나란히 사해를 둘러싸고 있는데, 워낙 이 부근은 강수량이 적어서 이만큼 큰 면적의 물은 보통 바다라 부른단다. 매일 평균 500만톤의 물이 요르단강에서 사해로 흘러들어오지만, 오직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다. 한번 들어온 물은 영원히 이곳에 고인단 얘기. 그럼에도 사해는 절대 넘치는 법이 없다. 연중 40도까지 육박하는 더위로 인해 물의 상당수가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수분은 증발되지만 광물질만은 그대로 남아 쌓인다. 사해가 무려 34%의 염분 함량을 갖게 된 이유다.
과연 이름대로다. 사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는 거의 없다. 요르단강을 건너온 수중 생물들은 말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고’ 만다. 전신의 수분을 빼앗기고 산 채로 젓갈이 되어 버리는 끔찍한 그들의 말로.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도 생명체다. 젓갈이 되진 않더라도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이를테면 아무리 코딱지만 한 상처라도 사해 물에 닿는 순간,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라는 점. 당연하다. 상처에 대놓고 소금을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물장구나 다이빙은 절대 금지. 차라리 맨땅에 헤딩하는 편이 낫다. 잘못하다 눈에 물이라도 튀면 양파 100개를 갈아서 눈알에 뿌리는 것과 비슷한 통증을 겪게 된다. 그럴 땐 해변가에 놓인 생수통이나 호스를 생명줄처럼 들고 마구 씻어 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그런 사해에, 나는 전날 겨드랑이 셀프 왁싱을 한 다음 입수했다. 그것도 리조트에서 제공된 후진 면도기로. 깔끔한 몸단장으로 사해(와 타인들)에게 예의를 갖추려 했건만. 사해엔 예외가 없었다. 잔뜩 상처 난 양쪽 겨드랑이가 무슨 라이터로 지져지는 것 같더라. 분명 물속인데 지옥불처럼 뜨거웠다. 얼굴이 짭짤한 게, 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일행들이 자꾸만 카메라를 들고 외친다. ‘기자님, 좀 웃어 보세요!’ 나도 웃고 싶었다. 진짜로.
근데 문제는, 세상 어디에도 사해 같은 바다는 없다는 것. 부력은 사해의 마력이다. 엄청난 염분 덕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붕붕 뜬다. 아무리 수영 초보자라도 튜브 따윈 필요 없다. 발을 바닥에 딛고 있기가 어려울 만큼 팔다리가 가뿐해진다. 너도나도 신문이나 책을 들고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을 인증숏으로 남기는 건 이미 여행객들의 오랜 전통이다. 해 질 녘 사해는 또 어찌나 찬란한지. 병 받고 약 받는 기분이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매혹의 바다. 내겐 뜨거운 추억으로 남은, 죽음의 바다.
가성비 최고의 사해 리조트
진기한 볼거리가 있는 곳엔 리조트가 들어서는 게 세상의 이치. 요르단에는 사해를 둘러싸고 숙박 시설들이 여럿 포진해 있지만, 그중 가성비로나 접근성으로나 ‘힐튼 데드 씨 리조트 & 스파’만 한 곳이 없다.
●AMMAN CITADEL
암만 성채
구세계의 크기
도시 전체에 블루라이트 차단 필터라도 씌워졌나. 세상이 온통 노란색이다. 지글거리는 태양빛까지 더해지니 영 몽롱한 것이…, 꿈인 것도 같다. 암만이다.
사해에서 요르단의 수도 암만까지 1시간 30분을 달렸다.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대부분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암만에선 해발 850m에 위치한 암만 성채가 그런 존재다. 성채에 오르면 구시가지가 두루마리 펼쳐지듯 눈앞에 깔린다. 도시의 지배적인 색감은 따뜻한 옐로우. 요르단에서 채굴한 밝은색의 석회암으로 건물 외벽을 지은 탓이다. 밝은색은 열을 반사하는데, 무더운 요르단 기후에 알맞은 현명한 선택이다. 서울에서 8,000km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게 새삼 느껴질 만큼 이국적인 색감이기도 하다. 둘둘 말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원할 때마다 펼쳐 보고 싶다. 그런 욕심이 난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에 로마의 향기가 짙다. 성채에서 내려다보이는 로마 원형 극장부터 그렇다. 기원전 63년경, 폼페이우스 장군의 통치하에 로마인들은 요르단과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그 후 요르단 북부는 서기 1세기에 설립된 로마의 ‘시리아 속주(Roman Syria)’의 일부가 됐다. 로마 통치의 많은 증거들이 오래전부터 훼손돼 왔지만, 요르단에는 여전히 로마 제국 시대의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성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향한다. 여기도 로마다. 덩그러니 서 있는 두 개의 기둥.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지어진 헤라클레스 신전이다. 기둥 뒤편에는 헤라클레스의 부서진 손 조각상 파편이 남아 있다. 로마 영웅의 힘을 상징하듯, 뭔가를 굳게 쥐고 있는 큼직한 손이다. 그가 쥐었던 그 영광은, 세력은, 시간은, 다 어디로 흘러가 버렸을까.
우마이야 궁전(Umayyad Palace) 단지는 성채의 또 다른 명소다. 8세기 우마이야 시대의 행정 중심지이자 주지사의 거주지가 있었던 곳이다. 얼핏 보면 폐허 같은데, 사실 폐허가 맞다. 서기 749년 지진으로 파괴됐고 지금도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과거의 시간. 그 시간을 1,700m 길이의 벽이 둘러싼다. 성채 부지가 수천 년 전엔 요새이자 아고라(상업과 정치를 위한 열린 공간)였음을 알려 주는 증거다. 지금의 벽은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 우마이야 시대를 거쳐 여러 번 재건됐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을 엿들었을, 나이 많은 벽이다. 그가 남몰래 품고 있을 이야기가 궁금해 한동안 나도 무너진 옛터를 맴맴 돌았다. 구세계의 크기를 가늠해 볼 방법은 내게 그뿐이었다.
●DOWNTOWN AMMAN
암만 다운타운
암만의 활기가 모이는 곳
암만의 활기는 이곳에 모인다. 암만 다운타운. 현지인들은 ‘알 발라드(Al Balad)’라 부른다. 암만에서 제일 사람 냄새 나는 곳이자 제일 정신없는 곳이다. 얼마나 복잡한지 알고 싶다면 드라마 <미생>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국의 땅에서 인파를 헤치며 내달리는 주인공 장그래의 아크로바틱한 추격신. 한국 드라마 최초로 암만 다운타운에서 촬영했다.
거리의 모습은 드라마 속 그대로다. 좁은 골목, 온갖 냄새와 소리, 먼지 입은 자동차들. 전통 시장인 수크(Souk)의 중심지라 거리에선 각종 ‘시장다운’ 물건들이 바쁘게 거래된다. 처음 오면 누구나 약간은 벙찌게 되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른 아침에 와 볼 것을 추천. 훨씬 헐렁하고 한갓지다. 늘 반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의 짐짓 점잖은 모습을 본 것처럼, 낯설지만 ‘오호라’ 하는 포인트가 있다. 물론 정오가 되면 다시 원상 복귀가 되지만.
●DRIVE INTO THE DESERT
암만에서 페트라로 향하는 길. 200km, 서울에서 경상북도 구미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3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평생 볼 모래는 다 봤다. 눈을 감아도 떠도 내내 사막이다. 노랗거나 샛노랗거나 누르스름하거나, 그런 땅의 연속. 나중에 화성 여행이 가능해져서 ‘화성 투어 30박 31일 패키지 상품’ 같은 것에 참여하게 되면 이런 풍경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SF 영화용 배경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요르단은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한 나라 중 하나다. 연 강수량이 고작 90mm 정도. 여름 장마철 서울에선 3시간 만에도 내릴 수 있는 양의 비다. 낮에는 무섭게 뜨겁고, 밤이면 무섭게 차가워지는 반전의 땅. 메마르고 척박한 그 대지 위를 모래 바람이 휩쓴다. 하도 바람을 맞아 원래의 색이 퇴색돼 버린 듯한, 닳고 사윈 세상이다. 밟으면 바스라질 것 같은 이름 모를 야생 풀들이 드문드문 푸석거린다. 아무도 없는 황무지 위를 네 바퀴만이 덤덤하게 훑는다.
●PETRA
A LOST CITY HIDDEN IN A DEEP CANYON
15%의 페트라
솔직히 고백한다. 페트라 원고를 쓰기 전, 잠깐 미친 생각을 했다. 에라 모르겠다, 요르단 기사야 어떻게 되든 다 던져 버리고 다음 출장지로 도망쳐 버릴까. <트래비> K팀장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만큼 페트라의 무게가 내겐 무거웠다.
요르단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만인의 버킷리스트. 협곡 속에 숨겨진 고대 도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요르단을 간다고?!’에서 ‘?!’에 내포된 부러움의 근원. 화려한 수식어만큼 너무 많은 단상들이 엉킨 실처럼 페트라 안에 얽혀 있어, 시작점을 찾는 것조차 막막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필자, 페트라에 대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 하려고 한다. 그 이야기가 곧 페트라를 이토록 특별하게 만드는 무언가이자, 페트라를 향한 진실한 경외의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페트라의 역사를 알면 페트라를 90%쯤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무려 기원전 7,000년 전이다. 페트라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시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페트라를 있게 한 장본인은 기원전 350년경에 바람처럼 나타난 나바테아인들이다. 이들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지 않다. 명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몇 가지 문서를 통해 아라비아반도 출신의 유목민들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 어느 날. 그들은 육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 사막 협곡에 도착한다. 주변을 둘러싼 건 험준한 산악 지형. 도시 건설에 이상적인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요새로는 훌륭해 보인다. 그렇게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에 정착했고, 이곳을 무대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나바테아 왕국을 세운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 사이, 나바테아 왕국의 전성기다. 성공의 열쇠는 무역이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아라비아까지의 무역로를 장악했고, 몰약, 장미 기름, 헤나, 유향 등 다양한 향신료와 식물들의 거래를 독점했다. 페트라가 기원전 400년부터 서기 106년까지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이자 주요 무역 허브가 된 경위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으니, 욕심은 생활 그 이상의 것으로 향한다. 부를 축적한 나바테아인들은 본격적으로 도시의 건축물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최신식 건물을 짓기 위해 이집트의 장인들과 건축가들부터 총동원했다. 사암 절벽을 깎고, 내부를 파고, 돌 표면을 절단하고…. 돌을 쌓아 올리는 대신 돌을 통째로 깎아서, 말 그대로 건물을 ‘조각’한 거다. 정밀하고 섬세하게. 건설이 아닌, 예술에 가까운 행위였다. 오늘날 페트라에 지어진 건축물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세워졌다. 여느 명망 높은 대도시처럼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도 지었다. 내세를 믿었기에 1,000개 이상의 무덤도 축조했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페트라가 탄생하던 순간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떠한 번영도 영원할 순 없다. 나바테아 왕국의 성공을 시기한 그리스 제국은 기원전 312년에 페트라를 공격한다. 나바테아인들은 도시를 둘러싼 산악 지형을 이용해 그리스 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나 이후 서기 106년경, 결국 로마 제국에 무릎을 꿇는다. 더구나 이 시기에 해상 무역로가 생겨나면서 무역 허브로서의 페트라의 중요성도 쇠퇴했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다. 악재는 끊이질 않았다. 일련의 지진이 다음 4세기 동안 도시를 급격하게 황폐화시켰다. 그렇게 8세기에 페트라는 모두에게 잊혀진 채 자취를 감췄다. 그로부터 수세기 뒤인 19세기 초.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잃어버린 도시(A Lost City)’는 페트라란 이름으로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까지가 길고 긴 페트라의 역사다. 페트라에 대한 90%의 이해가 끝났다. 나머지 10%는 직접 걸어야 채워진다. 페트라 안쪽으로 들어서면 ‘시크(Siq)’부터 나타난다. 장미빛 사암으로 된 100m 높이의 자연 협곡 길이다. 페트라의 정문 역할을 한다. 근데 그 문, 참 좁고 어둡다. 과연 수세기 동안 페트라가 숨겨져 있었을 법하다. 빨강, 분홍, 오렌지 색조의 사암이 만든 1.2km의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폭이 3m도 채 안 되는 구간도 있다. 그러다 그 길 끝에 느닷없이, ‘그것’이 나타난다. 페트라의 얼굴, 알카즈네(Al-Khazneh)다.
알카즈네는 사암 절벽을 통째로 조각해 만든 왕의 무덤이다. 나바테아 왕으로 재위했던 아레타스 4세의 영묘로 추정되는데,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이다. 외벽의 정교함에 감탄만 터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뭐랄까, 마치 한 가지 일을 오래 해 어떤 경지에 이른 장인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아무리 해도 인력으론 결코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유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카즈네의 벽면을 보며 느낀다.
페트라를 전부 둘러보려면 6시간도 부족하다. 알카즈네 외에도 몇 가지 유적군이 더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원형 극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페트라의 건축물엔 두 가지 암석만이 사용됐다. 사암과 석회암이다. 그런데 원형 극장 안에서는 대리석이 발견된다. 요르단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높이 6m의 화강암 기둥도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로부터 반경 100km 이내엔 화강암 지대가 없다. 당시 사용된 대리석과 화강암은 이집트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떻게 이곳까지 운송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페트라의 물음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워낙 오래 감춰져 있었다 보니 발굴 작업은 20세기 초에 와서야 이뤄졌다.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면적은 도시 전체의 15%밖에 안 된다. 지형이 지형인지라 많은 구조물들이 동굴이나 암벽 속에 숨겨져 있어 발굴 난이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라 바위가 쉽게 침식된다는 점도 치명적이다.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들께 사과드린다. 앞서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다. 페트라를 100% 이해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현생 인류는 표면에 드러난 15%의 페트라만을 겨우 알 뿐이다. 나머지 85%는 여전히 협곡처럼, 바다에 잠긴 빙산처럼, 깊은 미스테리 속에 묻혀 있다. 그들의 존재는 수다스럽지 않다.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마치 한 가지 일을 오래 해, 누구의 관심도 갈구할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른 장인처럼.
역사는 시간에 의해 축조된다. 인간은 역사의 일부지만 시간은 역사의 전부다. 역사는 오직 시간만이 마지막까지 관조할 수 있는 세상의 기록이다. 한낱 개인은 그 기록의 찰나만을 지켜보고 형성했다 사라질 뿐. 페트라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다. 그 해답은 시간만이 알고 있다. 우리에겐 상상만으로 존재하는 그 시간이 페트라에는 있다.
페트라에선 그 어떤 오늘도 어제와 쉽게 작별하지 않는다. 암벽 속 유물들과 협곡의 능선들은 침묵으로 증명한다.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되고, 인생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시간의 세례에도 풍화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뭔가 쌓이는 게 드문, 쌓일 만하면 밀어 버리고 쌓일 성싶으면 없어지는 내 나라와는 다르다. 하늘 위 구름처럼, 올려다볼 때마다 그 모양이 기형적으로 바뀌곤 하는 강남 한복판의 건물들과는 다르다. 태초부터 페트라는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거듭된 세월이 쌓은 역사. 반짝이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그 모든 시간들이 자기 안에 고이도록, 페트라는 그냥 둔다. 그래서 페트라는 위대하다. 이제 15%의 이해가 끝났다.
사해에서 암만을 지나 페트라까지, 차로 수백 킬로미터를 내달렸다. 더 빠르게 다가가면 더 손쉽게 가까워질까 싶었는데. 사람이든 여행지든, 달뜬 마음만으로는 상대를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아직도 나는 요르단을 모르겠다. 사해가 따갑고, 암만이 어지럽고, 페트라가 무겁다. 아무리 달려도 85%의 요르단은 저 깊은 협곡 속에 숨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르단이 어려워 기쁘다. 이 길에 물음표가 많아 좋다. 조각해야 할 단상이, 엉켜 있는 문장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어쩌면 요르단을 모르겠다는 인식 자체가 요르단으로 향하는 진짜 고속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해에 바퀴 네 개가 달린 기분이다. 더 달릴 준비가 됐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요르단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