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이 같아지는 춘분이 왔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의미다. 그런데 노랗고, 분홍 봄꽃을 즐기기도 전에 우리를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울퉁불퉁한 도로의 ‘포트홀’이다. 겨울철 제설을 위해 뿌린 염화칼슘은 아스팔트를 부식시킨다. 그래서 포트홀은 주로 봄철에 생겨난다. 식물이 기지개를 켜는 춘분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서울에서 발생한 포트홀은 2만 3,251건이다. 도로 복구에는 통상 차로 1개를 기준으로 1km에 1억 원이 소요돼 복구 비용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복구 과정에서 상당량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는 문제도 있다. 도로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을 때 선제적으로 복구해야만 한다.
식물의 생식 능력 모방한 재생제
영국 스완지대학교와 칠레 비오비오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식물의 생식 능력을 모방해 아스팔트의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균열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복구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아스팔트 재생제를 개발했다. 연구 결과는 미국화학회(ACS)의 국제학술지 ‘응용재료 및 계면(Applied Materials & Interfaces)’에 게재됐다.
아스팔트 복원을 위한 재생제 개발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 재생제는 멜라민-포름알데히드와 같은 합성수지로 만들어져 유해 화학물질이 누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환경친화적 재생제 개발 시도도 있었지만, 수분에 약해 균열이 발생하기도 전에 녹아버린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연구진은 아스팔트 혼합물 제작 공정의 고온과 고압을 견디는 것은 물론, 아스팔트 수명 동안 내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재생제 개발에 목표를 뒀다.
그러다 연구팀은 식물의 생식 세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식물은 생식 물질을 포자나 꽃가루와 같은 견고한 입자 내부에 담아 운반한다. 자외선이나 산소, 습기, 외부 충격 등 다양한 악조건에서도 안전하게 생식 물질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들 입자는 황산에도 녹지 않고, 고온고압 상태에서도 수만 년 보존된다. 프란시스코 마틴-마르티네스 영국 킹스갈리지런던 박사는 “나무나 동물은 상처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자체 생물학 시스템을 통해 자연스럽게 치유된다”며 “자연에서 관찰되는 치유 특성을 모방해 스스로 치유하는 아스팔트를 만들면 도로의 내구성이 높아지고, 균열 보수를 위한 인력도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포자나 꽃가루의 막을 튼튼하게 만드는 주성분은 ‘스포로폴레닌’이라는 단백질이다. 스포로폴레닌은 ‘유기체의 다이아몬드’라 불릴 정도로 단단해 플라스틱 대체제로도 주목받는다. 연구진은 이 스포로폴레닌을 아스팔트 재생 물질을 담을 캡슐로 선택했다. 스포로폴레닌은 구멍이 송송 뚫린 다공성 구조를 지녀, 물질을 담았다가 방출하기 유리하다. 그리고 내부 재생 물질도 더 친환경적인 물질로 대체했다. 전 세계 도로 표면의 약 95%는 가열아스팔트혼합물이다. 여러 혼합물을 묶는 역할을 비투멘(Bitumen, 역청)이 한다. 비투멘은 석유의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물질로 지속 가능하지는 않다.
연구진은 비투멘 대신 마트에서 구입한 해바라기유를 스포로폴레닌 캡슐 속에 담았다. 이렇게 만든 새로운 재생 물질은 머리카락 한 가닥의 두께보다 작았다. 아스팔트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스포로폴레닌 캡슐이 터지면서 내부의 해바라기유가 반출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한다. 실험 결과, 연구진은 약 50분 만에 아스팔트 샘플의 균열이 스스로 완전히 복구됐음을 확인했다. 균열의 폭은 시간이 따라 좁아졌으며, 복구 효율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좋아졌다.
연구를 이끈 호세 노람부에나-콘트레라스 칠레 비오비오대 교수는 “지역 자원을 이용해 ‘자가 치유 아스팔트’를 생산할 수 있으므로, 석유 의존도가 낮아 석유 기반 아스팔트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에 특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현재는 갈조류에서 추출한 생체고분자나 재활용 식용유, 수명이 다한 타이어로 자가 치유 아스팔트를 만드는 후속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연구에는 숨은 공신이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비투멘과 같은 복잡한 유기 분자는 원자 수준의 시뮬레이션이 어려웠다. 연구진은 구글 클라우드의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비투멘의 구조와 아스팔트에 균열이 생기는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라인 벌게스 구글클라우드 UKI 공공 부문 리더는 “앞으로는 구글 클라우드의 제미나이(Gemini)나 버텍스 AI(Vertex AI)를 포함한 AI 도구의 힘을 활용해 보다 효율적으로, 새로운 화학적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 권예슬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유진성 작가
<저작권자 ⓒ 과학향기(http://scent.ndsl.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