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힌지드(Unhinged)는 사소한 경적 시비가 살벌한 보복 운전과 잔혹한 살인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로튼 토마토)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아이를 태우고 학교로 향하던 레이첼(카렌 시스토리우스)은 신호등 앞에서 머뭇거리던 대형 픽업트럭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린다. 그 트럭에는 지난밤, 전 아내와 그녀의 새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톰 쿠퍼(러셀 크로우)가 타고 있었다.
쿠퍼는 처음엔 정중하게 사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레이첼이 냉소적으로 반응하자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이어지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보복 운전과 살인 행각이다. 영화 언힌지드(Unhinged, 2020)는 단 두 번의 경적과 한 번의 사과 거절이 어떻게 인간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일상 속 균열이 얼마나 쉽게 극단적인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언힌지드는 불안정하고 조절이 안되는 상태다. 하지만 이런 보복 운전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제 도로 위에서도, 특히 상대가 여성 운전자이거나 경차 등 비교적 얕잡아 보이는 차량일 경우, 보복 운전의 강도는 더욱 심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 운전자들은 도로에서 위협을 받을 때 상당한 공포와 함께 무력감에 위한 분노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토헤럴드 DB)
여성 운전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세계 여성 운전자의 권리를 알리는 세계 여성 올해의 차(Women’s Worldwide Car of the Year, WWCOTY)는 전 세계 47개국 여성 운전자 187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이 같은 현실을 조명했다.
조사 결과는 세계 여성 운전자의 날(International Women Drivers' Day, 6월 24일)을 맞아 발표됐으며, 체코의 온라인 매거진 Žena v autě.cz와의 협업으로 진행됐다. 여성 운전자들이 도로 위에서 느끼는 감정과 경험, 사회적 인식 등을 온라인 설문 방식으로 다각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응답자의 95%는 도로 위에서 타인의 공격적인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51%는 “매우 자주”, 31%는 “꽤 자주” 그런 상황을 겪는다고 답했다.
공격적 행동의 구체적인 예로는 뒤차가 바짝 붙어 달리는 위협 운전(15%), 무리한 추월과 경주 운전(15%), 신체적 위협(15%) 외에도 손가락 욕설이나 고성 등 언어적 모욕(13%), 불필요한 급브레이크(12%), 경적이나 상향등의 남용(11%) 등이 지적됐다.
WWCOTY 설문 조사에서 여성 운전자의 95%가 운전 중 보복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WWCOTY)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성 운전자들은 분노(39%), 긴장(34%), 공포(14%), 혹은 무관심(14%) 등의 감정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또한, 여성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도 여전히 뿌리 깊다. 여성은 주차를 잘 못 한다는 인식이 46%로 가장 많았고, 느리게 운전한다(21%), 핸들에 너무 가까이 앉는다(14%) 등의 편견도 여전하다.
WWCOTY 측은 “운전은 여성들에게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길”이라며, 모빌리티는 여성의 자유, 자립, 그리고 직업적 기회를 확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여성 운전자 기념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의 운전이 처음으로 허용된 날인 6월 24일을 기념해 제정된 날이다.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분노는 깊은 숨 몇 번, 단 3초의 여유로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 언힌지드의 살벌한 보복 운전은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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