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가속과 감속이 이어지면서 부하가 유동적인 주행 환경에서 전기차 배터리의 수명이 더 연장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내연기관차는 내구성 저하 그리고 연료 효율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급가감속 등 불규칙한 주행 패턴이 전기차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기차(EV) 배터리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오래 간다는 통념을 뒤흔드는 연구 결과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와 SLAC 국립가속기연구소 배터리센터가 발표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적당한 다이내믹 주행'이 오히려 EV 배터리 수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구진은 “전기차 배터리는 가속과 감속이 반복되는 도시 주행이나 급가속처럼 부하가 유동적인 주행 환경에서 더 오래 버틴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동적 방전(dynamic cycling)'을 적용한 배터리는 일정한 속도로만 달리는 배터리보다 수명이 최대 38% 더 길게 나타났다. 실제 주행 거리로 따지면 최대 약 3만 14000km에 해당하는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연구팀은 과거 내연기관차가 카본 찌꺼기나 엔진 성능 저하로 거칠게 작동할 때 고속으로 엔진을 돌려 이물질을 제거하는 ‘이탈리안 튠업’이 효과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연료를 태우지 않는 EV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에서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
EV 배터리는 일정한 부하로만 운행하는 것보다 도심 주행처럼 다양한 속도 변화, 급가속, 회생제동 등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내부 화학 반응이 더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전극 손상도 덜 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기는 하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실제 효율성이 입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는 총 92개의 상용 배터리 셀을 2년에 걸쳐 다양한 조건으로 방전하면서 진행됐다. 고속도로 주행처럼 일정한 속도로 전력을 소비한 그룹과, 급가속·도심 정체·회생제동 등 다양한 부하를 시뮬레이션한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그 결과 후자가 월등한 수명을 보여줬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와 SLAC 국립가속기연구소 배터리센터 연구에 다르면 '동적 방전(dynamic cycling)'을 적용한 배터리는 일정한 속도로만 달리는 배터리보다 수명이 최대 38% 더 길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오토헤럴드 DB)
특히 C/2 속도(2시간 동안 완전 방전하는 속도)로 방전할 경우 다이내믹 주행 셀은 1600회 이상의 완전 충·방전 등가 사이클(EFC)을 기록한 반면, 일정한 전류를 유지한 셀은 1400회를 넘기지 못했다. 저속 방전(C/10)에서도 이 차이는 유지됐고 모든 조건에서 다이내믹 주행이 더 나은 결과를 보였다.
연구진은 배터리의 성능 저하를 측정할 때, 전체 수명 중 ‘가장 빠르게 성능이 떨어지는 초기 구간’을 주목했다. 이후에는 고전압 상태에서 양극의 불안정성과 저전압에서 음극의 용량 감소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일정한 전류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고속도로 주행이 오히려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자극한다는 점이다. 반면, 다이내믹한 주행은 충방전이 불규칙하게 이뤄지면서 전극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킨다.
그렇다고 ‘EV는 막 밟을수록 좋다’는 식으로 오해해선 곤란하다. 핵심은 ‘가혹한 주행’이 아니라 ‘다양한 주행 조건’이다. 도심 정체, 신호 대기 후 급출발, 회생 제동 등 다양한 환경이 반복되는 혼합 주행이 EV 배터리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스탠퍼드 연구진은 “가속은 해도 되지만, 무조건적인 고출력 주행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는 소비자뿐 아니라 제조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일반적인 배터리 내구성 테스트는 대부분 일정 전류 또는 속도를 유지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은 그런 테스트가 실제 소비자 주행 패턴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배터리 수명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배터리의 수명 연장을 위해서는 ‘다양한 리듬의 주행’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오늘도 지정체가 반복되는 출퇴근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당신의 EV 배터리는 그 사이 젊어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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