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가 지난해 12월 열린 마이애미 아트 위크에서 공개한 콘셉트카. (재규어)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영국 프리미엄 브랜드를 대표했던 재규어가 끝모를 나락에 빠졌다. 한때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재규어는 지난 4월 유럽 시장에서 단 49대를 판매하는 데 그쳐 전년 동기(1,961대) 대비 무려 97.5% 급감했다.
2025년 1월부터 4월까지의 누적 판매량도 2665대에 불과해 전년 동기 대비 75.1% 줄었다. 5월과 6월 실적은 아예 공개조차 되지 않았다. 글로벌 기준으로도 연간 판매량이 2만 6862대(FY24/25)로 2018년 18만 833대에서 85% 이상 급락했다.
재규어의 판매 급감은 2024년 11월 단행된 갑작스러운 ‘리브랜딩’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재규어는 당시 브랜드의 상징이었던 전통적인 성능과 디자인 유산을 내려놓고 돌연 초고가 럭셔리 전기차 브랜드로의 전환을 선언해 충성 고객은 물론 업계 전반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재규어는 ‘Copy Nothing’, ‘Live Vivid’와 같은 감성적 마케팅 슬로건과 함께 핑크 컬러의 젠더리스 콘셉트 모델, 미래지향적인 신규 로고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들에게 오히려 혼란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론 머스크조차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여기에 재규어는 내연기관 모델을 사실상 전량 단종시키고, 2025년 말 출시 예정인 전기 GT 모델(약 20만 달러)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 사이 딜러들은 쇼룸에 전시할 차량조차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고급 감성'을 강조하며 라인업을 재정비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팔 차가 없는’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재규어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새 로고와 레터링. (재규어)
재규어의 추락은 리브랜딩 전략이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이 됐다. 소비자와 시장에 제시할 제품이나 전략 없이 감성 중심의 마케팅과 전통 가치를 무너뜨리는 급진적 변화, 그리고 충분한 준비 없이 선언한 전동화 전환은 결국 100년이 넘는 브랜드 유산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BMW와 아우디, 메르세데스 벤츠 등 주요 경쟁 브랜드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기차 전환을 유연하게 추진한 것과는 비교되면서 재규어 경영진의 무능을 꼬집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재규어의 한 유럽 딜러는 “고객을 설득할 수 있는 제품도 없고, 브랜드 방향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본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털어놨다. 또 다른 딜러는 “재규어는 예전처럼 매력적인 브랜드가 아니라, 이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브랜드가 됐다”고 지적했다.
현재로서는 2025년 말 출시 예정인 전기 GT 모델의 성공 여부가 재규어의 재도약을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고가 전략과 정체성 혼선, 신차 공백이 지속된다면 재규어는 다시 일어설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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