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그 이후, 경상북도 영덕으로 향했다.

오늘 영덕으로 여행 가는 이유
2025년 3월22일,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시작된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은 수많은 지역민의 삶터와 일상을 순식간에 앗아 갔다. 인접한 영덕군의 피해도 막심했는데, 주택 2,200여 채가 소실되고 주민 3만7,000여 명이 대피했다. 나의 외가가 산불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주택 중 하나였다. 다행스럽게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시간이 담긴 외갓집이 타들어 가는 영상은, 당시 내겐 너무 벅찬 충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산불 이후 전국에서 적극적인 복구 지원이 이어졌다. 영덕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노물리 마을’은 피해 복구가 아닌 ‘해양관광마을’로 재건된다고 한다. 참 오랜 시간이 걸릴 터, 지역 주민들도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란다. 그러나 최근 이 지역 주민들의 근심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관광이 끊기며 지역 경제가 맥을 잃었기 때문이다. ‘불난 곳에 여행을 가도 괜찮을까, 혹시 피해 주민에게 민폐는 아닐까, 그나저나 볼거리가 남아 있을까’ 같은 우려. 물론 배려 섞인 걱정은 영덕의 손녀인 내 마음에도 피어올랐다. 그래서 직접 그 피해를 바라보고, 현재의 모습을 알리고자 영덕으로 향했다.

영덕의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산불의 피해가 가장 직접적이었던 노물리 마을부터 둘러보았다. 노물리 마을은 주황색 지붕과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작고 평범한 해안 마을이다. 마을 이름인 노물(老勿)은 ‘늙지 않음’을 뜻하는 장수의 의미인데, 예로부터 노물리에는 유독 장수하는 어르신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노물리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돌미역’과 ‘월월이청청 벽화’다. 특히 노물리 마을 입구 벽면에 가득 그려진 ‘월월이청청’은 영덕 고유의 민속놀이인데, 그 유래지가 바로 노물리 마을이다.
현재 노물리 마을은 아직 그날의 아픔을 전부 털어 내지 못했다. 은은한 탄내와 검게 그을린 건물, 그뿐만 아니라 토양마저 타 버려 마치 검은 마을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길이 스친 가드레일은 마치 종잇장처럼 쪼그라들어 있다. 화마가 한바탕 휩쓸고 간 터전이 아무리 검고 초라하더라도, 주민들의 삶은 여전하다. 손님을 받아야 할 식당과 펜션이 대부분 불타 버렸지만, 전기와 가스가 들어오는 몇몇 식당들은 영업을 재개했다. 화염이 집어삼킨 집과 창고를 각자의 가슴 한켠에 묻어 두곤, 살아남은 물옷과 그물을 챙겨 바다로 나선다.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것도 필요 없다.
다만 깨어 있고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
‘타일러 라쉬’의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중에서
■ 숲의 안락함
벌영리 메타세콰이어길
검게 그을린 영덕에도 여전히 푸른 여름이 있었다. ‘숲이 무사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영덕 벌영리 메타세콰이어길에 도착해 한시름 놓으며 생각했다. 벌영리 메타세콰이어길은 경상북도에서 자랑할 만한 숲길이다. 우리나라에 길의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심긴 곳은 많지만, 벌영리처럼 그야말로 숲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벌영리 숲 전체 규모는 무려 66만 평방미터(약 20만평)에 달하는데, 곳곳에 벤치가 있어 잠시 앉아서 쉬어 가기도 좋다. 편백 숲과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도 있다.

이토록 큰 숲은 정말 놀랍게도 국가나 지자체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다. 영덕 지역민인 ‘장상국 선생’이 나무 심기를 삶의 낙으로 여긴 어머니의 추억을 보존하고자 20여 년간 손수 일군 개인의 숲이다. 한 사람의 관심으로 가꾼 숲이라니, 이 녹음이 더욱 경이롭게 느껴진다. 유료일 법도 한데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점도 놀랍다. 벌영리 메타세콰이어길은 축산항과 고래불해수욕장 사이 딱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해변 쪽이 아닌 내륙 쪽이다. 오랜만에 가니 주차 공간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없던 화장실 건물도 새로 생겼다.
그래도 여름이 오기는 하는구나, 싱그러운 연두색 잎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긴장한 마음을 부드럽게 안아 줬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약 20m 높이의 나무들은 고개를 자연스레 위로 젖히게 만든다. 일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새의 지저귐과 이른 낙엽에 사각이는 발소리는 참 청량한 자극이다. 이 숲을 이웃에게 대가 없이 내어 주다니. 여름을 이겨 내는 힘은 초록에서 온다. 산불을 걱정해 영덕으로 왔지만, 이곳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푸르렀다. 영덕에는 여전히 푸른 여행이 있다.

Editor’s Pick
오션뷰 대게 파스타, 베르데 레스토랑
베르데 레스토랑은 고래불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탁 트인 바다 전망과 쾌적한 좌석 배치를 자랑한다. 다양한 품종의 와인이 진열장에 있고, 칵테일과 커피 메뉴가 있어서 식사 후 간단하게 2차까지 즐겨도 좋다. 추천 메뉴는 역시 대게 파스타. 겉으로만 봤을 때 일반 로제 파스타와 유사하지만, 부드러운 로제 소스에 대게 살이 가득 들어 있다. 면만 빙그르르 돌려 먹기보다는 소스도 가득 덜어 함께 먹어야 한다.
■ 바다의 청량함
고래불해수욕장
벌영리 메타세콰이어길이 생기기 전, 영덕은 오직 바다의, 바다에 의한, 그리고 마침내 대게를 위한 지역이었다. 바다 옆 바다. 푸른 동해는 여전히 영덕의 자랑이다. 영덕에는 이처럼 빼어난 동해안 절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영덕 블루로드’다. 이 트레킹 코스의 길이는 무려 64.6km. 그 사이사이 얼마나 많은 해수욕장이 존재하겠는가. 이 많고 많은 해변 중 꼭 한 곳만을 가야 한다면 그 어떤 고민 없이 이곳을 꼽겠다.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드는 해변이다. 맑은 날에 어김없이 더 빛나는 바다가 나를 유혹해 해안선까지 다가가게 만든다. 새하얀 신발 위 금빛 모래 축축하게 수놓았지만, 상관없다, 예쁘니까. 영덕의 손녀가 꼽은 영덕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고래불해수욕장’이다.

고운 백사장은 햇빛에 반사될 때마다 이따금 금빛으로 보인다. 바다라면 뜨거워도 좋을 계절, 바다의 숨소리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다면 아주 길게 뻗어 있는 모래사장을 따라 맨발로 걸어도 좋다. 푸른 바다 저 너머에서 큰 고래 구조물이 서 있다. 과거 이곳에서 고래를 보았다는 기록이 발견되며 ‘고래불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됐다. 여름이 되면 수심이 얕은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족 단위 피서객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송림이 만들어 주는 그늘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고래불 국민야영장’은 더욱 인기다. 위치에 따라 바다가 보이고, 여행자를 둘러싼 풍경은 온통 초록색이다. 숲속야영장, 캐러밴존, 오토캠핑장으로 나뉘어 있고 바닥분수와 어린이 물놀이장도 있어 아이들도 즐겁게 놀 수 있다.
고래불해수욕장만의 또 다른 포인트. 하늘색, 파란색, 흰색…. 청량함이 가득 칠해진 방파제는 누군가의 알록달록한 포토존이 되어 준다. 날이 흐려도 맑아도, 늘 푸른 영덕의 바다를 선물하는 풍경이다. 이 방파제를 따라 산책하며 용머리공원 앞에 있는 바다도 함께 즐겨 보는 것을 추천한다.
■ 드론 촬영의 성지
삼사해상산책로
여름의 푸른 파도는 그을린 기억마저 데려가는 듯하다. 영덕의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산불이 할퀴고 간 거뭇한 흔적도 차츰 잊혀지는 듯하다. 전국에 해상 산책로는 많지만, 영덕의 삼사해상산책로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드론 덕분이다. 시원하게 바다 위로 뻗어 나간 부채꼴 모양의 해상 산책로, 그 아래로는 또렷하게 드러나는 바닷속 암초들. 물빛이 얼마나 맑은지, 깔린 돌 하나하나까지 셀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곳은 드론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에게 ‘촬영 성지’로 꼽힌다. 낚시 구역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낚시꾼들의 작은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삼사해상산책로는 동해안 드라이브 명소인 7번 국도, 그중에서도 강구면 남쪽 끝에 조성돼 있다. 고래불해수욕장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약 30분 정도 달리면 닿을 수 있다. 드라이브와 산책을 한번에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근처의 ‘영덕대게 거리’와 함께 여행 코스로 묶어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영덕대게 거리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 탓인지, 상인들의 얼굴에서 좀처럼 웃음을 찾기 어렵다. 걷기 여행자를 위한 ‘영덕 블루로드’의 일부 구간 역시 산불 피해 복구로 인해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덕 풍력발전소의 거대한 날개에도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사실 영덕뿐 아니라, 안동·청송·영양 등 경상북도의 다른 산불 피해 지역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어떤 기부나 도움보다도 ‘여행자들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일상 회복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발길’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이채은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