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씨앗은 스스로 양력을 발생시켜 마치 작은 헬리콥터처럼 하늘을 돌며 먼 곳까지 여행한다. (출처:오토헤럴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난초의 씨앗은 식물 가운데 가장 가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게는 대략 0.3마이크로그램(0.0000003g)으로 사실상 먼지처럼 가볍다. 이 덕분에 공기 중에 부유하며 길게는 수백 km 떨어진 곳까지 이동할 수 있다.
이처럼 이동 능력이 없어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나고 자라 사라지는 정착 생활(sedentary life)의 식물들은 씨앗을 멀리 보내기 위해 무게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고 날개를 달아 바람에 실어 보냈다. 그렇게 퍼져나간 종자는 땅 곳곳에 새 생명을 틔우며 대지를 숨 쉬게 한다.
장마가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커다란 날개를 단 곤충처럼 생긴 씨앗이 금방이라도 땅에 닿을 듯 보이지만, 마치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서서히, 그리고 끈질기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단풍(Acer saccharinum)과 홍단풍(붉은단풍, Acer rubrum) 씨앗인데 작은 종이비행기나 천천히 도는 장난감 프로펠러처럼 하늘에 오래 머물며 최대한 먼 곳까지 여행한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 거리를 날기 위해 오랜 세월 진화를 거쳐 완성된 자연의 비행 장치다.
이 단순하고도 정교한 설계는 드론 연구자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싱가포르공과디자인대학교(SUTD)의 풍사호이 교수 연구팀은 최근 단풍나무 씨앗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모노콥터’를 공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공과디자인대학교(SUTD)의 풍사호이 교수 연구팀이 공개한 SG60 모노콥터는 32g의 무게에도 26분을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출처:SUTD)
지난 2015년 당시 취미용 쿼드콥터가 20분 남짓 비행하던 시절에 무려 50분간 지속 비행이 가능한 ‘SG50 멀티로터 드론’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던 연구팀이다. 당시 연구팀은 대형 배터리와 네 개의 로터를 장착한 무겁고 복잡한 구조를 택했지만, 높은 효율을 위해 기체가 커지고 복잡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연구팀은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 복잡함을 줄이기 위해 자연에서 해답을 찾은 것이다. 단풍나무 씨앗, 즉 사마라(samara)는 나선형 날개를 회전시키며 천천히 떨어지면서 공기역학적으로 안정성과 양력을 동시에 확보한다. 사마라는 날개 모양의 부속 구조를 가진 건과(dry fruit)를 뜻하는 식물학 용어로 바람을 타고 씨앗을 멀리 보내는 데 최적화된 형태다.
연구팀은 이 원리를 비행체에 적용해 단 하나의 날개와 모터만으로 안정적인 호버링과 장시간 비행이 가능한 ‘SG60 모노콥터’를 탄생시켰다. 무게는 32g에 불과하지만 26분간 비행이 가능하며 동급 소형 드론 대비 월등한 전력 효율을 보인다.
모든 부품이 양력 생성에 기여하도록 설계한 구조와 정밀한 최적화 덕분이다. 설계 과정에서는 AI 기반 최적화 기법이 핵심 역할을 했다. 연구팀은 날개 형태, 피칭각, 질량 분포를 변수로 설정하고, 서러게이트 최적화라는 데이터 기반 알고리즘을 활용해 가장 효율적인 조합을 찾아냈다.
SG60 모노콥터는 기상관측용 경량 라디오존데, 재난 현장 감시처럼 장시간·저비용 임무에 활용되고 있다. (출처:오토헤럴드)
그 결과, 무수한 설계 조합을 직접 제작·테스트하지 않고도 최적의 성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풍 교수는 “작아질수록 드론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작은 기체에서도 높은 효율을 구현했다”며 “단풍 씨앗처럼 모든 구조가 양력에 기여하도록 설계한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SG50 쿼드콥터와 비교하면, SG60 모노콥터는 크기와 무게 면에서 훨씬 작고 가볍지만, 효율 면에서는 오히려 앞선다. 대형 기체가 배터리 용량 덕에 장시간 비행이 가능했던 것과 달리, SG60은 구조 단순화와 공기역학적 최적화만으로 동급 최장 수준의 비행 시간을 확보했다.
SG60 모노콥터는 응용 가능성도 높다. 현재는 기상관측용 경량 라디오존데처럼 장시간·저비용 임무에 활용되고 있으며 재사용성이 높아 환경 모니터링, 재난 현장 감시, 군사·물류 분야에도 확장이 가능하다.
단풍 나무 씨앗과 같은 사마라를 기반으로 한 모노콥터 드론은 다양한 곳에서 개발하고 있지만 SG60 모노콥터 비행 시간은 세계 최장 기록이다. 향후 연구팀은 맞춤형 경량 부품 제작, 고급 소재 적용, 그리고 상황에 맞춰 날개 형태를 변형할 수 있는 생체 모사 기술을 도입해 비행 시간 60분 이상과 더 높은 탑재 하중을 목표로 하고 있다.
SG60 모노콥터의 등장은 크기가 커야 효율이 높아진다는 기존 항공공학의 상식을 뒤집은 사례다. 자연에서 배운 설계 원리와 AI 기반 최적화 기술을 결합해 초경량이면서도 고효율을 자랑하는 비행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10년 전 힘과 규모로 승부하던 드론이 이제는 단순함과 정밀함으로 하늘을 지배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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