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잔에서 제한 속도를 초과한 운전자에게 억 대의 벌금이 부과됐다. 스위스는 재산에 비례해 벌금액을 다르게 부과하는 '소득 연동형 벌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출처: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단순 과속으로 적발된 운전자가 억 대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최근 스위스 로잔에서는 시속 50km 제한 도로에서 77km로 주행한 운전자에게 최대 9만 스위스프랑, 우리 돈 약 1억 5000만 원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됐다.
우리나라에서 시속 20km 초과 과속의 벌금이 승용차 기준 약 7만 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다. 이런 ‘벌금 폭탄’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위스의 독특한 벌금 산정 방식 때문이다.
스위스 바우드 주(州) 형법은 과속을 경범죄로 분류하면서도 위반 정도뿐 아니라 위반자의 소득, 재산, 생활 수준, 가족 부양 상황 등 경제적 여건을 종합 반영한다. 재산이 많을수록 벌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 벌금 대신 단기 구금형이 가능하다.
운전자에게 거액의 벌금이 부과된 것도 그가 스위스 경제주간지 빌랑(Bilan)이 선정한 ‘스위스 300대 부호’에 포함된 억만장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위스의 ‘소득 연동형 벌금제’는 2007년 국민투표로 형법이 개정되며 본격 도입됐다. 이전에는 부유층이 소액의 벌금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정 이후 음주운전, 과속 등 중대한 도로교통법 위반 시 재산 규모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까지 부과가 가능해졌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등도 유사한 제도를 시행한다. 핀란드에서는 2002년 한 기업 임원이 시속 80km 제한 구간에서 25km를 초과해 약 12만 유로(당시 약 1억 9000만 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사례가 있다.
스위스 역사상 최고액 과속 벌금은 2010년 장크트갈렌 주에서 나왔다. 한 백만장자가 페라리를 몰고 제한속도를 크게 초과하다 적발돼 약 29만 달러(한화 약 4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산비례 벌금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시절, 세금·연금·보험은 소득과 재산에 따라 차등 부과되지만 벌금형은 총액벌금제로 개인 형편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부과된다며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
같은 죄라도 부자는 벌금 부담이 미미해 형벌 효과가 떨어지고 가난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도 도입 논의의 명분이 충분했지만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소득 연동형 벌금제는 형벌의 실효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제도지만, 사회적 합의와 정교한 설계가 전제돼야 국내에서도 도입이 가능하다. 도로에서 발생하는 법규 위반 행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 과속이다.
슈퍼카와 폭주족, 부를 과시하는 행위로도 지탄을 받는 과속 등 중대 법규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선별적으로 재산비례 벌금제를 우선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할 때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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