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가사키가 품은 신기하고, 영묘한 땅 ‘운젠’.
유황 향 가득한 수증기, 뿌옇게 낀 안개를 헤치며 이곳을 탐험했다.

낯선 운젠
나가사키현 운젠은 나가사키시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풍부한 자연과 운젠 지옥, 온천 마을 등으로 유명하다. 온천은 1,3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운젠 지옥은 온종일 수증기를 뿜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여행자는 이 땅을 밟으면서 대지의 에너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지옥의 어감이 다소 세지만, 강한 유황 냄새와 마을을 뒤덮은 수증기를 보면 적절한 단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운젠의 자랑거리들은 단순히 관광용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서 지킬 만한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1934년 3월 세토내해(Setonaikai), 기리시마(Kirishima)와 함께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운젠과 가까워지는 지름길, 카이
나가사키 도심에서 버스로 1시간 50분이면 운젠에 도착할 수 있다. 료칸 온천욕(당일권), 운젠 지옥 산책 등 필수 코스만 즐기는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하지만 료칸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운젠의 기운을 진득하게 느끼는 걸 추천한다. 저마다의 감각으로 운젠을 해석해 객실과 온천탕, 액티비티, 식사에 녹여 냈는데, 일본 여행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만큼 수준이 높다.

이번에는 호시노 리조트의 프리미엄 료칸 브랜드 카이(KAI, 界)의 힘을 빌렸다.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온천 료칸’을 지향하는 카이는 일본 온천지 21곳(하코네·이토·마츠모토·벳푸·기리시마·쓰가루 등)에 터를 잡았다. 지역 고유의 모습과 현대인의 생활에 맞는 편안함이 공존하며, 로컬에서 영감을 받은 시그니처 룸, 자연과 하나 되는 노천탕, 제철 재료로 만든 가이세키, 지역 전통을 활용한 액티비티가 브랜드의 장점이다.

한자 의미처럼 시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지역에서만 가능한 여행을 선사하는 셈이다. 게다가 북적북적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해 여행자가 숙소와 지역 문화를 오롯이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

운젠에는 해발 약 700m 지대에 자리한 호시노 리조트 카이 운젠이 2022년 11월 문을 열었다. 일본(와)과 중국(츄카), 네덜란드(오란다)를 합성한 ‘와카란(和華蘭, WAKARAN)’이라는 단어로 호텔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동서양이 어우러진 나가사키의 문화와 운젠 온천으로 호텔을 채웠는데, 객실 디자인과 온천, 식사 등에서 세 문화의 정취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나가사키 버스터미널
나가사키->운젠
1일 3회 운행 09:10, 13:10, 16:10, 1시간 50분~2시간 소요
편도 1,850엔, 왕복 3,300엔
호시노 리조트 카이 운젠 셔틀버스
이사하야역->카이 운젠 10:50, 16:40
카이 운젠->이사하야역 09:40, 15:30
50분 소요, 편도 1,000엔
나가사키공항->카이 운젠 13:50
카이 운젠->나가사키공항 12:00
75분 소요, 편도 1,800엔

여행자의 충만한 하루
굽이굽이 이어진 산간 도로를 달려 카이 운젠에 도착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통창으로 하치만 지옥과 단아한 정원, 두 가지 상반되는 풍경이 펼쳐진다. 중화풍의 진한 빨간색 의자,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활판인쇄 등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공간들도 차례대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객실은 와카란 콘셉트와 운젠 온천이 집약된 시그니처 룸을 택했다. 우선 객실도 대비의 미학이 눈에 들어왔는데, 화사한 멋은 스테인드글라스와 나가사키의 유리 공예품 비드로(びいどろ)가, 강렬함은 창밖에 놓인 노천탕과 운젠 지옥이 담당한다. 다음으로 일본의 전통 침구 푸톤과 선베드 형태의 소파, 적재적소에 배치된 어메니티를 통해 카이의 세심함을 봤다.

온젠 스타일의 휴식을 제대로 선물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곳에 오기까지 5시간, 이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탕에 몸부터 담근다. 운젠 온천에서 끌어 오는 우윳빛 온천수는 일상의 긴장감을 내려놓게 하는 포근함이 있다. 모니터에 지친 눈은 바로 앞 운젠산의 푸릇함과 뽀얀 수증기를 보는 것으로 달랜다. 노곤해진 몸을 소파에 누이고 남은 휴식 시간을 즐긴다.

활기가 되돌아오면 운젠 카이가 준비한 활판인쇄 체험과 온천 마을 산책에 나선다. 작은 식당과 카페, 기념품 상점, 공원, 족욕탕, 운젠 인포메이션 센터 등을 구경하며 지역과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다.

참고로 나가사키는 활판인쇄의 발상지다. 16세기 후반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유럽에 진출한 덴쇼소년 사절단(Tensho Embassy)이 나가사키로 돌아올 때 활판인쇄기를 갖고 왔다. 일본 최초이자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활판 기술을 도입해 책을 찍게 된 순간이다. 이후 19세기 중반 모토키 쇼조(Motoki Shozo)에 의해 활판인쇄 기술이 고도화됐다.


게다가 그는 활판 교습소를 통해 제자를 양성하고, 일본 전역에 인쇄 기술을 확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카이 운젠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체험에 녹였다. 활판인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활자를 골라 나만의 엽서를 만드는 흥미로운 시간이다. 핀셋을 활용해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 단어를 만들 때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나가사키와 운젠을 담은 저녁 식사
바깥이 어둑해지면 가이세키를 즐길 타이밍이다. 식당은 수수하고, 실용성을 강조한 하사미야키(나가사키현 하사미에서 제작한 도자기)로 꾸며졌고, 오붓한 식사를 위해 테이블별로 독립된 공간을 보장한다. 완전 룸 형태는 아니지만 다른 투숙객들의 식사 모습을 볼 수 없게 공간을 구성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저녁은 6가지 요리로 구성된 가이세키로, 나가사키현과 운젠의 식문화를 고스란히 녹여 냈다. 큰 접시에 담긴 요리를 나눠 먹는 연회 요리인 싯포쿠(しっぽく)를 재해석한 ‘호라쿠모리(盛り)’, 현의 명물인 아고다시(날치 육수)를 활용한 나베(전골) 요리가 무척 인상적이다. 호라쿠모리의 경우 계절감을 살린 8~9가지 작은 요리로 구성하는데, 모둠회와 이기리스(해초를 사용한 나가사키 향토 요리) 등은 빠지지 않는다.

나베는 복어와 돼지고기, 채소를 샤부샤부 형태로 즐기고 고토 우동을 넣어 마무리한다. 아고다시의 진한 감칠맛 덕분에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게 된다. 전체적으로 음식이 담백하고, 양념이 강하지 않아 재료 본래의 맛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깊은 밤에는 와카란 색감으로 물든 라운지에서 하루의 감상을 나누면 좋겠다. 여행을 준비하고, 휴식을 취하는 트래블 라운지로 활용되는 공간이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는 와카란 라운지로 변신한다. 밀크셰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데, 나가사키의 밀크셰이크는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떠먹는 디저트다.

192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별미로, 셰이크에 잘게 부순 얼음을 더해 셔벗과 아이스크림 중간 정도 되는 식감이 특징이다
와카란 라운지
21:00~23:00
라운지 입장 무료, 밀크셰이크 800엔 스테인드글라스 칵테일 900엔

지구의 숨결을 느끼는 순간
운젠의 아침은 안개와 유황 향으로 시작한다. 그 시간을 즐기는 단순한 공식이 있다. 오전 7시에서 7시 30분 사이 잠에서 깨어나고, 안개와 수증기로 가득한 운젠 지옥을 걸으며 몸을 예열한다. 산책 후에는 온천에서 다시 몸을 데우고, 열기를 식히면서 맛있는 아침 식사로 에너지를 보충하면 된다. 대략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루틴이다.

운젠 지옥을 걸을 땐 일본 전통 신발 지카타비(Jikatabi)를 착용하는 걸 추천한다. 자연 온천 지대라 땅바닥이 마치 보일러를 튼 안방 같은데 지카타비를 신으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그렇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땅과 접촉하는 발의 감각을 느끼고, 지구가 방출한 열이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카이 운젠에서 무료로 제공해주고, 직원이 산책을 주도하니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연무가 가득한 유케무리바시(湯けむり橋)를 건너면서 몽환적인 운젠 지옥에 입성한다. 유케무리는 뜨거운 온천 등에서 오르는 김을, 바시는 다리를 뜻한다. 참새가 우는 것처럼 작게 보글보글 소리를 내는 스즈메 지옥, 온천 달걀과 운젠 레모네이드를 즐길 수 있는 운젠 지옥 공방, 30개의 지옥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증기를 뿜어내는 다이쿄칸 지옥 등을 지나게 된다.

중간중간 꽤 뜨거운 바닥을 걷기도 하는데, 기분 좋게 따뜻한 부분은 고양이들의 차지다. 꽤 마음에 들었는지 고양이들은 몸의 힘을 쫙 풀고 대자로 누워 있다. 지옥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양새이고, 한 번쯤 누워보고 싶은 충동심도 생긴다.

1시간가량의 산책 이후에는 카이 운젠 온천에서 두 번째 땀 빼기에 나선다. 적당한 뜨거움이라 어깨까지 확실히 담글 수 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 탕에서 벗어나면 가장 건강하게 온천을 즐긴 것이다.

온천 후, 편안한 자세로 약 20분 정도 쉬었다가 일본식 아침 밥상 앞에 앉으면 된다. 카이 운젠에서는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의 전통 국물 요리 구죠니와 지역에서 즐겨 먹는 부타가쿠니(일본식 삼겹살 간장조림) 등 로컬을 놓치지 않았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