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땅값 3억 시대, '성수동'이 공간을 편집하는 방법
서울 성수동은 더 이상 한강 북쪽의 공장지대가 아니다. 연무장길 일대는 평당 3억~3억5천만 원에 거래가 이뤄지고, 1970년대 준공된 3층짜리 노후 건물이 110억 원에 매각되기도 했다. 산업지대였던 땅이 서울의 가장 뜨거운 상업용 부동산으로 바뀌는 과정, 그 중심에는 기업이 있다. 그리고 지금, 성수는 '도시를 만드는 기업'의 실험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엔 '압구정 며느리는 성수로 시집간다'는 말이 돌았다. 강남 신혼세대가 한강 건너 신축 아파트로 이주하던 시절 생긴 건데, 공식 통계는 없지만 지역 입소문처럼 회자되던 표현이다. 이제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장지대였던 골목에 카페와 편집숍, 전시장 등이 들어섰고, 버려진 창고는 감각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대림창고', '어니언'을 시작으로 이어진 리노베이션의 흐름은 '성수동'이라는 산업유산 위에 새 세대가 창조하는 도시로 바꿔놓았다.
성수역(무신사) 기업명이 도시의 관문에 달릴 때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9월, 지하철 성수역 역명 병기를 위해 패션 플랫폼 무신사와 3억2,929만 원 규모의 수의계약(3년)을 체결했다. 당초 경쟁 입찰이 유찰된 뒤 수의계약으로 전환된 건이지만, 한 민간 브랜드가 공식적으로 서울 지하철 역사에 이름을 새긴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성수역(무신사)'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다. 도시의 관문이자 공공 인프라였던 지하철역이, 하나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결합하며 '도시 언어의 변화'를 상징하게 된 사건이다. 무신사는 그만큼, 성수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빠르게 읽고 움직인 기업이기도 하다.

무신사, 플랫폼을 넘어 '공간 기업'으로
무신사는 2001년 온라인 패션 커뮤니티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2만여 브랜드가 입점한 국내 최대 패션 플랫폼이자, 패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콘텐츠 제작, 부동산 투자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문화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수동은 그 확장의 무대다. 무신사는 온라인에서 쌓은 브랜드 생태계를 오프라인 공간 네트워크로 전환했다.
무신사 캠퍼스 E1/E2 : 성수동 옛 동부자동차서비스 부지를 리모델링해 완성한 복합공간이다. 오피스, 포토 스튜디오, 브랜드 라운지, 커뮤니티홀 등이 통합된 형태로, 사옥이자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센터 역할을 한다. 2023년에는 약 1,100억 원 규모의 '세일 앤 리스백' 거래가 이루어지며 부동산 운영 역량을 입증했다.
무신사 EMPTY : 팝업형 브랜드 전시공간으로, 입점 브랜드가 일시적으로 오프라인 고객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획된 무대다. 온라인의 브랜드가 현실 공간에서 살아나는 실험장으로 기능한다.
무신사 테라스 성수 : 브랜드 쇼케이스, 전시, 토크 이벤트가 열리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공간 내부는 온라인 UX(사용자 경험)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듯, QR결제, 디지털 사이니지, 실시간 피드백 인터페이스로 구성되어 있다.
무신사 메가스토어 성수(공사 중) : 지하 1층에서 지상 4층 규모로 조성되는 플래그십 유통 공간이다. 단순 매장이 아니라 패션 리테일/카페/전시를 결합한 복합형 체험 상업공간으로 설계되고 있다.
무신사의 전략은 명확하다. 플랫폼의 접점을 도시로 확장하고, 경험을 경제로 전환하는 것. 즉 온라인의 데이터가 현실의 공간에서 감각으로 소비되는 구조다.

소담상회 - 경쟁과 공존의 무대
중소벤처기업부와 무신사가 협력한 '소담상회 with 무신사'는 공공과 민간이 함께 만든 O2O 플래그십 스토어다. 올 6월 성수 '무신사 테라스' 리모델링 공간(약 466㎡, 140평)에 문을 열었고, 한 달 만에 누적 판매 30억 원을 돌파했다.
이 공간은 원래 '소담상회 with 인터파크'로 운영되던 모델이었으나, 2025년 무신사가 신규 사업자로 선정되며 성수로 이관됐다. 공공협력 모델이 전통 유통에서 디지털 플랫폼으로 교체된 셈이다.
입찰 당시 심사 기준은 디지털–오프라인 연계 역량, 브랜드 네트워크, 운영 안정성이었다. (필자는 당시 무신사 반대편 입찰자로 참여했다.)
제안서에는 공간 구성, 수익 분배, 지역 연계 프로그램이 포함됐고, 그 과정에서 플랫폼의 성장 동력과 공공성의 균형이 주요 쟁점이 됐다. 무신사는 이후 임대료+매출연동 수수료, 순환형 입점, 플랫폼 연계 마케팅 구조로 운영하며 '공공과 민간이 공존하는 도시형 상생 모델'을 실험 중이다.

무신사 너머: 젠틀몬스터 / 크래프톤
성수동에는 무신사 말고도 많은 기업들이 입주해 자사 브랜드 대상의 도시적 실험실로 활용하고 있다. 젠틀몬스터는 9월 성수에 신사옥 '하우스 노웨어 서울(HAUS NOWHERE SEOUL)'을 열었으며, 지상 14층 규모의 복합 건물로, 젠틀몬스터, 탬버린즈, 어티슈, 누데이크 티하우스 등 그룹 브랜드의 예술적 체험을 한곳에 통합했다. 리테일을 예술·전시로 끌어올린 하이엔드 콘텐츠 허브다.
크래프톤은 성수 이마트 부지 일대에 지하 8층~지상 17층 규모의 신사옥 'K-프로젝트'를 건설 중이다. 설계는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시공은 삼성물산, 2027년 준공 목표, 사업비 7,300억 원대로 서울시는 혁신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용적률 상향(560%) 을 허용했고, 크래프톤은 2020년 이후 성수 일대 부지 다건 매입을 진행하며 도시 클러스터화를 가속하고 있다.

플랫폼, 아트/리테일, IP가 편집하는 도시
성수의 변화를 이끄는 세 축은 '플랫폼+아트+IP(지식재산)'다. 무신사는 데이터를 공간으로, 젠틀몬스터는 예술을 리테일로, 크래프톤은 가상 IP를 현실의 건축과 인프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브랜드 경험을 도시의 스케일로 확장'하고 있다.하지만 그 실험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다. 창업과 콘텐츠 산업의 성장, 글로벌 소비 유입, 노후 산업지의 재생이라는 성과 뒤에는, 임대료의 급등과 지역상권의 퇴출, 브랜드 중심 도시화의 피로감이 존재한다.
성수의 다음 장은 도시 편집권의 균형에 달려 있다. 공공은 공간의 문턱을 낮추고, 민간은 순환형 입점/공정 수수료/지역 프로그램 같은 구체적 상생 설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도시가 기업의 무대가 되는 순간, 기업 역시 공공의 일부로서 도시 생태계를 설계할 책임이 생긴다.
성수의 진짜 가치는 고가의 토지가 아니라 관계의 농도에 있다. 카페 한 켠의 자리, 골목의 간판, 임대인과 세입자 사이의 계약 한 줄이 도시의 문화를 결정짓는다. 브랜드가 공간을 바꾸었듯, 이제는 공간이 브랜드를 시험하는 시대다. 도시는 기업의 거울이자, 시민의 실험대다.
이제 성수는 기업이 도시를 짓는 현장이다. 플랫폼, 아트, IP 세 축이 교차하며 만들어낼 상호작용이 서울의 도시 경험을 다시 쓰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크래프톤의 K-프로젝트와 젠틀몬스터의 하우스 노웨어 서울을 중심으로, 기업이 건축을 통해 도시와 대화하는 방식을 분석해본다.
글 / 정훈구 담장너머 대표 (plus82jh9@gmail.com)
담장너머의 공동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즈'와 '굿디자인 어워즈'에 선정된 바 있으며, 다양한 공간기획 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인 공간과 경험을 제안, 구축하고 있다.
정리 / IT동아 이문규 기자 (munc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