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026 신년회에서 조직의 빠른 체질 변화를 요구하고 AI 시대 전환에 따른 경영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의례적이 덕담이 아니었다. 5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2026년 신년사는 임직원에 대한 날카로운 ‘질책과 경고'로 가득했다. 조직과 리더를 향한 집요한 성찰과 변화, 동시에 AI와 SDV(소프트웨어 정의 자동차)를 축으로 한 생존 전략에 속도를 내 줄 것도 요구했다.
정 회장은 이날 전 세계적인 무역 전쟁 심화로 경영 환경과 수익성 악화, 경쟁사의 글로벌 시장 침투 확산, 지정학적 갈등 등 다양한 요인으로 사업이 중단되거나 타격을 받게될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감을 감추지 않았다.
계열사별 변화의 속도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깊은 성찰에서 비롯한 체질 개선을 임직원에게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제품에 고객의 시각이 충분히 반영됐는지, 기획·개발 과정에서 타협은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자부하는 품질 앞에서 고객에게 떳떳한지가 핵심이다.
형식적인 보고나 숫자에만 매달리는 경영, 고객이 아니라 내부 논리만 쫓는 의사결정을 이제 그만두라는 사실상 질책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정 회장은 리더들에게 “모니터 앞을 벗어나 현장을 가라”, “보고는 분량이 아니라 생각과 결론”이라고 못 박았다. 장황한 형식, 보기 좋게 만든 PPT 대신 본인이 내린 판단과 책임을 내놓으라는 주문이다.
부문별로 변화의 속도에 차이가 크다는 점도 꼬집었다. 명확하게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움직이고 있지만 그룹에 속한 일부 계열사는 여전히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질책한 것이다.
정 회장의 2026년 신년사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기 성찰’이다. 개인과 조직, 특히 리더를 향한 자기 반성을 요구했다. 여기엔 “위기 때 더 강해졌던 DNA를 믿되 그 DNA에 안주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겹쳐 있다. 변화를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태계까지 확장된 책임 의식
이번 신년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생태계’에 대한 정의다. 자동차, 휴머노이드, 로봇이 수만 개의 부품으로 구성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꺼내면서 “공급 생태계의 경쟁력이 곧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정의했다. 부품 하나라도 성능·품질·원가에서 뒤처지면 완성차의 경쟁력이 무너진다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동안 말로만 소비되던 명제를 다시 전면에 세웠다.
그래서 내놓은 해법이 ‘동반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투자 확대’다. 단순한 상생 구호가 아니라 글로벌 무역 전쟁과 지정학 리스크 속에서 공급망 전체를 방어하지 못하면 그룹의 생존도 담보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정 회장이 가장 긴 호흡으로 할애한 주제는 'AI와 SDV'다. 그는 AI를 “기업과 산업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범용 지능 기술”이라고 규정했다. 자율주행이나 로봇의 성능을 좌우하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R&D·생산·물류·품질·마케팅·고객 대응 등 전 가치사슬의 생산성을 재편하는 ‘플랫폼’이라는 인식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기술 격차를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점이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이 이미 수백조 원 단위의 투자로 우위를 선점했고 “이에 비해 우리가 확보한 역량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초격차를 인정하면서 가감없이 드러낸 자기 성찰이다.
그러면서도 AI는 완성품이 아니라 ‘축적의 기술’이며 외부에서 사서 쓰는 것으로는 선도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고 진짜 경쟁력은 스스로 학습시키고 개선해 본 경험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AI 시대 전환에 임직원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조모조목 구체적 사례를 들어 주문했다. 정 회장은 언어모델(LLM) 중심의 디지털 AI와 자율주행·로봇 제어를 담당하는 피지컬 AI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는 기술”로 묶어 설명했다.
언어모델은 밖에서 사다 쓰고 피지컬 AI만 우리가 잘하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최신 AI 아이디어가 LLM에서 검증된 뒤 자율주행·로봇 영역으로 확산된다는 현실을 짚고 자체 언어모델 연구를 그룹의 ‘필수 과제’로 못 박았다.
“테슬라처럼 하라”는 노골적 메시지
정 회장은 경쟁사의 이름도 직접 거론했다. 테슬라가 데이터 수집·라벨링·대규모 사전학습·데이터센터 운영까지 AI 성능 개선에 필요한 전 과정을 내재화했기 때문에 AGI 수준의 목표를 추구하고 초격차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곧 “우리도 그 수준까지 가야 한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또 하나 흥미로운 비교는 중국의 ‘딥시크(DeepSeek)’ 사례다. 인프라 격차는 자본 투입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못 박으면서 결국 승부는 데이터와 아이디어에 달려 있다고 정리한다. 자동차·로봇·제조 공정에서 나오는 데이터의 희소성을 미래 무기로 규정한 대목은 현대차그룹이 전통 제조업 강자의 위치에서 AI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요약하면, 정 회장이 임직원에게 주문한 것은 세 가지다. 남의 기술을 사서 붙이는 수준에 머물지 말 것, AI·SDV 역량을 그룹 내부에 ‘원천 기술’로 내재화할 것, 자신이 가진 물리적 자산과 데이터를 ‘AI 시대의 무기’로 재정의할 것이다.
“인재의 시대는 끝났다, AI+인재의 시대다”
정 회장은 한국 제조업과 회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으로 ‘우수한 인재’와 ‘압도적인 실행력’을 꼽으면서도 AI 시대에는 이 성공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영적 판단을 포함해 기업 활동의 상당 부분을 AI가 수행하게 될 것이고 개인의 우수성만으로는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진단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우수한 인재를 기반으로 AI 경쟁 우위를 시급히 확보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에는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못 박는다. 인재 중심 조직에서 AI+인재 중심 조직으로의 전환, 이것이 그가 말하는 ‘체질 개선’의 두 번째 요구였다.
정의선 회장의 2026년 메시지는 표면적으로는 AI와 SDV, 투자와 성장 이야기지만 바닥에는 분명한 전제가 깔려 있다. 형식적인 보고와 느린 의사결정, 고객과 떨어진 기획·개발 문화에 대한 질책과 리더들이 현장으로 내려가고 한 팀으로 움직이라는 요구 그리고 협력사와 생태계를 포함한 ‘전체 체질’을 다시 보라는 성찰에 대한 요구를 담은 신년사였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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