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통한 여행 : 고대 수도를 가로지르는 연기와 빛
일본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인 타니자키 준이치로(Tanizaki Junichiro)는 1933년에 발표한 에세이 <음예예찬>에서 일본 건축과 일상생활에 내재한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탐구했다. 그는 일본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밝음보다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강조했다. 즉, 나무를 통과하는 달빛, 쇼지 종이 스크린 뒤의 부드러운 빛, 칠기에 비친 희미한 반사에서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썼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타니자키의 미적 감성이 형성된 장소 중 하나는 고대 수도 교토다. 사찰과 정원에 깃든 조용한 그림자가 그의 문학 세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주 휴식을 즐긴 또 다른 휴양지가 효고현의 ‘아리마 온천’이었다. 이제 교토의 아라시야마와 역사적인 아리마 온천, 두 목적지를 통해 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추적해 본다.
세계유산 사찰에서 와비사비의 정수를 만나다
교토 중심부에서 기차로 약 20분이면 도시 서쪽의 사가-아라시야마 지역에 닿는다. 이곳은 계절마다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이 고요한 환경 속에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텐류지(Tenryuji, 天龍寺)다. 1339년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정신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하고, 선승 무소 소세키의 지휘 아래 세워진 사찰이다.
무소가 설계한 사찰의 소겐치 정원은 산책형 연못 정원의 정수로 알려져 있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각도가 바뀌어 마주하는 풍경도 달라진다. 소겐치 정원은 스님들이 매일 밤 마음을 정화하던 공간인 자칸시키 정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정원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 경치를 바라보면 스님들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무소 소세키가 남긴 “산과 강에는 이익도 손실도 없다. 이익과 손실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만 존재한다. 아름다움은 산이나 물, 나무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눈에서만 발견된다. 정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맑다는 뜻이다. 마음이 흐려지면 정원도 암울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원은 마음을 부드럽게 정화로 이끄는 곳이다.”라는 말도 곱씹게 된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 정원과는 다른 고요함에 들어선다. 그 위로는 구름 용이 천장을 휩쓸고 있는데, 이 용은 사방에서 시선을 따라오는 ‘팔방으로 응시하는 용’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 빛과 그림자,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담은 듯한 형상으로 힘과 우아함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그 눈을 마주하면 자기 내면의 빛과 어둠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엿볼 수 있다.
그림자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대나무 숲 걷기
텐류지 북문을 나서면 아라시야마의 명소 중 하나인 대나무 숲길을 만날 수 있다. 부드러운 빛은 곧게 솟아오른 대나무 줄기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에 나뭇잎이 속삭일 때면 희미하게 가녀린 햇살도 숨결처럼 일렁인다. 이곳에서는 타니자키가 <음예예찬>에서 경의를 표한 빛과 그림자의 시적 조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Arima Onsen
고대 바다의 하석수 : 아리마 온천
여행의 피로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온천 중 하나인 아리마 온천에서 달랠 수 있다. 교토와 오사카, 나라에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할 경우, 아리마 온천까지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니혼쇼키>, <후도키> 등 고대 연대기에 언급된 아리마는 시라하마, 도고와 함께 일본 3대 고대 온천으로 불린다.
특히, 아리마는 오랜 역사 속에서 타니자키 준이치로를 비롯해 수많은 시인과 작가를 맞이했다. 또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가 사랑한 휴양지였으며, 지금도 그의 유산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아리마’ 하면 적갈색의 미네랄이 풍부한 킨센(금빛 온천)이 먼저 떠오른다. 일본의 많은 온천이 화산을 발원지로 삼는 것과 달리, 아리마의 물은 화산성 온천이 아니다. 수백만 년 전 지하 깊은 곳으로 스며든 고대 바닷물에서 온천이 형성됐고, 지각 변동 과정에서 지하 열, 암석층과의 접촉을 통해 천천히 화학적 변형을 거쳐 지표면으로 솟아올랐다. 지구 자체의 기억을 담은 ‘고대 바다의 화석수’인 셈이다.
이 물은 철분과 소금 농도가 높아 열 보존 효과가 뛰어나다. 목욕 후 피부에 얇은 막을 형성해 온기를 가두니 오랫동안 몸을 데운다. 예로부터 ‘열욕탕’으로 알려진 아리마 온천수는 혈액 순환 저하, 신경통, 관절 통증에 도움이 된다.
킨센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곳은 온천 지구의 중심에 자리한 금노유 공중목욕탕(입장료 성인 800엔)이다. 매일 현지인과 방문객들로 붐비는 곳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야외 무료 족욕탕도 갖췄다.
게다가 요즘에는 탄산수와 라듐 온천의 의학적 특성이 주목받으면서 맑고 실키한 진센(은빛 샘)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킨센이 외부에서 몸을 부드럽게 데워 준다면, 진센은 혈액 순환을 촉진해 몸을 내부에서 따뜻하게 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목욕은 킨센에 몸을 담가 열이 깊게 스며들게 한 뒤, 진센에 들어가 혈류를 자극하는 순서로 진행하면 된다. 2가지 온천을 번갈아 즐기면 땀 배출과 상쾌함이 증폭돼 신체가 완전한 활력을 되찾는다.
■Arima Brush
전통의 한 조각을 집에 가져가다 : 아리마 브러시
오랜 세월 동안 여행객들이 모여든 아리마 온천 마을에는 독특한 현지 공예품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약 1400년 전 고토쿠 천황은 후계자가 없어 슬퍼하다가 아리마 왕자가 태어난 직후 이곳 아리마에 머물렀다.
무로마치 시대(1336~1573)의 인형 제작자 이스케는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아리마 닌교 후데, ‘아리마 인형 붓’을 만들었다. 에도 시대(1600년대~1800년대)에 이르러 아리마 붓은 나라, 에도와 함께 일본의 삼대 붓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아리마 붓은 샤프트의 견고한 복원력과 팁의 응집력이 특징이다. 브러시의 탄력 덕분에 다양한 두께의 선을 표현할 수 있어 섬세하고 우아한 서예를 가능하게 한다.
참고로 기노유 맞은편에 자리한 아리마 장난감 및 오토마타 박물관(Arima Toys & Automata Museum) 1층 ‘장난감 공방’에서는 아리마 인형 브러시 오토마톤 제작 체험을 할 수 있다. 참가비는 5,000엔이다.
■Arima Keiko
아리마 게이코의 세련된 전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1603~1926)까지 아리마 게이코는 온천 마을의 사교계를 우아한 색채로 장식했다. 이곳 게이코들은 간사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온천 게이코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
여행자들이 게이코를 문화를 쉽게 접하려면 ‘게이코 카페 이토’로 향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게이코의 춤 공연과 오자시키 아소비(연회석에서 게이코와 즐기는 전통 놀이)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댄스 공연 관람료는 1,500엔, 현역 게이샤가 의상을 입고 스타일링까지 도와주는 아리마 게이코 변신 체험은 3만3,000엔이다.
게이코의 세련된 문화를 직접 경험하면 분명 시대를 초월한 아리마의 매력을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2025년 4월 문을 연 콕시넬은 게이코 이츠나가 자주 찾는 단골 가게다. 이곳의 수제 휘낭시에 케이크는 첨가물과 글루텐을 넣지 않고, 하우스 블렌드 쌀가루로 만든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며, 아리마 거리를 산책하기에 알맞은 크기로 여행자의 여유로운 발걸음을 함께하는 즐거운 동반자다.
아리마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 타니자키가 사랑한 집
약 800년 전에 설립된 토센 고쇼보(Tocen Goshoboh)는 아리마에서 가장 오래된 료칸으로, 온천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한다. 이 료칸의 역사가 곧 아리마의 역사일 정도로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목조 건축물의 깊은 처마, 쇼지 종이를 통과하는 부드러운 빛, 돌로 포장된 정원 길 등 여관 곳곳에서 <음예예찬>이 극찬한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희미한 조명과 고요한 분위기는 과거의 향수와 오늘날의 세련미를 동시에 지녔고, 그림자와 빛의 미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 낸다.
객실은 타니자키가 머물며 소설을 집필했던 그 때의 고쇼보 분위기를 재현한 라쿠 룸이 좋겠다. 내부에는 타니자키, 예술가 산다 세이지와 관련된 책, 서예, 도자기도 비치돼 있다.
종종 ‘간사이의 안방(Kansai no okuzashiki, 関西の奥座敷)’이라고 불리는 아리마는 한때 황제와 쇼군들이 즐겨 찾던 휴양지였다. 이들의 환대 방식에서 야마가요리(山家料理)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기리는 소박한 산 요리로 태어났다. 고쇼보에서는 제철에 충실한 이 정신을 담아 식사를 준비하고, 투숙객은 자연의 선물을 있는 그대로 맛볼 수 있다.
아리마의 가장 큰 매력은 온천 문화, 문학, 미식, 역사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방식에 있다. 온천의 안개와 고대 수도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따라 빛과 그림자를 추적하는 여정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일본 문화 깊숙한 곳의 영혼과 마주하는 경험이 된다.
자료제공 효고현, 에디터 트래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