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가 등장한 초기, 많은 사람들은 보급 대수가 증가하면 '전기 부족' 사태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오토헤럴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국산 전기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197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포니를 개조해 만든 전기차가 출발점이다. 이후 기아 베스트 전기차, 쏘나타 전기차를 거쳐 2010년 현대차의 블루온이 등장하면서 전기차는 시험 단계를 넘어 현실로 다가왔다.
연구·실험용에 머물던 전기차가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기아 레이 EV부터다. 당시 출시 행사에서 한 기자가 던진 질문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기차가 많이 팔리면 전기 부족 사태가 오는 것 아닌가?”
2026년형 기아 레이 EV. 2011년 국산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로 출시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기아)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전기차는 빠르게 늘었고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순수 전기차 보급 대수는 89만 9000대를 넘어섰다. 올해 안에 100만 대 돌파가 유력하다. 그럼에도 전력 수요가 가장 높았던 지난여름조차 ‘전기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전기차의 전력 소비는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전기차 1000만 대가 사용하는 연간 전력은 약 2만 5000GWh로 추산된다. 이는 우리나라 연간 총 발전량의 약 4%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에 등록된 2640만 대의 자동차를 모두 전기차로 바꾼다고 해도 당장 전기 부족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문제는 전력망이다. 인프라를 개선하지 않으면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가 필요한 곳까지 제때 전달되지 못해 지역별 과부하와 국지적 정전이 반복될 수 있다.
전기 수요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전기차만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역시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전기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의 일상이 됐고 어떻게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공기 같은 존재’가 됐을까?
토머스 에디슨이 1879년 개발한 백열전구. 탄소 필라멘트를 이용해 수백 시간 이상 안정적으로 빛을 내는 데 성공하면서 전기는 실험실을 벗어나 가정과 거리로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출처:스미소니언 국립미국역사박물관)
전기는 누군가가 발명한 물건이라기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견되고 길들여진 자연 현상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호박을 문질렀을 때 생기는 정전기 현상을 기록한 것이 전기 발견의 시작으로 꼽힌다. 이후 벤저민 프랭클린이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전기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전기가 에너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면서부터다. 전기를 연속적으로 얻을 수 있게 되자 활용 가능성이 열렸다. 이어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하면서 발전기의 원리가 확립됐다. 전기를 생산하고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며 전기는 본격적인 에너지원이 됐다.
그리고 19세기 말,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상용화하고 발전소·배전망·계량 체계를 아우르는 전력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전기는 실험실을 벗어나 일상으로 들어왔다.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AC) 기술은 전기를 멀리, 대량으로 보내는 길을 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력망의 기본 구조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 졌다.
2030년, 고리 원전 단지 300기 필요
2030년 전 세계 전력 수요 충당을 위해서는 고리원자력단지급 원전 300기 이상을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오토헤럴드)
현재 전기 수요 증가의 주범은 전기차가 아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도시 전기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전력 수요가 2024년 약 3만 1000TWh에서 향후 연평균 3~4%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30년 전후까지 수천 TWh 규모의 추가 전력 공급 능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연간 6000TWh의 추가 발전 설비가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2550MW급 고리 원전 단지를 300기 이상 추가로 건설해야 하는 규모다. 이미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전이 약 440기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가벼운 숫자가 아니다. 문제는 이 막대한 전력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환경 규제 강화와 지역 주민, 환경 단체의 반발로 화력·수력·원자력 발전소를 대규모로 늘리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미래 전력 기술의 방향도 분명해지고 있다.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깨끗하고, 더 분산적이며, 더 지능적인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
핵융합·태양광… 전기의 다음 질문
전기를 얼마나 더 많이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생산하고 공정하게 나눌 것인지가 미래 에너지의 핵심 질문이 되고 있다.(@오토헤럴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기술은 핵융합 발전이다. 태양이 에너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론적으로는 연료가 거의 무한하고 탄소 배출도 없다. 아직 연구 단계지만 ‘궁극의 에너지’로 불리며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개발에 나서고 있다.
태양광 역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효율을 크게 끌어올린 신소재 기술을 바탕으로 건물 외벽과 창문, 차량까지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풍력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부유식 해상 풍력으로 확장되며 입지 제약을 줄이고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경계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소 후보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에너지 저장 장치(ESS)다. 태양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대비해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기술이다. AI 기반 전력 제어와 스마트 그리드가 결합되면서 전력망은 하나의 거대한 ‘지능형 네트워크’로 진화하고 있다.
전기의 역사는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 사회를 움직이는 인프라로 성장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술 경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제 질문은 전기를 얼마나 더 많이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생산하고 공정하게 나눌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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