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형 메르세데스 심플렉스 40hp의 허니컴 라디에이터. 초기 자동차에서 냉각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벌집 구조는 이후 라디에이터 그릴 디자인의 출발점이 됐다. (출처: 메르세데스 벤츠 클래식)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자동차 디자인은 공학적 기능과 브랜드 정체성, 기술과 규제가 맞물려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공기의 흐름과 냉각, 안전과 공간 설계,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첨단 기술, 그리고 각종 규제까지 동시에 반영해야 하는 복합적인 작업의 완성물이다.
이 가운데 자동차 전면부의 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그릴(Grille)’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라디에이터 그릴(Radiator Grille)’로 불리는 이 구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자동차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필수적 장치다.
초기 자동차는 라디에이터가 그대로 외부에 노출돼 있었다. 그러나 엔진 출력이 높아지고 열 발생량이 증가하면서 냉각 효율을 확보해야 했다. 특히 주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돌과 먼지, 각종 이물질로부터 라디에이터를 보호해야 할 필요도 커졌다.
이 과정에서 공기는 통과시키면서도 이물질은 걸러내는 격자 형태의 구조물이 등장했고 이것이 오늘날 그릴의 출발점이 됐다.
엔진을 살리기 위해 태어나 브랜드의 상징으로
메르세데스 벤츠 디자인이 '2019 디자인 에센셜'에서 공개한 '비전 메르세데스 심플렉스(Vision Mercedes Simplex)'. 1901년 처음 등장한 메르세데스 35 PS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이다. (오토헤럴드 DB)
그릴의 시작은 특정 모델 한 대로 단정하기 어렵다. ‘엔진을 식혀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기술적 결과물이다. 다만 기술적 전환점으로는 1901년 등장한 메르세데스 35PS를 꼽을 수 있다.
메르세데스 35PS는 벌집(honeycomb) 모양을 닮은 육각형(헥사곤) 타입의 허니컴 구조를 라디에이터에 도입했다. 이후 전면 라디에이터 배치를 확립하면서 오늘날 대부분 자동차의 그릴 구조가 자리를 잡는 기반이 됐다.
그릴이 자동차 전면부에 위치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엔진 대부분이 앞에 있고 라디에이터를 그 앞에 배치해 전방에서 공기를 유입해야 하는 구조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전면부에 자리 잡게 됐다. 리어 엔진이나 미드십 구조에서는 위치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공기 흐름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브래스 에라, 크고 화려한 장식으로 진화
롤스로이스 판테온 그릴과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자동차 그릴이 브랜드 상징으로 진화한 대표적인 사례다.(출처 : 롤스로이스)
초기의 그릴은 단순한 금속 격자에 불과했지만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고 소비재로 자리 잡으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 시기 자동차는 ‘브래스 에라(Brass Era)’로 불릴 만큼 황동 장식이 핵심을 이뤘다.
기능을 넘어 가장 먼저 화려함이 집중된 영역으로 자리를 잡으며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과장된 형태가 유행을 했다. 황동과 크롬 도금으로 화려한 장식, 크기와 패턴 역시 다양해졌다. 이 과정에서 그릴은 단순한 공기 흡입구를 넘어 브랜드를 상징하는 핵심 디자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지금도 그릴의 역할은 다르지 않다. 롤스로이스의 판테온 그릴, BMW의 키드니 그릴, 메르세데스 벤츠의 수평 바 그릴, 렉서스 스핀들 그릴, 기아의 타이거 노즈, 제네시스의 크레스트 그릴 등은 브랜드 정체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디자인 언어가 됐다.
기능에서 ‘얼굴’로 디자인의 시대가 열리다
제네시스의 전기차 기반 GT(Gran Turismo) 콘셉트카 '제네시스 엑스(Genesis X)' 그릴. (오토헤럴드 DB)
기술 발전은 그릴의 역할에도 역설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엔진 효율이 높아지고 냉각 기술이 개선되면서 그릴의 기능적 중요성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액티브 그릴 셔터와 같은 기술은 필요할 때만 공기를 유입하도록 하면서 효율을 높였고 일정 수준 이상의 냉각 성능이 확보된 이후에는 그릴 크기와 성능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도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자동차에서 그릴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는 냉각 성능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시각적 존재감과 브랜드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한 디자인 전략에 가깝다.
그릴의 또 다른 전환점은 ‘빛’이다. 1960년대 크라이슬러 300L에서 중앙부 조명 실험이 등장한 이후, LED 기술 발전과 함께 그릴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최근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엠블럼 조명이나 BMW의 ‘아이코닉 글로우’처럼 그릴 자체가 발광하는 구조가 등장하면서 그릴은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브랜드를 식별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전기차 시대에도 그릴은 사라지지 않을 것
BMW i3의 ‘아이코닉 글로우’. 순수 전기차임에도 불구하고 냉각 기능을 넘어 조명을 활용한 브랜드 시그니처로 진화한 전면 그릴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다. (BMW 제공)
전기차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릴의 기능은 다시 한 번 변화를 맞고 있다. 내연기관과 달리 대규모 냉각이 필요 없는 전기차에서는 전통적인 공기 흡입구 역할이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기차가 여전히 그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능을 넘어 브랜드를 표현하는 언어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릴이 외부와 소통하는 인터페이스로 진화하고 있다. LED 패턴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보행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표시 기능, 차량 상태를 전달하는 시각적 신호 등이 그릴을 통해 구현되고 있으며 전면부 전체를 디지털 패널처럼 활용해 움직이는 그래픽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다.
라디에이터 그릴은 엔진을 식히기 위한 공기 통로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얼굴이자 브랜드를 표현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아가 외부와 소통하는 디지털 인터페이스로 진화하고 있다.
전기차가 자동차 시장의 중심이 되더라도 그릴은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역할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장치에서 브랜드와 기술, 사용자 경험을 동시에 전달하는 ‘자동차 전면부의 플랫폼’으로 계속 변화해 갈 것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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