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 generated image @Google Gemini 3
그동안 석유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지라 전세계가 비명을 질렀던 오일쇼크를 경험하지 못했다. 덕분에 미국과 이란의 전쟁의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우리 실생활 물가에 영향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입된 원유는 자동차의 연료나 난방에만 이용되는 것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정작 우리 생활에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것은 바로 '나프타'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할 때 뽑아내는 액체 원료다. 이걸 가공하면 비닐의 원료인 폴리에틸렌(PE), 플라스틱 용기의 원료인 폴리프로필렌(PP), 합성섬유의 원료인 폴리에스터가 된다. 우리가 매일 쓰는 비닐봉투, 플라스틱 용기, 합성섬유 옷, 화장품 용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모두 나프타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쌀값이 오르면 밥상이 바뀌듯이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생활비 구조가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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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나프타 가격은 한 달 새 톤당 637달러에서 1,161달러까지 올랐다. (이투데이 관련 기사)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나프타 수요의 약 25%가량을 중동산에 의지해왔기에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이를 반영하듯 동네 마트 진열대에서 종량제 봉투가 사라지고 있다. 이마트·이마트에브리데이의 종량제 봉투 판매량은 지난 22~29일 전년 동기 대비 287% 증가했고, 롯데마트도 같은 기간 140% 늘었다. 지퍼백(81%)·비닐백(93%)·음식물봉투(131%) 판매도 동반 급증했다고 한다. 필자가 사는 동네의 중형 마트도 1인당 1묶음으로 판매를 제한했고 제일 많이 팔리는 10ℓ 짜리는 아예 품절이라는 공지를 내걸었다.
하지만, 아직 큰 파도는 오지도 않았다.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다른 생활용품들의 가격도 심상치 않게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생활용품들이 무엇이 있나 살펴보고, 현 시점을 진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플라스틱·비닐 계열 생활용품 : 원자재는 이미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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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장 체감되는 플라스틱, 비닐류의 생활용품을 보자. 한국플라스틱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비닐봉투와 지퍼백의 원료인 폴리에틸렌(PE) 가격은 기존 톤당 110만~145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 올랐다. 밀폐용기·보관함의 원료인 폴리프로필렌(PP)도 비슷한 가격 압박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 락앤락 직사각 밀폐찬통<1,3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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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충격이 소비자에게 즉각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자재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마트 진열대의 지퍼백 가격이 당장 바뀌는 건 아니다. 공장에서 원료를 받아 제품을 만들고, 도매상을 거쳐 유통망에 풀리기까지 통상 한두 달의 시차가 있다. 지금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가격표는 아직 인상 전 원가를 반영한 것들이 상당수다.

▲ SC존슨 지퍼락 그립앤실<19,500원>
<이미지 출처 : 오픈마켓 페이지>
유통 현장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시작된듯 보인다.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서 비닐 포장재를 취급하는 업체 대표는 지난 1일부터 제품 가격을 25% 인상했고 5~6월에 추가 인상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매체 보도가 있을 정도다. (뉴데일리 관련 기사)
업계 전반의 상황도 심각하다. 한국플라스틱산업협동조합이 회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94.7%가 수익성 악화를 호소했고, 39.5%는 생산량 감소나 중단까지 우려한다고 답했다. 플라스틱 가공업체 전국 약 2만 개 중 90%가 20인 이하 영세 사업자다. 원가는 올랐는데 납품 단가는 그대로인 상황이 이어지면 생산을 포기하는 업체가 늘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공급 자체가 줄어드는 2차 충격이 온다.
세탁세제·샴푸·화장품 : 용기값이 내용물값보다 먼저 움직이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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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세제, 샴푸, 바디워시, 치약. 매일 아침저녁으로 손이 가는 제품들이다. 이 제품들의 공통점은 내용물만큼이나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기의 원료가 바로 나프타에서 출발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샴푸를 살 때 내용물 성분을 따지지, 용기 재질까지 신경 쓰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제조사 입장에서는 다르다. 샴푸 한 병을 만들 때 내용물과 용기를 따로 조달해야 하는데, 용기 원가가 오르면 그것이 고스란히 제품 단가에 얹힌다. 내용물 원가가 오르기 전에 용기값이 먼저 소비자가를 자극하는 구조다. 치약 튜브, 세탁세제 용기, 섬유유연제 뚜껑, 바디워시 펌프까지 모두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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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포장재 제조업체들은 이미 가격 인상 공지를 내보내고 있다. 한 포장용기 제조업체는 이달 말 1차로 8~15% 인상하되 일부 제품은 30%까지 올릴 예정이며, 이후에도 추가 인상 가능성을 예고했다. 대형 생활용품 브랜드들은 아직 소비자가를 유지하고 있지만, 납품 단가 인상 압력이 계속되면 이를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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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업계는 이중 타격을 받고 있다.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플라스틱 용기 원가 문제에 더해, 클렌징·네일·향수류에 쓰이는 아세톤 등 화학 원료 가격이 최근 2주 새 약 50% 올랐다고 한다. (뉴스웨이 관련 기사) 화장품은 내용물을 만들어도 용기와 펌프, 파우치를 확보하지 못하면 출하 자체가 불가능한 제품군이다. 이미 업계에서는 "완제품을 만들어도 담을 그릇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아모레퍼시픽 등 대형사는 대체 물류 경로를 검토 중이고, 한국콜마 같은 ODM·OEM 업체는 외부 협력사 조달과 패키징 자회사를 동원해 공급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중소·인디 브랜드가 겪는 고통은 더욱 심하다. 패키징 솔루션을 주문을 해도 선구매 여력 자체가 부족하거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등 공급 부족으로 인한 타격이 더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식품류 : 포장재가 먼저, 밥상 물가는 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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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주 먹는 라면과 과자의 포장재 역시 폴리프로필렌과 폴리에틸렌 계열 필름을 겹쳐 만든다.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어쩔수 없이 제조 원가도 함께 오르는 구조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식품업체들이 보유한 포장재 재고가 현재 1~2개월 분량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신문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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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형 마트보다 라면, 맥주 페트, 과자 매출이 상당 부분 차지하는 편의점 가격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소재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점주에 따르면 "아직 본사 차원의 가격 인상에 대한 소식은 없으나 젤리를 포함한 과자류의 가격은 이미 약 20~25% 오른 상태"라고 한다. 페트병에 들어있는 음료 나프타 원료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여름 성수기가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라 유통 업계의 우려는 더욱 크다.
더불어 나프타계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농업 쪽에서도 변수가 생겼다. 국내 비료 제조용 '요소(CH₄N₂O)'의 중동 의존도는 43.7%인데, 전쟁 여파로 국제 비료용 요소 가격이 전월 대비 47% 넘게 치솟았다.(뉴스1 관련 기사) 역시 가격 상승의 연쇄효과가 이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비료값이 오르면 농산물 생산 원가가 올라 하반기 밥상 물가를 끌어올리는 주범이 된다. '5월 위기설'이 거론되는 배경이다.
대형 가전 : 원가 압박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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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와 냉장고 같은 대형 가전은 현재 두 가지 악재가 겹쳐 있다. AI발 반도체 수급난과 나프타 쇼크다. 얼핏 보면 가전과 나프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세탁기 한 대를 뜯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전제품 내부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플라스틱이 들어간다. 세탁기의 드럼 외통, 냉장고의 내벽 라이너, 에어컨의 외장 패널, 식기세척기의 내부 바스켓까지 모두 플라스틱 계열 소재다. 특히 ABS(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스티렌)는 가전 외장재에 가장 널리 쓰이는 소재인데, 이것이 나프타를 원료로 만들어진다. 소비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프타 가격이 가전 원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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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 상황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최근 고객사에 에틸렌과 ABS 등 주요 소재 공급이 어려워질 가능성을 통보했고, 일부 제품 가격은 최대 60%까지 올랐다. (뉴스웨이 관련 기사) 국내 석유화학 1, 2위 업체가 동시에 공급 차질을 예고했다는 것은 단순한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아니라는 신호다.
가전 제조사 입장에서는 이 원가 상승을 어디선가 흡수해야 한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마진을 줄여 소비자가를 유지하거나, 소비자가를 올리거나. 글로벌 경기 침체 국면에서 소비자가를 올리면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마진 압박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이 장기화되면 이 버티기에도 한계가 온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하반기 가전 가격 인상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 AI generated image @Google Gemini 3
여기에 반도체 수급난까지 겹쳐 있다. AI 데이터센터 수요 폭증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면서, 스마트 기능을 탑재한 고급 가전제품의 부품 원가도 함께 오르고 있다. 나프타 쇼크로 플라스틱 소재 원가가 오르고, 반도체 대란으로 전장 부품 원가가 오르는 이중 압박이다. 두 악재가 동시에 터진 지금, 대형 가전의 소비자가가 언제까지 지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석유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 : 의류, 페인트,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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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접착제는 이미 움직였다. 노루페인트와 삼화페인트는 지난 23일부터 제품별 가격을 20~55% 올렸고, KCC도 10~40% 인상을 예고했다.(서울신문 관련 기사) 페인트의 주원료는 나프타계 용제와 수지다. 벽에 바르는 페인트 한 통이 중동 전쟁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인테리어나 셀프 도색을 계획하고 있다면 지금이 인상 전 마지막 구간일 수 있다. 실란트, 코킹재 같은 접착·마감 자재도 같은 원료 구조여서 건설·인테리어 업계 전반으로 원가 압박이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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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패션은 예상 밖의 영향권이다. 옷값이 왜 오르냐고 의아할 수 있지만, 폴리에스터 같은 합성섬유가 나프타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의류의 절반 이상이 폴리에스터 소재다. 초저가 의류로 유명한 쉬인은 폴리에스터 의존율이 80%를 넘고, H&M과 자라 계열도 25% 수준이다.(서울경제 관련 기사)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원사 가격이 오르고, 원사 가격이 오르면 봉제 원가가 오르는 구조다. 당장 시즌 신상품 가격표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하반기 이후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등산복, 운동복, 수영복처럼 합성섬유 비중이 높은 기능성 의류일수록 영향이 더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전쟁보다 평화! 거기에 물가 안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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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작성하는 도중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몇몇 컨테이너선의 소식이 들렸다. 전쟁이 아예 끝난 것도 아닌데 정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중동에서 선적해 수입해오는 석유가 우리나라 생활용품 물가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여파가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다가오게 되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현황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사재기를 부추기는 건 아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달 27일부터 국내 생산 나프타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수급 안정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체 수입선 확보도 병행 중이라고 한다. 전쟁이 영원히 갈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 원유 가격은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공황도, 무관심도 아닌 합리적 균형감각을 가지고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똑똑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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