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야경과 이국적인 정취 뒤편, 나가사키는 아픈 역사를 품은 도시다. 1945년 8월 9일 투하된 원자폭탄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 흔적을 따르는 다크투어리즘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폭심지 공원에서 시작해 부서진 성당의 잔해와 기적처럼 버텨낸 토리이를 거쳐 위로의 미식으로 마무리하는 여정이다.
비극의 한가운데서 평화를 기도하다
폭심지 공원
나가사키 평화공원, 원폭 자료관과 인접한 폭심지 공원(爆心地公園)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 중심지다. 당시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마쓰야마마치 상공 500m에서 떨어진 원폭은 반경 2.5km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기도의 구역’으로 불리는 이곳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면서 평화를 생각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공원 중앙에 우뚝 솟은 검은색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비' 앞에는 희생자들의 명부가 안치돼 있다. 그 곁에 서 있는 우라카미 천주당 유벽은 파괴된 성당의 남쪽 벽면 일부를 이축한 것이다.
특히 하천 둔치 쪽에 보존된 피폭 당시의 지층은 그날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열선에 녹아내린 유리와 식기, 부서진 집의 벽돌과 기와가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지금은 시모노카와 강변을 따라 친수 호안과 산책로가 정비되어 사람들의 편안한 쉼터로 사랑받고 있지만, 발밑에 남겨진 아픈 역사는 우리가 왜 일상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아울러 100m 거리에는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곳으로, 추도비 앞에는 물과 꽃, 소주가 놓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평화의 교실로 나아가다
시로야마 초등학교 평화기념관
폭심지에서 서쪽으로 불과 500m 떨어진 언덕 위, 원폭 투하 위치와 가장 가까웠던 시로야마 초등학교가 있다. 1945년 그날의 맹렬한 열선과 폭풍으로 철근 콘크리트 3층짜리 2개 동이 무참히 파괴됐다.
세월이 흘러 1984년 새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붕괴를 면한 북쪽 건물 일부를 피폭 유적으로 보존하게 됐다. 특히 실내장식을 위해 콘크리트 골조에 박아 뒀던 나무 벽돌이 까맣게 탄 채 남아 있어, 당시 고열 화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한다.
이후 위험 건물로 분류되어 14년간 철책에 둘러싸여 있다가 재학생들의 제안을 계기로 1999년 '시로야마 초등학교 평화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피폭 직후의 사진과 유물, 당시 건물 모형을 전시해 일반에 공개 중이다.
이곳과 더불어 폭심지공원,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까지 모두 둘러봤다면 다리도 아프지만,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다. 구 우라카미 천주교 종루로 가는 길에 있는 카페(Peace Town Cafe, Café Green Door 등)에서 쉬었다 가는 걸 권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울리는 희망
구 우라카미 천주당 종루
폭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 절벽 아래 작은 냇가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에 의해 우라카미 천주교회가 파괴되면서 튕겨 나간 북쪽 쌍탑의 종루다.
직경 5.5m, 무게만 약 50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잔해는 당시의 파괴력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사적이다. 그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났다. 파괴된 성당의 잔해 속에서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은 안젤루스(Angelus) 종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생존자들은 이 종을 1945년 12월 24일 통나무에 매달았고, 크리스마스이브 미사를 알리는 타종을 올렸다고 한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며 폐허 속에 울려 퍼진 희망인 셈이다. 1959년 성당은 새롭게 재건됐지만, 절벽 아래 남겨진 종루는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평화를 지탱하는 기적
산노 신사 외다리 토리이
나가사키의 상흔을 강렬하고도 묵묵하게 증명하는 장소가 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폐허가 된 도심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산노 신사(山王神社)의 '외다리 토리이(一本足鳥居)'다.
본래 산노 신사의 참배로에는 1번부터 4번까지 총 4개의 토리이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원폭의 폭풍으로 인해 대부분이 붕괴됐고, 폭풍 방향과 평행하게 서 있던 1번 토리이(一の鳥居)와 2번 토리이(二の鳥居)만이 간신히 파괴를 면했다.
그중 2번 토리이는 폭심지를 향하던 왼쪽 절반이 날아가고, 상단의 지붕돌이 비틀어졌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오른쪽 기둥 하나만 남은 외다리 상태로 꿋꿋이 버텨냈다. 이후 1962년(쇼와 37년)에 1번 토리이마저 교통사고로 무너지면서, 굳건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은 현재 이 2번 토리이가 유일하다.
현재 외다리 토리이 주변에는 산산조각이 난 토리이의 잔해와 깨진 현판이 함께 보존돼 있다. 또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남긴 평화의 종이학들이 토리이 곁을 지키고 있다. 이 외다리 토리이는 단순한 피폭 유적을 넘어, 핵무기 근절과 항구적인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상징물이다.
맛으로 기억하는 나가사키
소슈린
나가사키의 깊은 역사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겼다면, 맛집에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머릿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느라 소진한 체력을 나가사키의 맛으로 채운다. 메뉴는 이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리, 바로 나가사키 짬뽕과 사라우동을 포함한 중화요리다.
중화요리 전문점은 워낙 많은데, 이번에는 모든 교통이 모이는 나가사키역으로 향했다. 나가사키에서 중화요리 제품 판매점과 식당을 모두 운영하는 소슈린(蘇州林)이다. 이곳에서는 본고장의 깊은 맛을 자랑하는 나가사키 짬뽕과 사라우동(접시우동)은 물론 차항(볶음밥), 딤섬(춘권·쇼마이·동파육 찐빵 등), 칠리 새우 등을 선보인다.
해산물과 채소가 듬뿍 들어간 진한 육수의 나가사키 짬뽕, 바삭한 면 위에 걸쭉한 소스를 얹은 사라우동, 고슬고슬하게 볶은 차항은 맛이 없을 수 없는 메뉴다. 소슈린의 맛이 만족스럽다면 기차역에 있는 소슈린 기념품 존(お土産ゾーン) 매장에 들러보자.
나가사키 명물인 수제 중화 꽈배기 과자 '마화(麻花兒)'나 가쿠니만(동파육 찐빵), 월병 등을 기념품으로 구매할 수 있다.
푸른 바다와 노면전차의 낭만이 공존하는 나가사키는 항구 도시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도시 곳곳에 남겨진 아픈 파편들을 마주하고 나면, 이 아름다운 풍경이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잔해 속에서 꿋꿋하게 희망을 틔워낸 나가사키에서의 시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무게를 다시금 새겨보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