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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희의 기후 에너지 인사이트] 9. 안보의 현실 앞에 멈춘 이상의 시간표

2026.04.29. 08: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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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동아]

독일이 끄지 못했던 스위치

2023년 4월 15일, 독일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원자력발전소 세 기의 가동을 끝냈다. 이 장면은 흔히 "독일이 마침내 탈원전을 완성한 날"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 장면에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 마지막 세 기는 본래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었다. 폐쇄 시점을 미룬 이유는 그해 겨울 전력 부족의 두려움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이 30년간 다듬어 온 에너지 시간표의 어디에 균열이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환경적으로 가장 옳다고 믿어 온 일정표가, 에너지 안보라는 현실 앞에서 처음으로 멈칫거린 순간이었다.


출처=AI로 생성한 이미지
출처=AI로 생성한 이미지


재생에너지로 가는 다리

독일이 추진해 온 에너지 전환, 즉 에네르기벤데는 ‘재생에너지를 늘리고, 원전과 석탄을 줄이고, 그 사이를 천연가스가 잠시 메운다’는 정책이다. 이 구상의 핵심에 늘 등장한 단어가 '다리'였다. 천연가스가 바로 재생에너지 시대로 건너가기 위한 임시 다리라는 것이다. 구상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를 묻지 않은 채 출발했다. 다리의 한쪽 끝을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까지 독일이 들여오는 가스의 절반 이상이 러시아에서 왔다. 가정 난방, 화학산업의 원료, 철강과 유리의 고온 열원이 모두 같은 파이프에 연결돼 있었다.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은 이 에너지 의존을 '상업적 거래'라고 설명했다. 다리는 양쪽 끝이 모두 안전할 때 비로소 기능한다. 한쪽 끝을 상대방이 쥐고 있다면, 그건 다리가 아니라 인질에 가깝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 가스를 멈출 수 있는 손이 베를린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났다.

머뭇거린 시간

이후 몇 달은 독일 에너지 정책이 자기 자신과 협상하는 과정이었다. 2022년 초여름부터 러시아 가스 공급량은 계단처럼 줄어들었고, 그해 9월 노르트스트림 1의 공급은 무기한 중단됐다. 곧이어 두 가스관이 해저에서 폭발로 크게 손상되며 파이프라인 시대 자체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전쟁 전까지 독일에는 자체 LNG 수입 터미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해 12월, 빌헬름스하펜에 부유식 터미널이 급히 설치됐다. 폐쇄가 예정됐던 석탄발전소들이 다시 불려 나왔고, 원전 세 기의 수명은 이듬해 봄까지 연장됐다. 어제까지 ‘이념적으로 가장 옳다’고 여겼던 일정표가, 오늘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하나씩 다시 짜여 갔다.

이 사건은 에너지 정책의 세 축인 안보, 비용, 환경 가운데 환경에만 집중했을 때, 나머지 둘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독일이 과소평가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의 위험과 비용이었다.

청구서를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

독일 이야기를 남의 일로 두기에, 한국의 조건은 너무 비슷하다. 동시에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한국 역시 제조업이 경제의 척추를 이루는 나라이고,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철강과 석유화학과 배터리처럼 전력과 열에 민감한 산업이 그 위를 지나간다. 반면에 독일에는 위기의 순간 전기를 빌려올 수 있는 이웃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력망은 사실상 어떤 이웃과도 연결돼 있지 않다. 국제기구가 한국 에너지 시스템을 묘사할 때 '에너지 섬'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이처럼 한국은 에너지 트릴레마*를 더 좁은 운동장에서 풀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재생이냐 원전이냐' 같은 양자택일은 아닐 것이다. 더 정확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다리를, 어느 방향으로, 어느 속도로 놓고 있는가?그 다리의 반대편 끝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그 다리가 끊겼을 때 우리는 어디로 우회할 수 있는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독일의 숄츠 총리가 '시대전환(Zeitenwende)'을 선언했다. 그것은 21세기의 에너지 수입국, 제조업 강국, '에너지 섬'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독일이 그 청구서를 쓰라리게 받아 든 지금, 한국에는 다행히 대비할 약간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가 앞으로 대한민국이 받을 청구서의 무게를 결정할 것이다.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는 에너지 안보(Security), 에너지 형평성(Equity), 환경적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3가지 상충하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을 의미한다.

글 / 정석희 전남대학교 환경에너지공학과 교수


출처=전남대학교
출처=전남대학교


정석희 박사는 전남대학교 교수이자 에페트솔루션(EFET Solutions) 창업자 겸 CEO로, 미생물 전기화학 시스템 기반 그린 하폐수처리 및 에너지 전환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국가 장학 지원으로 해당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환경 분야에서 3년 연속 스탠포드대 ‘세계 상위 2% 과학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등 학계와 산업계를 아우르며 기후 에너지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기후에너지환경부 산하 광주녹색환경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정리 / IT동아 김영우 기자 (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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