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전 차량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 이후 억울함을 호소하는 운전자들이 늘고 있다. (오토헤럴드 AI)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우회전 표시등 녹색 신호에 맞춰 느린 속도로 방향을 튼 운전자.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뀐 것을 보고 정지했다.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모두 건넌 후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뀐 것을 보고 천천히 출발했다. 그 순간 경찰이 손을 들었다. 이 운전자는 신호 지시 위반이라는 이유로 딱지를 떼였다.
생전 처음 범칙금 고지서를 받은 운전자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고 경찰 역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해결사로 불리는 채널 등 이곳저곳에 제보한 영상을 본 전문가들로 그랬다. 결국 경찰이 범칙금 고지서를 ‘오손 처리’하면서 없던 일이 됐지만 이 과정에서 운전자가 겪은 시간과 심리적 부담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경찰이 지난 4월부터 우회전 단속을 강화한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경찰조차 헷갈려하는 지금의 우회전 규칙이 얼마나 큰 혼란을 낳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억울한 단속, 반복되는 혼란
경기연구원이 2024년 도로교통법 개정에 맞춰 상황별 우회전 방법을 묻는 질문에서 정답을 모두 맞힌 운전자는 600명 중 단 0.8%인 1명에 불과했다. (경기 연구원)
2023년 개정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은 우회전 방법을 비교적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적색 신호일 때는 일단 정지해야 하고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거나 건너려는 경우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규칙이지만 그러나 실제 도로 위에서는 이 규칙이 전혀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운전자는 짧은 순간에 여러 요소를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전방 차량 신호가 적색인지 녹색인지, 우회전 신호등이 있는지, 횡단보도 신호는 어떤지, 보행자가 실제로 건널 의사가 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특히 ‘건너려는 의사’라는 모호한 기준은 운전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가도 되는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정지해 있는 차량때문에 경적이 울리고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와 때 아닌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그대로 달렸다가 단속에 걸리기도 한다. 건너가시라고 손짓을 했지만 보행자가 먼저 가라고 양보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헷갈리는 규정으로 인한 혼란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경기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서 상황별 우회전 대응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응답자는 0.3%에 불과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운전자가 정확한 기준을 알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셈이다. 법을 어기고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속을 담당하는 경찰 역시 현장에서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에서도 같은 위반 사항에 대해 판결이 다른 사례도 나오고 있다. 우회전시 직진 차량과 사고가 나면 신호위반에 따른 가해차량이 되고 있어 결국은 운전자가 알아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같은 상황에서도 단속 여부가 달라지는 일, 법원 판례까지 상충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애먼 운전자들이 법도 모르는 경찰 단속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일본, 극도로 단순한 시스템의 효과
일본의 신호등. 대부분 교차로의 신호등은 적색, 황색, 녹색으로 구성돼 있으며 적색에는 모든 방향이 정지하고 녹색에는 어느 방향으로든 진행이 가능한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다. (김흥식 기자)
이쯤에서 시선을 다른 나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교통 신호 체계는 한국보다 훨씬 단순하다. 신호등 대부분이 적색, 황색, 녹색으로만 구성돼 있고 크거나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는 따로 진행 방향을 표시해 주는 신호등을 추가했다.
이 신호등은 단순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규칙으로 작동한다. 전방이 적색 신호일 경우 진행 방향과 관계없이 모든 차량은 반드시 정지해야 한다. 우회전이나 좌회전도 예외가 없다. 반대로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면 직진과 좌회전, 우회전이 모두 허용된다.
우회전 신호는 따로 없다. 교차로 전방 차로에 직진차가 없거나 안전한 거리에 있다면 녹색 신호에서 언제든 가능하다. 우리식으로 보면 대부분 교차로에서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한 셈이다. 복잡한 교차로에서는 좌회전, 우회전, 직진 표시 신호등을 따로 운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반대 차로의 직진 차량이 많아 안전하게 우회전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방향의 전용 녹색 신호로 진입을 가능하게 해 주는 구조다. 우리식으로 쉽게 설명하면 전방 신호등이 녹색이면 어떤 교차로에서든 우회전은 물론 비보호 좌회전까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는 적색에서도 주행이 가능한 방향을 따로 표시해 준다. (김흥식 기자)
이 단순한 신호체계만 익히면 한국보다 일본에서의 운전이 쉬워진다. 차량들이 일시에 모든 방향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교차로의 정체가 쉽게 해소되는 장점도 있다. 운전자들은 좌회전시 횡단보도의 녹색 신호에 대비하는 습관도 갖게 되고 따라서 억울하게 단속되는 일도 발생할 여지가 없다.
물론 이때도 다른 차량과 보행자를 살피는 기본적인 주의 의무는 따르지만 적어도 ‘지금 가도 되는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신호가 대신 내려준다. 우리 운전자들 처럼 우회전 또는 좌회전 신호, 표현도 애매한 '직좌'니 뭐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어느 방향으로 회전을 하든 적색에 무조건 멈추고 녹색에 가면 된다.
이러한 구조는 운전자의 불필요한 고민을 줄여 주게 된다. 규칙이 단순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단속 기준 역시 명확해 분쟁의 여지가 없다. 대신 횡단보도나 일반 도로에서 발생한 보행자 사고는 철저하게 운전자 과실에 무게를 둔다. 보행자 중심의 교통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도 이렇게 단순하지만 명확한 신호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운전자 판단이 아닌 신호 체계의 정비 필요
신호 체계를 보다 단순하게 만들고 도로 구조를 직관적으로 개선하며 보행자 보호를 명확한 규칙으로 정착시키는 방향이 필요해지고 있다. (오토헤럴드 AI)
반면 한국의 신호 체계는 매우 복잡하다. 좌회전 전용 신호, 조건부 우회전, 보행자 신호와 차량 흐름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구조는 교통량이 많은 도시 환경에서 흐름을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운전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판단을 요구한다.
경찰이 상황별로 우회전 방법을 정리한 것만 7~8개나 된다. 봐도 헷갈리고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최근 우회전 단속이 강화되면서 사고 예방 효과에 대한 기대도 나오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규칙이 복잡한 상태에서 단속만 강화될 경우, 억울한 사례는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법은 지키기 쉬워야 의미가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법은 결국 ‘운에 맡기는 규칙’으로 전락하기 쉽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속의 강도가 아니라 시스템의 정비다. 신호 체계를 보다 단순하게 만들고 도로 구조를 직관적으로 개선하며 보행자 보호를 명확한 규칙으로 정착시키는 방향이 필요하다. 경찰도 헷갈려하는 복잡한 규칙을 다 따르면서 상화에 맞춰 운전자가 판단해야 법을 지킨 것이 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법대로 운전했는데도 단속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경찰조차 헷갈리는 규칙을 시민에게 완벽히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단속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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