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그룹 창업자 토요다 사키치(왼쪽)와 아들인 토요다 키이치로. 사키치가 자동직기 발명으로 토요타의 기술 철학과 기반을 만들었다면 키이치로는 자동차 시대를 예견하고 직물 회사였던 토요타를 자동차 기업으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토요타)
[일본 나고야=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이야기의 시작은 효심이 가득한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1867년 일본 시즈오카현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토요다 사키치는 매일 밤을 세워가며 베틀 앞에 앉아 직물을 짜던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농사와 목수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어린 사키치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배울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고된 노동을 보며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일을 편하게 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다.
당시 일본이 근대 특허 제도를 도입하자 발명가를 꿈꾸기 시작한 사키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목수 기술을 바탕으로 직접 직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베틀은 양손과 양발을 모두 사용해야 했지만 사키치가 만든 목재 직기는 한 손만으로도 작업이 가능했다.
단순한 구조였지만 작업 효율은 50% 이상 향상됐고 직물 품질도 좋아졌다. 오늘 날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로 성장한 '토요타(Toyota)'는 이렇게 한 청년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발명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했다.
‘카이젠(改善)’과 ‘지도카(自働化)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 직물기계관. 초기 목재 직기부터 자동직기까지 토요타의 기술 진화 과정을 실제 작동 시연과 함께 볼 수 있다. (김흥식 기자)
1891년, 사키치는 23세의 나이로 첫 특허를 취득한다. 이후에도 그는 개선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나무 부품 하나까지 끊임없이 손보며 작업 효율과 직물 품질을 높였고 증기를 이용한 동력 직기에 이어 마침내 실이 끊어지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기계가 스스로 멈추는 G형 자동직기를 완성했다.
사키치가 처음 목재 직기를 발명한 이후 약 30년 만의 일이었다. 이 자동직기는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토요타를 일본 대표 기계 회사로 성장시켰다. 당시 영국 플랫 브라더스(Platt Brothers)에 특허권이 판매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이 자금은 훗날 자동차 개발의 종잣돈이 된다.
일본 나고야의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에는 이런 토요타의 기술 진화 과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호라 가즈히코 관장은 “문제가 생기면 자동으로 멈추고 원인을 찾아 개선한다. 지금 토요타 생산방식의 기본은 사실 이 직기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사키치가 직접 개선 흔적을 남긴 직기들이 차례로 전시돼 있다. 작은 목재 부품 하나의 위치를 바꾸고 셔틀의 움직임을 손보며 작업 속도와 편의성을 높여간 흔적들이다. 직기들을 따라 걷다 보면 지금의 토요타를 만든 핵심 가치인 ‘카이젠(改善·지속적 개선)’과 ‘지도의카(自働化·사람을 대신해 생각하는 자동화)’ 철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자연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섬유산업의 쇠퇴, 자동차 시대를 예견한 키이치로
토요타 자동차 개발 초기, 키이치로와 엔지니어들이 자전거용 엔진 개발과 자동차 동력 연구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김흥식 기자)
자동차의 꿈은 사키치의 아들 토요다 키이치로에게서 시작된다. 사키치가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발명가였다면 키이치로는 도쿄대 공학부 출신의 엘리트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그의 전공 역시 아버지 사키치의 바람에 맞춘 섬유 기계였다.
키이치로가 생각을 바꾼 계기는 미국과 유럽 시찰이었다. 1920년대 미국 거리에는 이미 자동차가 넘쳐나고 있었다. 포드의 컨베이어 생산 시스템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며 가격을 낮췄고 자동차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 이동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반면 당시 일본은 자동차 산업 기반 자체가 거의 없었다. 거리에는 포드와 GM 차량이 다녔고 일본 기업들은 엔진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키이치로는 미국에서 자동차가 앞으로 사회를 바꿀 산업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동시에 산업혁명의 출발점이었던 영국의 섬유 산업이 점차 쇠퇴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는 미래 산업이 더 이상 직기가 아니라 자동차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결정적 계기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었다. 철도망이 끊기자 일본 정부는 미국산 포드 T형 차량 수백 대를 긴급 수입해 버스와 화물차로 개조했다. 자동차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기반 산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부수고 분해하고 철판을 손으로 두드려 만든 시험차
토요타 최초의 본격 승용차 개발은 목재 프레임과 수작업 판금 방식으로 차체를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김흥식 기자)
키이치로는 이후 미국차를 직접 사들여 분해했고 포드와 GM 차량의 엔진과 변속기, 섀시 구조를 하나하나 연구했다. 단순한 모방이 목적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설계됐는지 이해하고 일본 현실에 맞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1933년 키이치로는 토요타 자동직기 제작소 안에 자동차 부서가 설치했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엔진이었다. 엔진 핵심 부품인 실린더 블록은 내부에 냉각수 통로가 있는 복잡한 구조였는데 당시 일본에는 이를 정밀하게 주조할 기술이 거의 없었다.
금속 내부에 기포가 생기거나 균열이 발생하는 일이 반복됐다. 전시장 한편에는 당시 실패작 엔진 부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옆에는 고로에서 쇳물을 녹여 주형에 붓는 초기 주조 공정도 재현돼 있다. 작업자들이 뜨거운 쇳물을 직접 옮기고 금형에 부어 넣는 장면은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기초 기술부터 다시 쌓아야 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동차용 강판 기술이 부족했던 당시, 키이치로는 자동차 핵심 부품 생산을 위해 토요타가 기초 소재·주조 기술 확보에 매달렸다. (김흥식 기자)
철강 문제는 더 심각했다. 자동차는 직기보다 훨씬 높은 강성과 내구성을 요구했지만 일본에는 자동차용 강판 기술이 부족했다. 키이치로는 결국 자체 재료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것이 훗날 토요타 계열 철강 기업의 출발점이 된다.
차체 제작 역시 쉽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미국처럼 거대한 프레스 설비가 없었다. 금형 제작에만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생산 기술도 부족했다. 결국 초기 시험차 일부는 기술자들이 철판을 손으로 두드려 만들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방식이지만 이 과정에서 토요타는 현장 중심의 기술 축적 문화를 만들어간다.
오호라 가즈히코 산업박물관 관장은 토요타의 초기 자동차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토요타에는 세 가지 'I'가 있다. 첫 번째는 좋은 것을 흉내내는 'Imitation(모방)', 두 번째는 더 좋게 개선하고 개량하는 'Improvement' 그리고 'Innovation' 즉 혁신이다. 토요타는 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전쟁과 위기, 필요한 만큼 효율적으로 'Just In Time'
1936년 개발된 토요타 AA형 승용차. 토요타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며 생산한 초기 국산 승용차다. (김흥식 기자)
천신만고 끝에 토요타가 자동차 부품과 엔진 개발에 성공했지만 처음부터 승용차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승용차보다 물류용 트럭 생산을 우선 요구했다.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사람을 태우는 승용차보다 군수 물자와 산업 자재를 실어 나를 운송 수단이 훨씬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G1 트럭이다. 개발 기간은 불과 9개월, 당연히 고장이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토요타의 대응 방식이었다. 고객 불만이 들어오면 키이치로는 직접 현장으로 향했다. 새 차량을 몰고 가 화물을 다시 옮겨 싣고 고장 난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원인을 확인해 개선하기를 반복했다.
이 경험은 토요타 품질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단순히 공장에서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실제 사용하는 현장에서 문제를 확인하고 개선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토요타의 ‘겐치겐부츠(現地現物·현장과 현물을 직접 확인한다)’ 철학 역시 여기에서 비롯됐다.
오호라 가즈히코 관장이 토요타가 초기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직접 제작한 엔진 실린더 블록 구조와 냉각수 통로 설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흥식 기자)
1938년 토요타는 본격 자동차 공장을 완성하며 자동차 기업으로 도약하기 시작했지만 시대는 토요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며 자동차 산업은 군수 체제로 편입됐고 전후 일본 경제는 붕괴 상태에 가까웠다.
문제는 단순한 판매 부진이 아니었다. 차량을 팔아도 대금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고 자금난은 심각해졌다. 결국 토요타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창업자 키이치로는 경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 위기 속에서 토요타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무조건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이후 토요타는 미국 슈퍼마켓의 재고 운영 방식에서 힌트를 얻어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시점에 공급하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 생산방식을 발전시킨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생산라인을 멈추고 원인을 해결하는 ‘지도의카’ 개념이 더해지면서 훗날 세계 제조업 혁신 사례로 평가받는 토요타 생산방식(TPS)이 완성된다. 미국식 대량생산과 달리 재고를 최소화하고 현장 작업자까지 개선 과정에 참여시키는 방식이었다.
토요타도 위기는 있었다... 하이브리드로 반전
토요타 자동차 역사관 전경. 초기 트럭과 승용차 차체 구조를 통해 토요타 자동차 기술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김흥식 기자)
토요타는 1960년대 코롤라(Corolla)를 앞세워 대중차 시대를 열었고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에는 연비 좋은 일본차 수요가 폭발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급성장한다. 특히 토요타는 단순히 저렴한 차가 아니라 ‘잘 고장 나지 않는 차’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글로벌 시장 공략과 함께 렉서스(Lexus) 브랜드 구상이 시작됐고, 1997년에는 세계 최초 양산형 하이브리드 차량인 프리우스(Prius)를 내놓으며 또 한 번 자동차 산업의 흐름을 바꾼다.
당시만 해도 하이브리드 기술은 비현실적인 실험으로 여겨졌지만 토요타는 미래 환경 규제와 에너지 문제를 예측하고 장기 투자에 나섰다. 초기에는 수익성이 낮았지만 결과적으로 프리우스는 친환경차 시대의 상징이 됐다.
오늘날 토요타는 하이브리드 기술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수소연료전지차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특정 기술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다 시장 상황과 현실 조건에 맞춰 다양한 해법을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 역시 토요타식 사고방식의 연장선이다.
감사개량부 위원회에 호출된 키이치로의 운전기사
기념관의 마지막에는 키이치로의 생전 어록과 그와의 기억을 담은 깃발들이 전시돼 있다. (김흥식 기자)
토요타의 역사는 단순한 자동차 성공 신화가 아니다. 본질은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능력’에 있다. 토요타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기술 강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보다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자본도 부족했고 기술도 부족했다.
하지만 토요타는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멈추고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생산 현장의 작은 아이디어를 존중했고 작업자까지 개선 과정에 참여시켰다.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단순한 자동차 박물관이 아니라 실패를 축적하고 개선을 반복하며 결국 혁신에 도달했던 사람들의 기록 그 자체였다. 기념관의 마지막에 전시된 키이치로의 생전 어록과 그를 추억하는 깃발에는 토요타의 또 다른 철학이 담겨 있었다.
"키이치로 회장은 자동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매일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며 그의 운전 기사를 감사개량부 위원회에 부르기도 했다.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말단 사원의 의견을 적극 도입했고 각자의 일을 구분짓거나 하지 않았다"(사이토 쇼이치 전 일본 자동차공업 회장)
(김흥식 기자)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은 토요타 그룹의 출발점이 된 옛 방직공장 터에 세워졌다. 1911년 토요다 사키치가 자동직기 연구와 생산을 위해 설립한 ‘토요타 자동직기 제작소 사코 공장’ 부지를 활용해 조성됐고 1994년 키이치로 탄생 100주년에 맞춰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단순한 자동차 전시장이 아니라 토요타가 직기 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붉은 벽돌의 옛 공장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 사용하고 있으며 직기 전시관과 자동차 전시관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실제 기계를 작동시키며 시연하는 방식이 특징으로, 초기 방직기계와 키이치로와 그의 직원들이 손으로 두들기며 만들었던 기구들과 엔진 주조, 프레스, 용접 공정 등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다.
현재 토요타 그룹 계열사들이 공동 운영하고 있으며 연간 방문객은 약 46만 명 수준이다. 1994년 개관 이후 누적 방문객은 2025년 기준 약 800만 명에 이른다. 위치는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니시구 노리타케신마치로 나고야역에서 메이테쓰선으로 한 정거장 거리인 사코역에서 도보 3~5분 정도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000엔(약 9300원)이며 운영 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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