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주 오랜 버킷리스트는 모니터 속 세상에서 시작됐다.
이십 년 만의 답사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몇 가지 뜬구름 잡는 꿈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동굴 탐험가’였다. TV에서 동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이후 한동안 손전등을 지니고 다녔고, 일부러 좁은 골목 구석구석을 누볐다. 심지어는 나뭇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 무렵, 내 마음을 사로잡은 풍경이 하나 더 있었다. 출처는 다름 아닌 윈도우 배경화면이었다. 휘몰아치는 물결무늬를 입은 거대한 절벽, 그 사이로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 수십 가지 색이 거대한 협곡을 채우고 있었다. 어린 눈에도 그 오묘함은 선명했다. 구글 이미지 검색도 없던 시절, 한참이나 인터넷과 씨름한 끝에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답을 찾았다. 그 블로거에 의하면, 그곳은 바로 ‘그랜드캐년’이었다. 그렇게 내 꿈은 ‘동굴 탐험가’에서 ‘탐험가’로 더 넓어졌다.
내 꿈을 바꿨던 사진 한 장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내가 ‘그랜드캐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풍경은 사실 ‘앤텔롭캐년’이었던 것이다. ‘캐년(Canyon)’이라는 영어단어도 생소했던 초등학생은 그제야 미국의 협곡들을 자세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떤 협곡은 수평으로 쌓인 지층을 수직으로 깎아내려 장엄한 풍경을 연출했고, 또 다른 협곡은 침식을 견디고 남은 단단한 암석이 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같은 대륙, 같은 하늘 아래 이토록 다른 지형이 펼쳐져 있다니. 나이를 먹으면서 꿈은 수차례 바뀌었지만, 언젠가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바람은 늘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미국 땅을 밟았다.
시간을 깎아 만든 대지의 기록
그랜드캐년
Grand Canyon
이름부터 광활하다. ‘크다’는 말로는 모자라 ‘웅장하다(Grand)’고 불러 봐도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미국 애리조나주 내 약 446km에 걸쳐 뻗어 있는 그랜드캐년은 최대 너비 29km, 평균 깊이 약 1.6km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약 600만년 동안의 지질학적 활동과 콜로라도 강에 의한 침식으로 형성됐는데, 선캄브리아대부터 신생대까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캄브리아대부터 고생대까지의 지층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그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됐다.
그랜드캐년은 위치에 따라 크게 사우스, 노스, 이스트, 웨스트 림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데, 가장 대중적인 곳은 사우스 림(South Rim)이다. 사계절 내내 개방해 언제든 찾을 수 있고, 차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랜드캐년의 웅장함을 두 눈에 담고 싶다면, 대표적인 전망대인 마더 포인트를 추천한다. 이곳에 올라 장엄한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현실감이 들지 않고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 차로 5시간을 넘게 달려오며 가이드님께 크다는 얘기를 거듭 들었건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지나치게 넓으니 대자연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빛이 내려앉는 곳
앤텔롭캐년
Antelope Canyon
보자마자 알았다. 물이 깎아 낸 절경이라는 걸. 앤텔롭캐년은 수백만 년에 걸쳐 급류가 사암층을 파고들며 만들어 낸 좁고 깊은 협곡이다. 크게 어퍼(Upper)와 로워(Lower)로 나뉘는데, 어퍼캐년은 입구가 평탄하고 내부가 넓어 비교적 걷기 편하고 로워캐년은 좁은 통로와 계단이 이어져 탐험하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나바호 원주민 보호구역 내에 위치해 반드시 공인된 나바호 원주민 가이드와 함께 방문해야 하는데, 미팅 포인트에서 원주민 가이드가 운전하는 지프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탐험은 시작된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거대한 요새처럼 우뚝 솟은 협곡으로 들어갔다. 두 발로 좁은 틈 사이에 들어가는 순간, 숨을 죽였다. 앤텔롭캐년은 햇빛이 사이사이로 스며들면서 매 시간마다 다른 풍경을 연출하는데, 고요한 아침에 방문하면 가까스로 한 줄기씩 새어 나오는 빛을 조심스레 따라가게 된다. 한 시간 남짓 투어 동안 해가 점점 떠오르면서 거대한 미로 같은 협곡에도 조금씩 색이 입혀졌다. 밝아질수록 물이 수없이 흐르며 남긴 곡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둘러싼 협곡은 어떨 때는 주황빛이었다가 어느 순간 분홍빛이었다가 또 시선을 돌리면 은은한 보랏빛에 가까워졌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원주민 가이드가 손으로 가리키며 암석의 모양을 설명해 주는데, 고개를 들어 사람 눈 모양을 마주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실제로 본 앤텔롭캐년은 어릴 적 윈도우 배경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더 다채롭고, 신비로웠다.
붉은 돌기둥 조각의 땅
브라이스캐년
Bryce Canyon
빼곡하게 솟아오른 붉은 돌기둥에 압도됐다. 해발 2,400~2,700m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 브라이스캐년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이곳은 물, 얼음의 동결·융해 작용에 의해 퇴적암이 침식되어 만들어진 지형인데, 단단한 지층과 무른 지층이 서로 다른 속도로 깎이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아 뾰족한 기둥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고. 이 기둥을 ‘후두(Hoodoo)’라고 하는데, 움푹 패인 분지 안에 수천 개의 돌기둥이 솟아오른 모습이 장관이다. 특히 붉은색, 주황색, 흰색이 층을 이루는 색감이 눈을 사로잡는다.
투어 일정이 빡빡했던 터라 환한 대낮에 이곳을 방문했지만, 사실 브라이스캐년은 해가 뜰 즈음에 진가를 발휘한다. 움푹 패인 분지 지형 덕분에 지평선 너머로 해가 뜨는 장면이 또렷하게 펼쳐지고, 수천 개의 후두가 햇빛을 받아 더욱 붉은 빛으로 물든다고, 트레일 코스를 따라 협곡 아래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기둥들 사이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설렘을 만끽할 수 있다.
물과 바위가 그린 완벽한 곡선
파웰호수 & 홀스슈밴드
Lake Powell & Horseshoe Bend
대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손길이 빚어낸 이색적인 풍경이 공존한다. 이름 그대로 말발굽 모양을 닮은 ‘홀스슈밴드’는 콜로라도 강이 급격하게 굽이치며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지표면을 깎아 낸 하나의 작품이다.
강물로부터 약 300m 높이의 수직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짙은 초록빛 강물과 붉은 암벽의 대비는 매우 아찔한데, 이 스릴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로 늘 붐빈다.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을 안 찍어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까이 가기는 겁이 나고.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기어가 말발굽 모양의 이색적인 풍경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역시나, 가이드가 건네준 사진 속에는 전혀 폼나지 않는 겁쟁이가 있었다.
홀스슈밴드를 뒤로하고 거대한 오아시스 같은 파웰 호수로 향했다. 1960년대 댐 건설로 형성된 인공호수로, 물을 채우는 데만 무려 17년이 걸렸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공호수로, 여름철에는 보트투어도 가능하다고. 자연이 조각한 지형과 인간이 만든 호수를 나란히 바라보며, 내 오랜 버킷리스트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서부 캐년투어
미국 서부의 캐년들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투어 상품을 이용하면 편하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어는 LA 혹은 라스베이거스 출발로 나뉘는데, 당일 코스부터 2박 3일까지 다양한 일정을 제공한다. 차를 렌트해서 돌아봐도 되지만, 워낙 넓고 방대해서 지리를 잘 아는 전문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게 편리하다(운전의 피로도 덜 수 있다). 그랜드캐년, 엔텔롭캐년, 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 홀스슈밴드, 파웰호수 등을 선택적으로 돌아보는 구성으로, 당일투어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캠프파이어와 바비큐 식사를 포함해 색다른 추억을 쌓을 수 있다.
글·사진 이은지 에디터 강화송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