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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하고 무거운 원유의 경제학, 가벼울수록 더 비싸다

2026.05.27. 13: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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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분위기 파악 못 하지. 딱 보면 모르겠어? 지금 심각한 상황이잖아. 할 말이 있어도 좀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어휴…. 넌 말이야. 사람이 가벼워.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매사에 진중하질 못하다고!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고, 진득하게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너처럼 가벼운 사람은 딱 질색이야. 더 이상 못 참겠다. 우리 그만 헤어져.” 
“가벼워? 누가? 내가? 배가 이렇게나 볼록 나온 내가 가볍다고? 도대체 네가 말하는 가벼움의 기준이 뭔데? 너도 그렇고, 이전 애인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무거운 걸 좋아하는 거야? 흥! 칫! 뿡! 그런 너는? 너는 무거워? 무거워서 좋겠다. 잘 가거라, 무거운 나의 옛 친구여.”
후. 웬일인지, 이십여 년 전의 뼈아픈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가벼움과 무거움. 측정할 수 없는 그 상대적인 무게 비교로 인해, 괜스레 마음고생했던 그때가 떠오르는 오늘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정말로 ‘무거운 것을 선호하는’ 존재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아주 전략적으로. 바로 대한민국의 정유사들이 그렇다. 그렇다. 그들은 필자의 옛 친구들이 그러했던 것보다 무거운 걸 더 좋아하곤 한다.
그리고 그 ‘무거운 것을 향한 집착’이 지금, 이 순간, 전 세계를 뒤흔드는 에너지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뜨겁게 소환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5달러를 돌파했고, 국내에서는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까지 거론될 만큼 글로벌 석유 파동의 여파가 거세게 일고 있다. 기초 석유화학 제품의 생산 차질은 물론, 비료 품귀 현상과 항공유 부족 사태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연쇄적인 파장이 관찰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유의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무엇이고, 한국 정유사들은 왜 그 무거운 쪽에 오래도록 기대어 온 것일까. 천천히 따져보자.
사진 1.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가 고조되자 전 세계적으로 원유 파동이 일고 있다. ⓒShutterstock
왜 한국 정유사는 중질유를 선호할까?
깊은 땅속에서 끌어올린, 까맣고 끈적끈적한 액체, 우리는 이를 ‘원유’라 부른다. 그런데 이 원유가 다 같은 원유가 아니다. 산지에 따라 그 성질이 천차만별이다. 원유의 등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API 비중’과 ‘황 함유량’이다. API 비중은 미국석유협회(API)가 제정한 비중 측정 단위로, 가벼울수록 수치가 높고 무거울수록 수치가 낮다. 일반적으로 API 비중이 33도 이상이면 ‘경질유(Light Crude Oil)’, 30도 이하면 ‘중질유(Heavy Crude Oil)’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경질유와 중질유, 둘 중 어느 쪽이 더 비쌀까? 정답은 경질유다. 맑고 가벼우며 유동성이 좋은 경질유는 황 함량이 적어 정제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고, 휘발유나 나프타, 항공유 등 값비싼 석유 제품을 많이 얻을 수 있어 시장에서 높은 몸값을 자랑한다. 반면 중질유는 검고 무거우며 끈적거린다. 황이나 중금속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정제하기 까다롭고, 아스팔트나 벙커C유 같은 저부가가치 제품이 주로 나와 가격이 저렴하다. 사람 사이에서는 진중하고 무거운 것이 미덕일지 몰라도, 원유 시장에서는 가볍고 맑은 것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등장한다. 한국의 정유사들은 이 값싸고 다루기 까다로운 중질유를 열렬히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고도화 설비(중질유 분해시설)’에 있다. 과거에는 중질유를 정제하면 찌꺼기 기름인 벙커C유(중유)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한국 정유사들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이 찌꺼기 기름을 다시 분해하여 휘발유나 경유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의 연금술, 즉 고도화 설비를 구축했다. 이 설비 덕분에 값싼 중질유를 수입해 비싼 경질유 못지않은 고급 석유 제품을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료비는 낮추고 제품 가치는 높이는, 이른바 ‘정제 마진’극대화를 이룬 셈이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가 중동에 쏠려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중동 원유가 주로 중질유이고, 우리 정유 설비는 그 중질유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거운 것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한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는 순간, 그 의존도는 곧바로 치명적인 약점으로 돌변한다. 미국산 경질유 수입을 늘리려 해도, 운송비 부담은 물론이고 기존 정유 설비가 중질유 처리에 최적화되어 있어 단기간에 수입국을 다변화하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중동까지는 20일, 미국까지는 50일이 걸리는 뱃길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진 2. 한국의 정유사들은 중질유를 정유하는 시설이 발달해, 중질유를 선호한다. 다만,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중질유 수급에 차질을 겪고 있다. ⓒShutterstock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든 원유 제품들
그렇다면 수입된 원유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실생활에 들어오는 것일까? 그 핵심은 바로 ‘분별 증류’에 있다. 원유를 약 350℃까지 가열하여 거대한 증류탑으로 보내면, 끓는점의 차이에 따라 마법 같은 분리 작업이 시작된다. 증류탑은 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치 목욕탕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것처럼, 기름 속 성분들도 자기만의 끓는점에 맞춰 지정된 층에 차례차례 도달하는 것이다.
사진 3. 원유를 정제하면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원유의 18%를 차지하는 나프타를 가공하면 다양한 물품을 제작할 수 있다. ⓒShutterstock
가장 끓는점이 낮고 가벼운 LPG(액화석유가스)는 탑의 맨 꼭대기에서 기체 상태로 빠져나온다. 그 아래로 휘발유나프타(75~150℃), 항공유와 등유(150~250℃), 경유(250~350℃)가 차례로 층을 이루며 분리된다. 가장 무겁고 끓는점이 높은 아스팔트와 찌꺼기 기름은 탑의 맨 아래에 남게 된다. 증류탑 안에서도 가벼운 것은 위로, 무거운 것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란 참으로 일관된다.
이 증류 과정에서 얻어지는 ‘나프타(Naphtha)’는 전체 원유의 약 18%를 차지하며, ‘화학 산업의 쌀’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프타를 900℃ 이상의 고온에서 분해(Naphtha Cracking)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뷰타다이엔 같은 기초 화학 원료가 쏟아져 나온다. 이 원료들을 마치 레고 블록처럼 이어 붙이면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같은 합성수지(플라스틱)가 탄생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닐봉지, 플라스틱 용기, 옷을 만드는 합성 섬유, 자동차 타이어에 쓰이는 합성고무까지, 이 모든 것이 나프타에서 비롯된다. 최근 원유 수급 불안으로 나프타 가격이 오르자, 플라스틱 용기 확보에 비상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나프타 바로 아래층에서 추출되는 등유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어는점을 낮추는 특수 처리를 거쳐 ‘항공유’로 재탄생한다. 고도 1만 미터 상공의 영하 50℃ 추위에서도 얼지 않고 엔진을 힘차게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항공유 부족 사태가 이어지는 지금, 하늘길이 흔들리는 이유도 결국 이 증류탑 아래에서 시작된 이야기인 셈이다.

이십여 년 전, 필자의 곁을 떠나간 그들은 하나같이 필자의 가벼움을 탓했다. 하지만 원유 시장에서는 그 가벼운 것이 오히려 더 비싸고,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중질유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 경질유 같은 필자가 번번이 차인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의 부인만큼은 필자의 가벼움을 탓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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