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순수 전기차 '루체' 전기 모터의 강력한 성능과 기존의 틀을 깬 디자인에도 페라리 고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페라리)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첫 순수 전기차 '루체(Luce)'를 공개한 페라리가 브랜드 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 “전기 페라리는 페라리가 아니다”라는 반응과 함께 디자인과 실내 구성 등 모든 면에서 "페라리 답지 않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1947년 엔초 페라리가 창립한 페라리는 지금까지 고회전 자연흡기 엔진 특유의 폭발적인 배기음과 기계적 감성, 레이싱 DNA로 강력한 팬덤을 거느린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슈퍼카 브랜드다.
이런 페라리가 전기차를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팬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감성 중심의 고성능 스포츠카로 확실한 차별성을 유지해왔던 페라리가 기존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변화는 페라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람보르기니, 맥라렌, 포르쉐 등 유럽 슈퍼카 브랜드 대부분이 순수 전기차 개발에 뛰어들었거나 전동화 전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초럭셔리 브랜드들도 마찬가지다. 롤스로이스는 스펙터를 출시했고 벤틀리 역시 전기차 전환 계획을 공개했다.
브랜드 정체성보다 중요해진 현실적 과제
페라리의 상징인 자연흡기 V12 엔진. 유럽의 강화되는 탄소 배출 규제로 인해 슈퍼카 브랜드들도 전동화 전환 압박을 받고 있다. (페라리)
대중 브랜드와 달리 슈퍼카와 럭셔리 브랜드는 ‘브랜드의 역사’ 자체가 상품이다. 해리티지와 정체성, 감성적 경험이 차량의 성능만큼 중요한 가치다. 그런 브랜드들이 기존의 철학과 상반되는 전기차를 팬들의 반발 속에서도 계속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니아들의 비난이나 눈치보다 무서운 유럽의 환경 규제다. 유럽연합(EU)은 자동차 제조사 전체 판매 차량의 평균 이산화탄소(CO₂) 배출량을 강하게 규제하고 있다. 규정을 충족하지 못하면 막대한 벌금이 부과된다.
현재 EU는 제조사 평균 배출량 목표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2021년 신차 평균 탄소 배출량 대비 2030년까지 55%를 감축하고 2035년에는 100% 감축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은 탄소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2035년부터는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종료하게 하는 수순이다.
문제는 슈퍼카 브랜드의 차량 구조 자체가 이 규제와 정면 충돌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슈퍼카는 대배기량 고성능 엔진을 사용한다. 페라리의 V12 자연흡기 모델들은 차량 한 대당 CO₂ 배출량이 300~400g/km 수준에 달한다. 이걸 2030년 150~200g/km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내연기관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수치다. 람보르기니, 맥라렌, 애스턴 마틴, 부가티 등 유럽 슈퍼카 브랜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슈퍼카를 상징하는 극단적인 성능과 고회전 엔진이 현재 유럽 규제 체계에서는 가장 불리한 구조가 됐다.
슈퍼카 브랜드는 소량 생산 업체라는 이유로 일부 완화된 규정을 적용받고 있지만 완전한 예외는 아니다. EU 규제는 기준을 초과할 경우 1g/km당 차량 한 대마다 95유로의 벌금을 부과하는데 이것이 판매량 전체에 적용되기 때문에 제조사가 감당해야 할 패널티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기차,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 조건
람보르기니 ‘테메라리오’. 유럽 슈퍼카 브랜드들은 강도 높은 환경 규제에 맞춰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전동화 모델 에 주력하고 있다. (람보르기니)
연간 약 1만 3000대에서 1만 4000대 수준을 판매하는 페라리의 평균 CO₂ 배출량이 규제 기준을 초과하면 수천 대의 차량을 판매해 얻는 마진 수천억 원을 패널티로 부담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슈퍼카 브랜드들은 평균 탄소 배출량을 낮추기 위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전동화 말고 답이 없다. 말할 것도 없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순수 전기차는 평균 CO₂ 계산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슈퍼카들의 전동화 모델은 단순한 성능 과시용나 환경 이미지를 높이려는 것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규제 대응 전략의 결과물들이다. 친환경이라는 매끄러운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이면에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날것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는 이제 대중이든 슈퍼카든 럭셔리카든 성능 경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과거 슈퍼카 시장이 “누가 더 강력한 내연기관을 깎아내느냐”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전동화라는 정해진 규격 위에서 어떻게 자신들만의 헤리티지와 감성을 녹여내느냐의 경쟁 시대가 왔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연기관의 감성을 배터리에 녹여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이유, 그것은 트렌드를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페라리의 충성 고객, 또 다른 브랜드의 슈퍼카 브랜드 마니아들도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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