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소록도. 그 섬길을 따라 여행했다.
*소록도는 고흥반도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섬이다. 녹동항에서는 불과 400m 거리. 2009년 소록대교가 놓이면서 연륙됐고, 아랫섬 거금도와도 다리로 이어져 있다.
이름이 품은 다층적 서사
검색해 보면 ‘소록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여느 섬들처럼 생김새에서 유래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가까운 녹동에도 ‘사슴 녹(鹿)’ 자가 들어가는 걸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살짝 의심을 품게 된다.
언어학적으로 ‘녹(鹿)’은 ‘높다’ 혹은 ‘솟다’를 뜻하는 고어 ‘넢/놉’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다 위로 도드라진 섬 지형을 일컫다가, 그것이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발음이 유사한 사슴 ‘록’자를 빌려 왔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예가 있다. 충남의 섬 녹도(鹿島) 역시 바다 위로 우뚝 솟은 형세다.
역사적으로도 따져 볼 만하다. 조선시대 소록도는 국영 목장인 도양장(道陽場)의 핵심 부속 도서였다. 육지 목장인 도양읍과 국내 최대 규모의 말 사육지였던 거금도 사이에서 소록도는 분산 방목과 관리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소록도는 왕실 진상품인 녹용과 사슴 가죽을 조달하던 주요 공급처였다.
이렇듯 섬의 명칭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단순히 모습이 닮았다는 식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나라에는 섬도, 이야기도 많다.
격리와 차별이 빚어 낸 소록도의 잔혹사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소록도. 섬의 비극적 역사는 1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은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격리 수용 기관이었다. 본디, 자혜의원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존재해 왔고 빈민 구료를 목적으로 하는 근대 의료기관을 표방했다. 그러나 실상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통치 수단에 불과했다.
특히 소록도는 육지와 분리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절대 격리’를 원하는 일제의 입맛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당시 수용된 이들은 대부분 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부랑 한센인들이었으며, 그들은 일본식 생활 양식과 노역을 강요받으며 높은 사망률 속에 스러져 갔다. 치료보다 단속과 수용이 우선시되었던 식민지 의료의 냉혹한 단면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1945년, 자치권을 요구하던 한센인 84명이 병원 직원과 치안유지대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된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자립의 꿈을 품고 오마도 간척 사업에 피땀을 쏟았으나, 정치적 논리와 지역 주민의 반대로 강제 퇴거 당해야 했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이들을 섬 안에 묶어 두는 거대한 벽으로 남았다.
애틋함이 흐르는 길목
소록도 탐방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방문객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립소록도병원 입구까지 약 600m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둘째, 소록도 내에서는 숙박이 불가하다. 개방 시간도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30분까지로 정해져 있다. 셋째, 섬 내에서 탐방이 가능한 구역은 제한적이다. 이 또한 주민들의 프라이버시와 주민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병원까지는 600m의 데크길로 이어져 있다. 소록도의 애잔한 역사는 이곳에도 존재한다. 바로 ‘수탄장’이 있었던 길목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록도 병사지대에 격리된 한센인 부모와 직원지대 보육소에 수용된 자녀들은 한 달에 단 한 번, 면회가 허용됐다. 부모와 아이가 갈라선 채, 눈으로만 만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근심할 수(愁)', ‘탄식할 탄(嘆)’의 의미가 무겁게 느껴진다.
한편, 병원 뒤편 옹벽에는 타일 벽화가 설치돼 있다. 소록도 개원 100주년을 맞아 한센인 작가와 외부 예술가들이 협업해 완성한 결과물이다. ‘아름다운 동행-소록도 사람들’이라는 주제의 110m의 벽화는 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하고 있다. 붉은 피의 어린 사슴이 어두웠던 소록도의 과거라면 400여 개의 얼굴은 소록도의 현재를 살아 가는 주민들이다.
인권의 소멸, 단절과 억압의 현장
중앙공원은 약 2만여 평방미터 규모로 매우 멋스러운 조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또한 권력의 탐욕이 빚어 낸 뒤틀린 유산이다. 자혜의원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전국의 희귀한 수석을 징발하고, 종려나무와 향나무 등의 외래 수목을 들여와 대규모 조경 사업을 벌였다. 당시 환자들은 바위를 옮기고 나무를 심는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그는 공원 한복판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 참배하게 하는 등 신격화에 열을 올렸고, 결국 폭압에 견디다 못한 환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공원 한편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남아 있다. ‘갱생원 검시실’과 ‘감금실’의 흔적들이다. 검시실은 사망한 환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쳐야 했던 비극적인 장소다. 이곳에서 시신은 유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해부당했다. 살아생전 ‘격리’라는 형벌을 견뎌 낸 이들은 죽어서까지 마지막 존엄을 훼손당해야 했다.
감금실은 원장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도주를 시도한 이들을 가두었던 장소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는 여전히 서늘한 공기가 감돈다. 두 건물은 소록도가 겪은 ‘단절’과 ‘억압’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공간으로,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소록도 100년을 담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은 크게 전시실, 영상실, 역사관, 자료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영상실에서는 소록도의 형성을 포함해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강제 격리와 노역, 인권 침해의 기록을 상영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전시실에는 한센인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유물들이 배치돼 있다. 신체적 변형을 가진 환자들의 식기, 시설 축조를 위해 구워 냈던 붉은 벽돌, 당시 쓰였던 농기구들도 실물 그대로 보존돼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실감케 한다. 역사관과 자료관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환자 명부와 행정 문서, 의료 기록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공간이다. 특히 한센병 치료에 사용된 의료 장비들은 당시의 열악한 치료 환경과 진료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현재 소록도는 더 이상 고립의 땅이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하고 또 마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과거 수천 명에 달했던 거주민은 현재 400여 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70세를 훌쩍 넘겼지만, 대부분은 병이 나은 뒤에도 이곳에 남아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텃밭을 가꾸고 이웃과 소통하며, 여느 농어촌 마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 간다.
*김민수 작가의 섬여행기는 대한민국 100개 섬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육지와 섬 사이에 그 어떤 다리보다 튼튼하고 자유로운 길을 놓아 줍니다.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