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동차 산업이 중국산 전기차를 막기 위해 관세 장벽을 세웠자,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유럽 현지 생산기지 구축에 나서고 있다(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유럽 자동차 산업이 예상하지 못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중국산 전기차를 막기 위해 관세 장벽을 세웠지만 정작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유럽 현지 공장을 사들이고 생산기지를 구축하며 시장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최근 폭스바겐, 르노, 스텔란티스가 유럽연합(EU)에 이른바 '메이드 인 유럽(Made in Europe)' 기준 강화를 요구한 배경에도 이러한 위기감이 자리한다.
이들 세 업체는 차량 가치의 최소 70% 이상이 유럽 내에서 창출돼야 유럽산 차량으로 인정하자는 방안을 제안했다. 연구개발과 엔지니어링, 배터리 생산, 부품 공급, 최종 조립까지 모두 포함하는 기준이다. 표면적으로는 유럽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처럼 보이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중국 자동차 업체들을 겨냥한 움직임으로 해석한다.
폭스바겐, 르노, 스텔란티스가 유럽연합(EU)에 이른바 '메이드 인 유럽(Made in Europe)' 기준 강화를 요구했다(폭스바겐)
이 같은 요구가 나온 이유는 최근 중국 브랜드들의 유럽 전략 변화와 맞닿아 있다. 유럽은 지난해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추가 관세를 결정했고, 당시만 해도 관세 부과가 중국 브랜드의 성장세를 둔화시킬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실제 시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BYD를 비롯한 중국 업체들은 유럽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현지 생산 확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신규 공장을 건설하기보다 기존 완성차 업체들이 보유한 유휴 공장을 인수하는 방안이 적극 검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BYD는 헝가리 공장을 건설하는 동시에 남유럽 지역 기존 생산시설 인수 가능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체리는 스페인 현지 생산을 추진하고 있으며 일부 중국 브랜드는 유럽 완성차 업체들과 생산 협력 논의까지 진행하고 있다.
BYD를 비롯한 중국 업체들은 유럽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현지 생산 확대에 나서기 시작했다(오토헤럴드 DB)
중국 업체들 입장에서 이는 매우 합리적 전략이다. 관세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물류 비용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유럽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우려하는 대상이 더 이상 중국산 자동차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차량이 유럽 시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중국 브랜드가 유럽 공장에서 차량을 생산하고 유럽 노동자를 고용하며 유럽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결국 질문은 단순해진다. 유럽에서 생산되고 유럽인이 만든 차량이라면 그것은 중국차일까, 유럽차일까.
폭스바겐과 르노, 스텔란티스가 '70% 룰'을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 조립만 유럽에서 진행하고 핵심 배터리와 주요 부품은 중국에서 공급하는 구조를 막겠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차 시대에는 배터리가 차량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결국 배터리를 누가 만들고 공급망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자동차 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우려하는 대상이 더 이상 중국산 자동차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오토헤럴드 DB)
돌이켜 보면 이런 모습은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장면은 아니다. 1980년대 일본 브랜드들은 미국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며 무역 갈등에 직면했고, 이후 토요타와 혼다, 닛산은 미국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해 미국 자동차 산업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현대차그룹 역시 미국과 유럽 현지 공장을 기반으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지금 중국 브랜드들이 걷고 있는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과거 일본과 한국 브랜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차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은 스스로 만든 딜레마와 마주하고 있다. 중국차를 막기 위해 관세를 올렸지만 중국 업체들은 오히려 유럽 공장 설립과 인수에 나서고 있다. 동시에 유럽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메이드 인 유럽' 기준 강화를 추진하면서도 일자리와 생산시설 유지를 위해 중국 업체들의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은 이제 단순 판매 경쟁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오토헤럴드 DB)
중국차를 막으려면 시장을 닫아야 하지만 시장을 닫으면 투자와 일자리도 줄어든다. 반대로 중국 투자를 받아들이면 산업 기반은 유지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 브랜드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은 이제 단순 판매 경쟁 수준을 넘어섰다. 차량을 어디서 만드는지보다 누가 공급망을 장악하고, 누가 데이터를 확보하며, 누가 배터리를 생산하는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결국 유럽이 직면한 진짜 경쟁 상대는 더 이상 특정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다. 중국 자동차 산업 전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70% 룰' 논쟁은 단순한 원산지 기준 논의를 넘어, 향후 글로벌 자동차 산업 주도권을 둘러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인지도 모른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 오토헤럴드(http://www.autoherald.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