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만 머무르기 아쉽다면?
가볍게 반나절만에 다녀오기 좋은 근교 소도시 세 곳을 추천한다.
■다정한 마음으로 지켜 온 바다
빌프랑슈 쉬르 메르
Villefranche-sur-Mer
니스에서 차로 약 20분. 오른쪽 차창 너머로 깊고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는 빛의 각도에 따라 에메랄드에서 코발트블루로, 다시 짙은 군청으로 시시각각 색을 바꾼다. 빌프랑슈 쉬르 메르(Villefranche-sur-Mer)로 향하는 길이다.
빌프랑슈 쉬르 메르는 요즘 니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뜨고 있다는 작은 동네다. 그 이유를 구시가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단번에 알아챘다. 채도가 낮은 화사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굽이굽이 골목길을 따라 빽빽이 들어서 있는 마을은 구석구석이 포토존이 됐다.
빌프랑슈 쉬르 메르는 ‘자유의 바닷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자유는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12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를 오가는 도로나 항구에서 부과하는 통행세부터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내야 하는 시장세, 생산세 등 각종 세금을 겹겹이 부과했던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 아니라 상업을 막을 정도로 지역마다 복잡하고 무거웠다. 건물에 낸 창문 개수에도 세금을 부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자 프로방스 백작이었던 샤를 2세가 항구 도시를 조성하면서, 사람들의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 세금 감면 등 특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 빌프랑슈 쉬르 메르가 탄생했다. 그리고 창문 대신 그림으로 가짜 창문을 만들어 세금을 피하고자 했던 절세의 기지가 지금도 빌프랑슈 쉬르 메르 골목길을 예술처럼 만들고 있다.
성공한 듯했던 항구 도시로서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543년, 오스만 제국의 제독 바르바로스(Barbarossa)가 11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해 도시를 불태웠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았던 16세기 중반 사보이 공작 에마뉘엘 필리베르는 외적으로부터 이 도시를 방어할 만한 성채를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마을을 굽어보며 서 있는 시타델(Citadelle)이다. 손으로 툭툭 쳐 봐도 상당한 방어력이 느껴지는 두께다. 오랜 시간은 성채의 본질을 바꿨다. 병사들의 침실이었던 공간은 시청 사무실이 됐고, 군인들을 위한 물 공급 시설은 뛰어난 음향 덕분에 대형 무대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사람들은 성채 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답고 탁 트인 풍광 때문에 이곳을 찾고 말이다.
구시가지 항구 쪽으로 내려오면 작은 예배당 하나가 눈에 띈다. 시인이자 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가 사랑한 생피에르 예배당(Chapelle Saint-Pierre)이다. 장 콕토는 한때 어부들의 창고로 방치되어 있던 이곳을 맞은편 웰컴 호텔(Welcome Hotel)에 머물며 안팎을 꾸몄다. 어부를 상징하는 동시에 초기 기독교의 상징인 물고기 모양의 종을 매달았고, 외벽에는 밧줄 모양의 조각과 촛대, 그 사이에 모든 것을 지켜보는 하느님의 시선을 의미하는 ‘신의 눈’을 그려 넣었다.
생피에르 예배당은 단순히 종교적인 공간만은 아니었다. 한때 어부 길드(Fishermen’s Guild)의 거점이기도 했다. 어업이 중심이었던 마을, 어부 길드는 거친 바다를 생업으로 삼은 이들이 서로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얼핏 우리나라로 치면 어촌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어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직은 또 아니다. 항해 중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돌보고 조합원끼리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에 가깝다. 생피에르 예배당은 어부들이 출항 전 기도를 올리고,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며, 조합 모임을 여는 복합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오직 어부 가족들만이 이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누군가는 빌프랑슈 쉬르 메르를 인생 사진을 남긴 곳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풍광, 안온한 분위기의 골목길, 따뜻한 색감의 마을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지키고자 했던 다정한 흔적들에 마음이 머물렀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이곳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마음이 계속되길, 바랐다.
■부잣집 취향으로 실현한 두 가지 낭만
생장캅페라
Saint-Jean-Cap-Ferrat
니스를 중심으로 한 코트다쥐르는 오래전부터 유럽 재력가들이 모여드는 땅이었다.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었던) 그들은 멋진 집을 짓는 데에 진심이었다. 가장 좋은 땅에, 가장 좋은 재료로, 각 분야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을 불러 집을 지었다.
빌프랑슈 쉬르 메르에서 생장캅페라(Saint-Jean-Cap-Ferrat) 반도로 들어서는 길, 차창 밖으로 바다가 양쪽에서 동시에 보였다. 왼쪽도 바다, 오른쪽도 바다. 지중해가 이 좁은 땅을 세 방향에서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 반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멋지게 빛나는 빌라 두 채가 있다.
우선 레이디 퍼스트. 멀리서 봐도 분홍색 파스텔톤이 따뜻한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Villa Ephrussi de Rothschild)에 심혈을 기울인 베아트리스 드 로스차일드(Béatrice de Rothschild)의 이야기다. 그녀는 1900년대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집안의 귀한 딸이었다. 외할아버지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1875년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의 요청에 응해 400만 파운드를 빌려주어 빅토리아 여왕이 수에즈 운하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하니 그 재력이 대체 어느 정도였던 건지 평범한 서민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이 가문에서는 대대손손 ‘정원은 빵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베아트리스 드 로스차일드는 역시 보는 눈이 남달랐다. 아버지에게 물러받은 재산으로 이 반도 꼭대기, 바위투성이었던 황무지를 매입했다. 당시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도 탐냈던 땅이었다. 그녀는 빵만큼이나 꼭 필요했던 정원을 만들기 위해 바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토사 4만톤을 운반했다. 수백 명의 이탈리아 인부들이 동원됐다.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 증거가 바로 정원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그녀는 직원들에게 색색의 천을 준비시켜 산책로 자리엔 회색 천을, 수반 자리엔 파란색 천을, 화단 자리엔 초록색 천을 깔게 했다. 직원들을 초록색 마분지 피라미드 안에 숨겨 나무를 형상화하고,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며 나무들이 정원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먼저 눈으로 확인하며 철저한 계산 아래 설계한 것이다.
부유했던 그녀는 세상을 두루 여행했고, 빵만큼 중요했던 정원을, 여행에서 찾은 취향으로 채워 빌라를 둘러싸게 만들었다. 그렇게 조성한 정원이 테마별로 9개에 달했다. 그녀는 특히 일본을 사랑했고, 일본 정원을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조경 전문가를 일본에 직접 유학 보내기도 했다. 히스파노-무어 정원엔 한때 플라밍고와 타조, 앵무새 100마리가 살았고, 국화 3만9,000송이, 제라늄 2만송이가 피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겨울엔 가지들이 오래된 샴페인 병처럼 구부러지는 등나무 100여 그루도. 아마 베아트리스는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녀가 없었던 베아트리스는 1934년 세상을 떠나며 이 빌라와 5,000점 이상의 예술품, 모나코와 파리의 여러 부동산까지 모두 프랑스 예술원에 기증했다. 오늘날 그녀가 환원한 부동산의 가치는 약 5억유로, 한화 약 8,5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녀는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영원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빵을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빌라 케릴로스(Villa Kérylos)는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와 전혀 다른 결의 빌라다. 혹시 빌라 케릴로스를 지은 사람은 그리스를 사랑했나? 외관에서부터 물음표가 생긴다면 그 촉이 맞았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그대로 옮겨 온 건물은 아니다.
테오도르 레나크(Théodore Reinach)는 소르본 대학의 고대 그리스 문명 전문가였다. 그는 스스로 고고학 발굴을 후원했고, 그리스와 터키 각지의 발굴 현장에 자금을 댔다.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지식과 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문명의 기원, 민주주의의 발상지, 예술과 건축의 꽃이었던 고대 그리스는 일종의 이상이었고, 그에게도 고대 그리스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평생의 연구 대상이었다.
그의 호기심에 재력이 작용했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이 지었던 방식 그대로, 재료도 기법도 모두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인이 실제로 살았던 빌라 그대로 재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남을 위한 전시용 박물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고대 그리스 속에서 직접 살아 보는 삶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부자들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다).
1902년부터 1908년까지 단 6년. 석공, 목수, 대리석 조각가, 모자이크 장인까지 100명 이상의 장인들이 뚝딱뚝딱 빌라 케릴로스를 완성했다. 가운데에는 단정한 중정이 자리하고 1층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2층은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분한 것부터가 기본적인 그리스식 주택 구조다. 고대 그리스는 매우 강한 색채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특징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 빌라 한 채에 들어간 형형색색의 모자이크 조각만 50만개가 넘는다. 옥상에 빗물을 저장하는 수도 시스템을 재현한 것도, 따끈한 바닥 난방 시스템도, 목욕 문화를 재현한 커다란 욕조도, 반쯤 누운 채로 먹고 마시길 좋아했던 그리스인들을 따라 의자를 배치하지 않은 식당 공간마저, 고대 그리스식의 것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 집은 1967년까지 레나크 가문의 사유지였다. 아기가 태어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동물들이 드나들던 살아 있는 집이었다. 그해 손자 파브리스 레나크(Fabrice Reinach)가 프랑스 국가에 기증한 이후로는 모두의 것이 됐고 말이다(이렇게 귀한 집을 턱 하니 내놓는 부자들의 마음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향으로 기억하는 에즈
Eze
“에즈(Eze)는 기원전 300년경, 그러니까 철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마을입니다.”
가이드 프레데릭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수백년 전의 시간도 가늠하기 쉽지 않은데, 철기시대라니. 게다가 이 마을의 위치를 보면 이곳에 터를 잡은 철기시대 사람들을 찾아가 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아니 여러분, 도대체, 어째서, 굳이, 왜, 이렇게 높고 가파른 (그래서 위험해 보이는) 해발 427m의 바위 절벽에 모여 살았던 거죠? 21세기 허공에 날린 질문에 AI가 대답했다. 살기 편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올라갔다고. 방어가 생존과 직결되던, 보이는 것이 힘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적의 동선을 한눈에 감시하고, 접근이 어려운 절벽 위는 오히려 생존을 보호하는 거주지로 낙점됐다는 논리다. AI의 말을 다 믿진 않지만, 에즈 골목길을 오르며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위에서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기 위한 설계이기도 하지만, 성문을 지나야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가 외부인의 동선을 제한하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수천년의 역사가 응축된 이 가파른 절벽 위에, 19세기 말 한 철학자가 찾아들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였다. 지병으로 몸이 쇠하고, 친우 바그너를 잃었으며, 사랑했던 루 살로메에게 거절당한 직후였다. 삶의 바닥에서 그는 매일같이 이 길을 올랐고, 그 길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를 펴냈다. 해변에서 마을까지 약 1시간 남짓의 길에서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이번에는 AI에게 묻지 않았다.
지금은 인구라고 해봐야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매년 100만명 이상이 에즈를 찾는다. 에즈의 골목길 바닥을 메운 조약돌들이 하나같이 맨질맨질하게 닳아 있는 걸 보면 수천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갔을지 실감이 된다. 마을 정상의 열대 정원(Le Jardin Exotique)에 오르자 사방이 막힘없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탁 트인 풍경도 풍경이지만, 성인 남자 키의 곱절을 훌쩍 넘는 선인장들은 멕시코를 연상케 하고 말이다. 바다 건너온 수십 종의 선인장들이 사이사이를 메우고, 그 너머로 코발트빛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해방감이었다.
에즈를 찾는 사람들은 프라고나르(Fragonard) 공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프랑스는 향수를 사랑하는 나라고, 프라고나르는 100년 전 프랑스 향수의 수도로 불리는 그라스(Grasse)에서 문을 연 향수 브랜드다(그라스는 자스민, 장미, 미모사 등 향수 원료가 되는 꽃이 잘 자라는 도시다). 그리고 향수부터 크림, 비누 등 프라고나르의 다양한 제품을 테스트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조향해 볼 수 있는 공방이 바로 에즈 마을 초입 바로 아래에 있다. 올해는 프라고나르가 그라스(Grasse)에서 문을 연 지 꼭 1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향수는 크게 탑·미들·베이스 3단 구조로 이어진다. 가장 직관적으로 먼저 느껴지는 향이 탑 노트, 미들 노트가 전체적인 향의 중심이다. 그리고 피부에 가장 오래 남는 향을 베이스 노트로 두고 구성돼 있다. 나만의 향수 만들기 클래스는 취향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각 노트를 스포이드로 1번씩 넣어 기본적인 향수의 균형을 만들고 이후에는 원하는 취향에 맞는 노트를 조금씩 추가하며 배합하면 된다. 몇 방울 차이에도 향의 무게중심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온몸의 감각을 깨운다. 따로 맡으면 그저 그런 향도 섞으면 좋은 쪽으로 변하고, 반대로 각각은 좋아도 함께하면 은근 어울리지 않기도 한 것이, 사람 사이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에즈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나는 요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파우치에 넣어둔 나만의 향수를 꺼내어 에즈를 떠올리고 있다. 플로럴 향이 지배적이었던 향수는 2~3주 지난 후엔 사탕처럼 달콤한 향으로 변하더니, 요즘은 시원하고 청량한 쿨한 향으로 변해 가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가 싫지 않다.
글·사진 손고은 기자








